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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Nov 11. 2022

다리만 튼튼하면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보행안전도우미

정수기 고객 중에 건설현장에서 보행자들의 안전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정수기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니까 자기가 하는 일을 추천했었다. 요즘엔 도로에서 여자가 주황색 조끼를 입고 신호봉으로 보행자들을 안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지만 3년 전만 해도 드물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당시에 이미 인기 알바에 진입해 있었다.


건설 현장의 안전 요원은 도로에서 일하는 '보행 안전 도우미'와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건설안전요원'이 있다. 보행 안전 도우미는 여자를 주로 채용하고 현장 안전요원은 남자들을 채용한다. 여자들은 보행자들에게 말을 예쁘게 하는데 남자들은 괜히 호통을 쳐서 다툼이 생기기 때문에 도로에는 주로 여자를 배치한다고 한다. 반면 현장은 일이 거칠고 힘들어서 남자들을 배치한다. 남자들 자신도 현장 쪽이 수입이 더 좋아서 현장을 선호한다. 현장 안전 요원들은 월 400 정도는 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보행 안전 쪽도 수입이 괜찮았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데 당시 하루 일당이 12만 원이었다. 월 20일만 일해도 240만 원이었다. 지금은 일당 13만 원이므로 260만 원이 된다. 하루 12시간 일하는 주방 알바보다 훨씬 낫다. 나의 고객의 경우 한 건설사에 고정팀으로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야간 작업이 있는 바쁜 시기에는 한 달 3백만 원 이상을 번다고 했다.


시작하기도 쉬웠다. 하루 정도 교육을 받고나면 바로 일할 수 있었다. 나의 고객의 경우는 10여년 전 어느 날 미용실에 갔다가 길 건너 공사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리를 듣고 현장에 가봤는데 그 자리에서 채용이 되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는 건설사가 채용하면 끝인 시절이었지만 3년 전 내가 일을 하려 했을 때는 보행자 안전도우미 교육을 받았다는 이수증이 있어야 현장에 나갈 수 있었다. 건설사 측도 보행안전 도우미를 의무적으로 도로 양쪽에 배치해야 한다. 이같은 법이 생긴 것은 세월호 이후라고 한다. 우리 정부는 전국민이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고 나야 허둥지둥 조치에 나서는가 보다.


하루 정도 교육이야 가볍다. 경력도 필요없고 나이 제한도 없다. 일도 쉽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보행안전도우미는 다리만 튼튼하면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고객은 첫날 일하고 저녁에 집에 왔더니 팔뚝이 끊어질 것 같았다고 한다. 종일 서서 신호봉을 들었다 놓았다 했으니 안쓰던 어깨와 팔,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적응되면 괜찮아진단다.


여름이 힘들다고 한다. 땡볕 아래에서 안전모를 쓰고 종일 도로에 서 있어야 하므로 땀을 주체할 수 없다. 먹는 물을 한 병 얼려가도 37도가 넘는 바깥에서는 2시간도 안돼 녹아버린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목에 두르는 얼음 주머니를 발명했다면서 제품 평가를 해달라고 했었는데 저녁에 냉동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갖고 나오는 제품이어서 냉동하는 과정만 귀찮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아이스박스를 개인용으로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도로에서 일하다가 간식이 든 가방을 잠깐 의자에 두고 화장실에 갔다오면 금방 누가 집어간다고 한다. 여러 번 잃어버렸다. 여름에 목에 두르는 선풍기도 써보고 했는데 너무 더우면 실내에선 효과가 있어도 실외 현장에선 뜨거운 바람만 나온다. 이마에 머리띠를 매고 차양 모자를 쓴 다음 안전모를 쓰고, 땀은 계속 닦아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 외에는 어려운 점이 딱히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서 있어야 하니까 다리와 허리가 많이 아프다지만 그건 직업병이고 상황에 따라 잠시 앉아 있을 수도 있다. 보행자들에게 친절하면 되고, 지나가는 차를 막아야 할 때 운전자들과 싸울 일만 안 만들면 된다. 때로 사람들이 깔보는 어투로 화를 내곤 하지만 그러려니 하면 된다. 공사가 별로 없는 겨울에는 약 3개월간 쉴 수도 있다. 나의 고객은 건강만 잘 챙기고 착실하게 시간 맞춰 현장에 나오기만 하면 70까지 일할 수 있다면서 나에게 강력 추천을 했었다.

서둘러 교육 일정을 알아 봤었다. 그런데 보행안전도우미는 당시에 이미 교육 이수자가 수요에 비해 초과된 상황이었다. 연말이나 돼야 한번 교육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당장 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포기했었다. 이번에도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서 다시한번 알아봤는데 코로나 기간 동안 일이 줄어들어서 여전히 일자리수보다는 구직자가 많은 상황이었다.


교육은 수도권의 경우 한국건설안전도우미협동조합에서 대행하고 있었다. 교육비는 5만 원. 교육을 받은 후 조합에 등록하려면 근무복(주황색 조끼) 비용으로 2만2천 원을 내야 한다. 이후 조합에서 일을 배정해 주는데 수수료는 조합운영비 명목으로 기본 급여(일단 13만 원)에만 7%를 제한다고 한다. 일반 소개소는 그날 일한 전체 급여에서 10%를 소개료로 제한다.


한편 수도권 이외의 지방은 지자체에서 직접 안전교육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해당 자치단체에 알아봐야 한다고 한다.


요즘에는 나이 제한이 조금 있었다. 일을 하려면 교육 이수 후 조합에 가입해야 하는데, 가입 조건이 만 64세 이하여야 한다. 나이 들면 집중도가 떨어져서 사고율이 올라 간다는 연구결과에 따라 대형 건설사들이 만 64세 이하만 채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적인 나이 제한이 아니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에는 연령 제한이 없다. 건설사에서만 괜찮다 하면 65세 이상도 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수도권의 경우 조합의 배출 인원이 이미 4천 명이 넘어서 새로이 진입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교육 신청은 내년(2023년) 4월이나 돼야 가능하고 교육은 내년 7월 예정이지만 4월에 가 봐야 정확한 일정이 나온다. 그래도 알바로서는 그만한 일이 드물다. 지금은 내가 엄마를 돌봐야 해서 반나절만 다른 알바를 할 수 있지만 혹시 내년에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리고 엄마가 있는 요양원에 내가 함께 일할 수 없다면, 그래서 내가 종일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4월에 보행도우미 교육을 신청해볼 예정이다. 혹시 나의 고객처럼 처음 일한 건설사와 인연이 되어 계속 고정직인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한 방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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