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도슨트
몸이 좀 덜 힘들고 반나절만 일하는 알바를 찾고 있었다. 친구가 하는 도슨트라는 직업이 우아해 보였다. 친구는 시립미술관을 거쳐 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등에서 일하고 있다.
시작하는 방법은 쉬웠다. 친구는 서울시 50플러스 재단의 보람일자리 사업 중 문화시설지원단에 신청하고 서류 합격이 되어 하루 정도의 교육만 받고 미술관에 배치됐다고 한다. 친구는 대학 때 미술 전공이었지만 나는 철학 전공인데 그게 혹시 문제가 되는 건 아닐지? 상관없었다. 미술 쪽 전문가가 아닌 나도 할 수는 있었다.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에 작가와 그림에 대한 설명을 무조건 외우면 된다고 한다. 미술관에 따라서는 작가와 작품 이름을 그림 옆에 붙여놓지 않는 곳이 있다. 그런 경우 수십 개의 전시작을 통으로 외운다는 게 결코 녹록한 일은 아닐 것이다. 친구는 특히 현대미술은 이해 난이도가 높아서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친구는 어쨌든 외워서 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도슨트라는 일이 나의 일이 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요즘에는 유명 전시회가 있으면 20~30대들이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 그런 것 같다. BTS의 RM이 미술 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 젊은이들이 더 난리라고 한다. RM이 한번 왔다 가면 바로 그 그림이 뜬다. RM은 친구도 한번 봤다는데 한 전시회에 세 번이나 왔었다고 한다.
SNS에 전시회에 대한 글과 사진들이 도배가 되면서 도슨트라는 일도 인기 직업이 됐다.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나운서급 목소리와 고급 패션으로 무장하고, 해외 유학까지 하고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국내에서 유료 및 무료로 강의가 개설된 곳도 전국적으로 수백 군데에 이른다. 대학의 평생교육원들이 다들 하고 있고, 수도권은 물론 지방도시의 민간 문화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도슨트 교육 과정이 없는 곳이 없다. 미술관들도 자체적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친구는 이번 12월에 계약이 끝나면 도슨트를 그만둘 예정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 일로 그림 공부를 더 해서 전공을 살려보려고 했는데 포기했어. 나는 해외여행을 자주 할 수 없는데 직접 진품도 보지 않고 한국에서 도판만 보고 그림 평을 한다는 건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니? 일본 여자들은 정말 미친 듯이 파고들어. 수지호지 같은 미국 여자들 봐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요즘 우리나라도 광풍이 불고 있는데, 유한부인들 일기장 수준이야."
그러니 내 일은 더욱 아니었다. 보람 일자리라는 사업명에서도 알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원봉사 개념이어서 시급도 약했다. 친구는 시급 9천 원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나마 월 57시간 이상은 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정책 때문인 것 같다. 한 곳에서 6개월 정도 하고 다시 신청해서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기는 한데, 개인적으로 노리는 목표가 없는 한 오래 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급여가 적다는 게 지금 나에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 벌이가 도슨트는 아니었다.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지나치게 우아했다.
다른 보람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50플러스 재단의 서부 캠퍼스에서 상담을 받기로 했다. 나이 든 여자가 머리를 쓰는 알바를 찾을 수 있는 곳은 50플러스 재단이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일자리 컨설턴트가 상담을 해줬다. 내 경력을 듣더니 나에게 참 잘 왔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진장 많다고 했다. 보람일자리 종류는 많았다. 총 37종이 있었는데, 그중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건, 작은 도서관 지원, 방과 후 공부방 학습 지원, 경로당 행정사무 지원, 독거어르신 후견 지원, 50플러스 컨설턴트, 안전산행 지원, 문화시설 지원, 시니어 지역 상담 등 12종류나 됐다.
급여는 어느 직이나 9천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57일 한도도 같았다. 그건 어차피 감수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당장 일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올해 사업들은 전부 끝나가고 있었다. 빨라야 내년 2월 초부터 3월 사이에 신청을 하고 4월부터 일을 시작하는 일정이었다. 앞으로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그것도 50플러스 재단이 앞으로 다른 조직에 통합되거나 아예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하니 틀림없는 일정도 아니었다. 보람일자리도 없어지는 건가? 그건 아닐 것 같다고는 하는데, 문득 나조차도 정치 싸움에 휘둘리는 느낌이 들어 씁쓸했다.
조직의 변화에 상관없이 한 가지 일은 기대할 만했다. 상담 컨설턴트가 조언한 건데, 내가 요양보호사 경력이 있으니 '치매 강의'를 기획해서 50플러스에 제안하여 채택되면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치매 관련 강의는 전국에서 요청이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재단 내에 있는 공유 사무실도 쓸 수 있다. 공유사무실은 공익에 도움이 되는 직종이면 된다. 3년간 쓸 수 있고, 임대료는 보증금 100만 원에 월 3만 원이었다. 진짜 싸다. 공유사무실이니 책상 하나의 공간이지만 복사기, 인쇄기, 팩스 등을 쓸 수 있고 회의실, 커뮤니티실 등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많았다. 나로서는 장기 계획으로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됐다.
당장 일하기 위해서는 여성인력관리센터에 등록하라고 했다. 50플러스 서부 캠퍼스를 나와 여성인력센터에 들렀다. 이곳은 사람들이 너무 바빴다. 구직 등록하러 왔다니까 서류를 내주곤 담당자가 다른 일로 바빠서 내 상황을 자세히 듣지도 못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다는 것만 보고 직원은 그냥 요양보호사 구직이라고만 등록한 것 같았다. 역시 요양보호사 일은 많은 것 같다. 집으로 오는 길에 일자리가 있다는 메시지가 두 개나 들어왔다. 하지만 종일 일자리여서 나는 지원하지 않았다.
50플러스 재단의 컨설턴트가 추천해준 직업 중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었다. '생활지원사'라는 건데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 그들의 어려움을 경청하며 가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사서 배달해주는 심부름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루 5시간 일하고 월 120만 원 이상 받는다고 한다. 괜찮았다.
집에 와서 '생활지원사'를 뽑는 노인돌봄통합센터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올해 구인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인터넷으로 모집 현황을 봤는데 하반기에는 단 1명을 뽑았다. 연유를 물어보니 워낙 인기여서 경쟁도 심하고 한번 일을 잡으면 놓지를 않는다고 한다.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는 곳마다 내가 원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가능성은 열었다. '치매 전문 강사'. 앞으로 치매 교육을 받을 예정이고 시험에 합격하면 일단 하루 3시간씩 치매 환자를 돌보는 알바를 한다. 강의도 현장 경험이 중요하니까. 동시에 일 년 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각종 사회복지 기관에서 경험을 쌓다 보면 마침내 강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을 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