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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Nov 22. 2022

황당한 고객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알바 구하기

2년 가까이 일하던 집 아이들이 해외로 떠난 후 다른 집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일하던 집 아이들 엄마가 자기네 회사 동료를 소개해 줬지만 그 집이 너무 멀어서 포기했다. 등하원 도우미 일이 많은 사이트에 월 회비 25,000원을 내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적당한 출근 거리와 내가 원하는 시급 수준을 찾아 연락을 했다. 첫 번째 면접을 봤는데 며칠 후에 연락을 준다더니 그 주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두 번째 면접도 연락을 주겠다던 날 밤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연락이 올까 봐 연락 주겠다는 날까지는 다른 집을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너무한다 싶었다.


세 번째 집은 아파트 앞 카페에서 면접을 보고 며칠 후인 일요일까지 연락을 준다고 했다. 그 전의 두 집의 예가 생각나서 나는 일요일 전에 다른 집을 알아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바로 그러라고 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을 했다. 그때 알았다.

'앞에서 퇴짜 놓으려니까 민망해서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고 한 것이구나.'


다음날 저녁, 나는 다른 집이 결정되어 미안하게 됐다고 연락해 줬다. 다른 집은 알아보지도 않았지만 그 고객도 다른 고객들처럼 일요일이 지나도 연락을 안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사실 내가 연락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다른 구직자들은 면접 볼 때 나중에 연락 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퇴자 맞은 걸로 알아들었을 거 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순진한 거였다. 혹은 멍청하거나. 


마음이 심란해져 있는데 전화가 한 통 왔다. 나이 든 남자였는데 구인 사이트 보고 연락한다면서 주 2회 아파트 청소를 부탁해 왔다. 혼자 살기 때문에 할 일이 별로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매일 하는 알바를 원한다고 했더니 돈 문제는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다시 청소 말고 등하원 도우미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했다.

"제가 사무실 하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사님께서는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저는 여기저기 다른 사람 손이 필요하니,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 맞아떨어지는 방법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제 사무실에서 만나 봅시다."

마음이 약한 나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다. 전화 통화로 볼 때 예의는 있는 사람 같았고 한편으론 혹시 사무실 보조도 가능할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시내의 고층빌딩 숲 안에 있었다. 무려 15층까지 올라가 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크기는 다섯 평 정도, 책상은 세 개가 가운데에 붙여져 있었다. 문쪽으로 4인용 소파가 있었다. 벽에는 법무사 사무실 사업자등록증을 액자에 끼워 붙여 놓았다. 그 옆으로 복덕방 벽에 있는 것과 같은 대형 지도가 있었다. 바닥은 비교적 깔끔해서 인상이 나쁘진 않았다. 고객의 얼굴이 오징어 게임 일남 역의 오영수 님 같이 생겨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아이구, 길은 잘 찾으셨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좋더니 인상은 더 좋습니다. 허허허."

"감사합니다."

"우선 제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서로 신뢰가 있어야 얘기도 잘 될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우린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명함부터 내밀었다. 근처의 무슨 동 몇 구역 재개발조합 준비위원회의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이었다. 명함을 보자 나는 내가 시간을 엉뚱한 데 소비하러 온 게 아닌가 의혹이 일었다. 그래도 예의는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재개발 사업에 관여하는 회사인가 봐요"

"제 아파트가 거기에 있습니다. 허허허. 하지만 회사는 이런저런 법적인 자문을 하는 곳입니다. 제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해 왔어요. 대기업의 법무팀에서 잘 나갔었어요. 근데 제가 사람을 너무 잘 믿어서 평생 당하고 산 사람이에요. 정말 얼마나 많이 당했는지, 애들한테까지 최근에 5억을 뜯겼어요. 내가 자식들을 일절 안 봅니다. 딸이건 아들이건 전부 나한테 뜯어갈라고만 하고 도와주는 건 하나도 없고... 내가 정말 외롭습니다. 주변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요. 외로워서 죽을 거 같습니다."

"아, 네에."

내 마음이 급격히 굳어졌다.

'뭐야, 외로워서 대화할 상대를 구하는 건가?'


그는 일어나서 자기 책상으로 가더니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있던 서류들을 들추며 울먹거렸다.

"이게 전부 소송 자료예요. 이거 때문에 제가 8년을 고생했어요. 내가 이 사람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아들이 뇌성마비였거든요. 그 아들 이름으로 된 땅인데, 이걸 다른 형제들이 빼먹으려 해서 내가 법적으로 소송하는 걸 도와줬는데 중간에 돈 한 푼 안 주고 날 이용만 해 먹고 소송은 다른 놈이 다 해서 돈 먹고 날르고 난 10년간 고생만 하고... 난 평생 당하고만 살았어요. 자식 놈이라고 돈을 다 뜯어가서 제가 지금 두 달만 지나면 파산이에요. 돈이 딱 떨어지게 생겼어요."

"저... 그러면 일하는 사람 급여는 어떻게 주시려고..."

"아, 그건 제가 두 달 지나면 또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사업도 하시나 봐요."

"혹시 여사님은 비트코인을 아십니까?"

"네. 들어는 봤어요."

"제가 하는 게, 이게 디지털 머니인데, 비트코인이랑 같은 겁니다. 한번 투자를 하면 다음 달에 4부 이자를 줍니다. 세 달만 지나면 원금을 회수합니다. 지금 난리가 났어요. 서로 투자하겠다고요. 제가 두세 달만 지나면 이 소송건에서 돈이 좀 나옵니다. 그걸 여기 투자할 건데요, 그러면 네 달 후부터는 다시 돈이 도는 거죠. 그 사이에 한 두 달만 고생하면 됩니다. 급여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코인 투자를 한번 고려해 보세요. 저기 저 자리가 우리 실장 자리인데, 지금은 일 보러 나갔습니다만, 그 실장이 원래 북한 이주민이었어요. 너무 힘들게 살았는데 저한테 청소 일을 하러 왔길래 제가 사무실에서 나를 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코인 일을 하느라고 엄청 바쁜데 이 실장이 최근에 8천 만 원을 벌었어요. 세 달 만에요."

나는 아주 불쾌했지만 천천히 일어나 성의껏 말했다.

"잠깐만요, 고객님. 저는 그런 도박 같은 건 안 해요. 돈도 없고요. 그런 거 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도 없고요. 저는 고객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는 당황하면서 서둘러 말했다.

"아니, 아니, 그러면 다른 방법도 많습니다. 제가 너무 외로워서 그래요. 저와 하루에 한 번씩 대화만 나눠주면 제가 급여를 쳐드리겠습니다. 저와 얘기해 보면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고 한번 고려해 봐 주시면..."

"죄송해요. 저는 이제 와서 새로운 남자와 특별한 관계를 만들기 싫어요."

"아니, 아니, 좋은 관계라기보다 친구처럼 지내면 되죠. 그리고 여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저한테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 아파트에 여사님이 주민 등록을 옮겨 놓으세요. 그러면 재개발될 때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면 돈 버는 겁니다."

내가 기가 막혀서 픽 웃으며 말했다.

"언제 재개발이 될 줄 알고요. 그리고 전 편법을 싫어해요."

"그러면 아파트 명의를 여사님 앞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실제 주인이 나라는 걸 명시하면 됩니다. 나중에 돈 벌면 30%를 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점점 더 신뢰할 수 없는 말씀만 하시는 것 같아요. 제 명의로 했다가 고객님 빚이 저한테 다 오라고요?"

"아니,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 나한테 가르쳐 주더라고요. 좋은 여자를 사귀려면 뭔가 돈 될 만한 거를 내놓아야 한다고 해서, 그래서 말씀드려 본 거예요. 명의는 이전 안 하면 되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제가 잘 몰라서... 좀 가르쳐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고객님이 정확히 뭘 원하시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뭐든 저한테는 없는 거 같아요.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가 뒤따라 나오면서 물었다.

"나중에 연락드려도 될까요? 오늘 식사 대접을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그냥 가시니."

"네 그러세요. 시간이 되면 식사 한번 할 수 있겠지요."

물론 나에게 시간은 절대 안남을 터였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오지 않고 자기 사무실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실망감과 당황함이 섞여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정확히 무엇을 실망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황당한 하루였다는 느낌만 남았다. 처음 전화 와서 자꾸 만나서 얘기하자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진짜 나는 순진한 것 같다. 순진도 정도껏이어야지...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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