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 / 정수기 관리와 등하원 도우미
정수기 관리를 할 때 하루는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뺑소니로 신고가 들어왔으니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경찰서에 달려갔다. 나는 자동차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기억이 없었다. 누군가 사기를 쳤나? 내가 씩씩대며 절대로 그런 일 없다고 하자, 경찰관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건너편 빌라에 있는 CCTV에 찍혀 있어요."
"녹화를 보여 주세요."
"그 집에 가서 봐야 됩니다."
함께 갔다. 녹화 장면에는 새로 산 듯 깨끗한 트럭 옆을 내 차가 쓱 지나가고 있었다. 트럭에는 내 차가 지나가면서 긁었을 법한 자리에 선명한 자국이 나 있었다. 장소를 보고 기억을 떠올려 보니 이날 나는 처음 방문하는 고객 집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차를 몰고 있었다. 네비를 켜 놓고 골목길을 이리저리 찾아가던 중, 쿠궁하는 소리가 들려서 곧바로 차를 세우고 길바닥을 봤었다. 그 소리가 바닥에서 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어서 그냥 떠났었는데 그게 길가에 세워진 트럭을 긁는 소리였던가 보았다. 할 수 없이 벌금을 냈고 보험 처리를 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엔 또 다른 고객 집에 처음 가느라고 골목길을 이리저리 꺾어지는 중이었다. 고개를 앞뒤 옆으로 돌려가며 창밖을 살피면서 고객의 빌라를 찾아 천천히 차를 몰고 있었는데, 또다시 길가에 서 있는 승용차를 부욱 긁으며 지나갔다. 너무 놀라서 나가봤고 정확히 어디를 긁었는지 제대로 확인도 못한 채 명함만 꽂아두고 고객 집으로 갔다. 역시 보험 처리를 했다.
자동차를 운전한 지 30년이 넘는 동안 초기에 냈던 가벼운 접촉사고 외에는 이렇게 넋이 빠진 채 사고를 낸 적은 없었다. 이듬해의 자동차보험료는 110만 원이 나왔다.
나 자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히 반사 신경이 늙어가는 중이었다. 정수기 일을 그만둔 후,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명심하며 운전했는데도 그로부터 1년 사이에 가볍긴 하지만 또 다른 접촉 사고를 두 건이나 냈다.
자동차를 없애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등하원 도우미를 시작하면서 도저히 없앨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아파트가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여름과 겨울에는 출근하기가 힘들었다. 출퇴근을 하루 두 번 해야 해서 더 그랬다. 아침에 아이들을 챙겨서 등원시킨 후 나는 집에 왔다가 오후에 다시 아파트로 가서 아이들을 하원시키고 아이들 엄마가 퇴근하는 밤까지 돌보는 일정이었다. 그 때문에 도우미 하는 사람들이 잘 안 오려한다고 했다. 나도 차가 없으면 무척 힘든 출퇴근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 중에도 차는 매우 유용했다. 아침에 등원할 때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내리면 아이들 두 명을 데리고 유치원 버스가 서는 정문까지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런 때 차는 필수라고 생각되었다. 여름에 아이들은 수시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정문 밖으로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 주려면 차가 있어야 수월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차는 내게 생계용이었다.
그런데 지난 여름, 자동차보험료가 무려 140만 원이 나왔다. 보험사에 물어보니 과거 3년간의 사고 횟수에 따라 보험료가 책정된다고 했다. 자동차 유지 비용이 너무 부담이 됐다. 또다시 자동차를 없애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나의 순간대처능력이 더욱 떨어질 것이다. 눈도 침침해지고 있다. 요즘에는 대중교통이 편하고 혹시 차가 필요하면 렌트하면 되지 않겠나. 그동안은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될 경우 자가용이 편했지만 이젠 엄마가 잘 걷지도 못하니 119를 불러야 하리라.
모든 면에서 자동차는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망설이고 있었다.
평생 나는 자동차를 몰며 일을 했다. 하지만 자동차는 내게 생계용이면서 동시에 반려자와 같았다. 지친 몸으로 자동차를 몰고 퇴근을 할 때면 차창 밖으로 붉은 석양이 도시에 내려앉는 모습이 흘러간다. 석양을 바라보며 나는 잃어버린 꿈이 그리워 눈물을 줄줄 흘리곤 했다. 속상할 때면 자동차를 몰고 한적한 산자락 밑에 가서 욕을 퍼붓기도 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면 나는 그냥 자동차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의 소중한 몇몇 추억들 속에는 항상 자동차가 함께 했다.
내가 결혼하기 전, 엄마와 나는 내 자동차에 각종 찌개거리와 쌀을 싣고 국도를 따라 여행을 하곤 했다. 당시는 아무 데서나 취사가 가능했다. 춘천댐 바로 옆에 오월리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춘천댐으로 흘러드는데, 냇물과 댐의 경계 부근에 넓은 호수가 형성되어 겨울에는 꽝꽝 언다. 그곳에선 낚시꾼들이 군데군데 앉아 얼음에 구멍을 뚫어 놓고 낚시를 하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그 아저씨들이 얼음 구멍에서 잡아 올리는 물고기들을 탄성을 지르며 구경했었다. 우리가 커피를 타 주자 아저씨들이 낚시로 잡은 고기들을 줬다. 피라미들도 있었고, 빙어도 있었다. 우리는 마을로 얼른 돌아와 냇물에서 물고기의 배를 가르고 깨끗이 씻은 후 매운탕을 끓였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매운탕은 처음 먹어봤었다. 엄마와 나는 지금도 평생 가장 맛있었던 음식으로 주저 없이 그날의 매운탕을 꼽는다. 회로 먹은 빙어도 당연히 일품이었고.
오월리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네 식구가 여러 번 갔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자동차 뒷좌석을 침대 식으로 만들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놀며 자며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조수석에서 엄마는 무릎에 음식을 잔뜩 놓고 뒷좌석의 아이들에게 먹이랴, 운전하는 내 입에 넣어주랴, 자기 입에 넣으랴 분주했다. 여름이면 아이들과 강원도의 바닷가로 놀러 가던 추억들도 다 자동차와 함께했다.
가족과의 추억은 20년 전부터 거의 사라졌다. 아이들은 친구들끼리 놀기 더 좋아했고, 교육비는 점점 많이 들어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항상 자동차를 끌고 아이들과, 혹은 엄마를 데리고, 혹은 나 혼자 여행을 떠나는 환영을 그리며 살았다. 그림 속에는 어딘가 국도를 달리다가 작은 냇가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놓고 라면이라도 끓여 먹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옆에는 항상 자동차가 서 있다.
자동차를 없애면 마치 나의 오래된 추억들이 사라질 것만 같다. 자동차를 없애면 어느 순간 훌쩍 일상을 떠나버리는 꿈을 꿀 수 없을 것 같다. 영원히 여행을 못할 것만 같다.
자동차를 그냥 둘 경우 월 얼마나 나갈까. 자동차세와 자동차 보험료로 15만 원. 엔진 오일 등의 수리비, 감가상각 비용까지 약 15만 원, 총 월 30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어떻게 할까.
... 그냥 두기로 했다. 꿈꾸는 비용 월 30만 원... 좋아, 좀더 일을 하자. 결론을 내렸다. 결정하고 났더니 고맙게도 딸이 자동차 보험료는 자기가 내준다고 했다. 그래, 살다 보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법. 꿈은 꾸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