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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중3에 벌써 ‘영포자’

: 멀리 말고 오늘 하루만

by Hey Soon

❚영어를 아주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한 기초영어반

미국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이후 다시 나의 본연의 자리인 영어교사로 돌아오고부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있다. 특히 지난 해 새로 옮겨온 현재 근무학교 아이들의 학구열은 꽤 높은 편이다. 이곳에서는 미국 유학 경험이나 해외 거주 경험 그리고 그곳에서의 배움이 의미있게 쓰이고 있는 것 같아 영어 교사로서는 최고다.


지난해부터 내가 근무하는 교육청은 소수정예 방과후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각 학교에 예산을 지급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의 목표는 평소 평균치의 학생들 위주의 정규 수업으로는 학업에 아주 뛰어나거나 아주 부진한 학생들의 니즈를 제대로 충족시키기 못하는 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영어 과목 학년 평균에서 아주 밑도는 학생을 위한 영어 기초반과 반대로 아주 우수한 학생을 위한 영어 영재반을 각각 개설했다. 특히, 기초 영어 학습이 아직 안 되어 있는 학생을 지도하는 영어 기초반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영어 성적이 100점 만점에 20점이하로 영어를 아주 아주 힘들어하는 학생 세 명을 지도했다.


❚영어 시험 답안지 한 줄 세운 아이

기초 영어반에 등록된 세 명 중 한 남학생은 1학기 기말 영어 시험에 답안지를 한 줄 세워서 13점을 맞은 그야말로 영어포기자였다. 나머지 과목도 성적이 부진하여 그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현재 근무하고 있는 지역은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내신성적이 75%선은 넘어줘야 가능한 상황이다. 그 친구의 성적은 거의 80% 후반 즘이기에 성적의 급상승없이는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큰 결심

여름방학 직후 그 학생은 마음의 큰 결심을 했다.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세운 영어 답안의 한 줄이 자신의 인생 행로에 아주 치명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기초영어반에 등록하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기초가 부족한 학생은 해도 큰 표시가 나지 않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학생이기에 대부분 학원에서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도전정신이 발동했다. 큰 결심을 한 아이의 눈빛은 참 아름다웠다. 교사로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참 고마운 눈빛이다.


방과후 수업은 주로 시간표가 6교시까지 있는 날 45분 수업을 연강으로 해서 총 90분간 진행했다. 하지만 학교 행사가 있거나 시험 직전 주는 7교시까지 있는 날도 수업을 했다. 원래 수업은 90분간이지만 아이들의 배움 속도가 느리다 보니 대부분 2시간 이상 진행되는 일이 태반이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평소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학생들이라 시험 공부를 어떻게 계획할지, 뭐를 어떻게 공부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막막한 상황이었다. 시험 범위 공부 스케줄 잡기부터 단어 외우는 방법, 기본 패턴 문장 외우는 방법, 쉬운 말로 풀어서 하는 문법 설명, 그리고 문장의 주어/동사 찾는 법 등 하나, 하나 짚어줘야 하는 것이 필요했다. 단어를 다음 시간까지 외워오너라 하고 끝내면 다음 시간에 되도 결국 안외워온다. 그래서 그 방과후 수업 시간동안 단어 암기 까지 해결해주는 게 필요했다. 새단어들을 함께 크게 소리내어 여러 번 읽고 읽으면서 발음의 특징을 살려 그 의미와 매칭시키는 암기법과 같은 것도 동원하고 단어-뜻 매칭하는 메모리 게임을 하기도 하는 등 단어 암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중학교 영어의 문법은 사실 그 핵심을 문법용어없이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 본질을 잘 간파하도록 설명하면 영어 포기자인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번 기초 영어 반 아이들도 그러했다. 이번 학기 중3영어 교과서의 주요 문법인 ‘가정법 과거/과거완료’, ‘분사구문’, ‘to 부정사의 부사적 용법’ 등도 문법 용어 없이도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중간 안내 멘트>

기본적인 문법 설명은 이미 브런치북 “한국식 영문법 말고 원어민식 그림문법”, 그리고 브런치의 매거진 “이지하고 이지적인 영문법 강의”를 통해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어의 기초가 부족해서 스스로 영어를 못 한다고 느끼시는 분은 영문법을 일부러 어렵게 가르치며 권위를 내세우던 많은 영어 교육자들로부터 가스라이팅 당하신 겁니다. 알고보면 영문법은 초등 저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것입니다.


앞으로도 현장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특히 영어를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영문법을 목표로 고민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이미 완성한 브런치 북 “한국식 영문법 말고 원어민식 그림문법”외에도 “이지하고 (eassy) 이지적인 (intelligent)한 영문법 강의”에 더 많은 글을 연재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진정한 프로는 쉽게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라 했다. 그가 애플 폰을 처음으로 출시할 때 그는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애플폰의 기능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미국 유학을 끝내고 귀국 후 다시 영어 교사로 돌아와 달라진 점은 영어 교사로서 나의 마음 가짐이다. 어렵게 설명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하지만 쉽게 설명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게 설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것은 진정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도 진행중인 나의 고민이지만 나는 그런 부분에서 진정한 전문가이고 싶다.


지난 2년간 중3 영어를 지도하고 그 학생들로 받은 나의 영어 수업에 대한 평가이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게 민망할 수 있음에도 이곳에 기록하고 싶은 이유는 나의 노력이 그들의 눈에도 보인다는 점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글이 앞으로 더욱 그러한 노력을 하도록 나 자신을 위한 리마인더가 되었으면 좋겠다.



❚흔들리는 마음

방과후 수업은 한 학기에 총 10회를 만나 90분 수업을 한다. 절반은 2학기 중간고사를 대비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2학기 기말고사를 대비하도록 계획했다. 1학기 기말 영어시험에 답안지를 한 줄 세우기를 해서 13점을 받은 그 남학생은 2학기 중간고사에 문제를 풀어서 41점을 받았다. 거의 30점 가량이 상승했다. 물론 평점으로 하면 여전히 E이긴 하지만 그 친구는 이제 영어시험지를 받아들고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풀어 보려는 마음을 먹은 점이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리고 점수도 한 달 반 만에 30점 가량 올랐다. 나는 그 아이의 가능성을 보고 남은 기말고사 대비에 박차를 가했다. 매번 수업은 90분이 아니라 거의 120분, 두 시간을 풀로 채우며 이어졌다. 날은 어둑어둑해져도 그 아이의 눈은 의지로 가득했다. 평생 처음으로 영어를 진지하게 파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교사로서 도전의식 마져 들었다.


기말 고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기말고사를 두 주 앞둔 어느 날이 었다. 풀죽은 표정을 하고 나타난 그 남학생이 넋두리를 한다.

“친구들이 영어는 열심히 공부해봤자 평점 한 칸 올리기 힘들대요. 그러니 쉽게 올릴 수 있는 암기 과목이나 하라고 해요. 선생님, 저 어떻게 해야 해요?”

당장 내신 성적을 올려야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인데다가 영어라는 과목의 특성상 당장 단어를 많이 암기한다고 문법을 암기 한다고 성적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 친구들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 학생에게 영어는 이제 포기할 과목이 아닌 해봄직한 과목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지점까지 도달한 상황에서 다시 영어 포기자로 가려고 하는 그 아이의 말이 너무 안타까웠다. 영어라는 과목은 평생 그 아이에게 큰 날개가 될 텐데 이렇게 다시 꺽어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그래서 구체적인 수치를 알려주었다. “이번 학기 너의 영어 성적은 수행평가를 다 합해서 계산하면 아직은 E이다. 하지만 기말고사에 52점을 넘기기만 하면 평점이 한 등급 올라갈 거야. 중간고사는 41점 얻었으니 기말에 52점 얻기는 가능한 일일 것도 같은데 어떠니?”


❚멀리 말고 오늘 하루만

그 학생에게 그 구체적인 숫자가 큰 임팩을 준 모양이다.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가시거리의 그 점수 52점을 목표로 그 학생은 다시 초심을 다잡았다. 그리고 매번 까먹은 단어를 다시 소리내어 읽고 또 읽고, 또 흐릿한 문법 사항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고 잊어버리지 않게 그 핵심 문법사항이 쓰인 통문장을 리듬을 넣어 외우고 또 외웠다.


드디어 그 친구의 기말 고사 영어 성적이 나왔다. 우리의 목표인 52점을 훌쩍 넘은 57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뛸 듯이 기뻐하며 키가 180에 가까운 그 중3 남학생은 마치 꼬마처럼 나에게 자랑하러 교무실에 한 숨에 달려왔다. 다른 과목도 성적이 다소 올라 그 친구는 이제 내신성적 등급이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 안정권으로 들어섰다.


물론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그 학생의 인생에서 성공을 보장할 리 없다. 어쩌면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더 고전을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는 열심히 하면 되더라는 걸 깨달은 소중한 경험을 한 셈이다. 멀리 말고 그 하루 하루 해야 할 영어 공부에 집중했고 100점이 아니라 자기가 성취해야만 하는 목표 그리고 구체적이고 달성가능한 정도의 숫자에 집중했다. 그렇게 멀리 말고 오늘 하루만 생각하며 매일을 달리면 꼭 해낼 수 있음을 그 아이는 경험했다.

❚영어 공부 더 해보려구요.

이제 기말고사를 무사히 마친 그 친구는 나를 또 다시 찾아왔다. 그 학생은 내가 지도하는 반이 아니기에 방과후 수업이 끝난 이후로 따로 만날 일이 없다. 하지만 그 학생은 어느 날 나에게 찾아와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했기 때문에 영어 공부를 이제 제대로 시작해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영어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 학생에게 방과후 수업을 위해 신청한 몇 가지 교재를 건네주고 혼자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코칭을 해줬다. 가끔씩 복도에서 마주치면 영어 공부 어떻게 되어가니 물으면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앞으로도 그 학생이 넘어야 할 산은 많고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 그렇게 해봤듯이 앞으로도 멀리 말고 오늘 하루만 열심히 하는 데 집중하며 롱런하기를 기대한다.


영어 교사로 일하는 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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