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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 Soon May 23. 2023

# 22. 농구에 진심인 아들 키우기 3

: 열정과 냉정 사이

❚열정

농구에 진심인 아들은 지난주 농구 대회에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었다. 한 달간 걷기 말고 뛰기나 여타 운동은 하면 안 된다고 한다. 4강 전에서 부상을 입고도 결승까지 완승하며 최선을 다한 그 다섯 경기가 한 달 치 농구가 될 줄은 몰랐다.      


아들 방문에는 간이 농구 골대가 걸려져 있다. 심심할 때 마다 아들은 작은 곰인형으로 슛 연습을 한다. 미국이었으면 집 앞 드라이브 웨이에 세워진 농구 골대에서 슛 연습을 했겠지만 이곳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층간 소음이 염려되기에 작은 공조차 튀기는 게 불안불안해 아들에게 공 대신 곰인형으로 슛 연습을 하게 했다. 참 웃픈 일이다.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들은 나와 같은 염려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자연스레 몸으로 놀기보다는 핸드폰 게임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서 지낸 몇 해 동안 아들은 핸드폰도 없었기에 핸드폰 게임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미국 생활을 하고 난 후 귀국한 이곳에는 마땅한 동네 농구장도 없고 시설도 많이 노후되었다. 무엇보다 농구를 할 친구 찾기가 참 어렵다.    


작년 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아들은 친한 친구와 체육 선생님께 학교 농구 자율 동아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선생님은 아이들을 모집해보라는 하셨고 아들은 몇몇 친구들과 농구 동아리 모집 안내문도 학교 곳곳에 부착하는 등 나름 열심히 모집을 했다고 한다. 열두 명 정도 모집을 해서 아이들 이름과 서명을 받아서 학교 체육 선생님께 제출을 했다고 한다.      


❚냉정

안타깝게도 그 체육 선생님은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동아리 지도를 해주지 못 한다고 했다. 애써 아이들을 모았지만 학교에서 별 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꿈에 부푼 아이들의 농구 열풍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 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말 없는 중3 아들은 한참 지난 후에야 우연한 기회로 나에게 그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핸드폰 게임을 좋아할 아이들이지만 운동을 하겠다는 아이들에게 무관심으로 일축하는 학교가 원망스러웠다. 아이들 모집을 하라고 했으면 무어라도 해줄 마음이 있었을 텐데, 아이들에게 괜한 짓을 하게 만든 상황이 되었다.  

   

학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아이를 학교에 맡긴 상황이니 달리 건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일에 대한 이야기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2학기 개학 후 바로 농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더 만들어 달라는 취지로  학교에 문의를 드렸다. 전화를 한 덕분으로 학교는 1학기에 열어 주지 않던 방과 후 농구 교실을 개설해 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 한 학기가 끝이었다. 이번 새학기에는 또다시 농구 방과후 수업은 아예 신청 강좌 명단에도 없었다. 학교의 노력이 꾸준하지 않으니 아이들의 농구 사랑도 급격히 사라져버렸다.    

  

❚열정과 냉정 사이

대부분 우리나라 중고등 학생들은 운동보다는 핸드폰 게임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아들과 몇몇 친구들은 여전히 농구 사랑을 키우고 있다. 무심한 학교에다 대고 아들은 더 이상 기대하는 게 없어 보였다. 지난 주 3대 3 농구대회도 학교에 말씀을 드렸으면 학교 안전공제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은 학교 체육 선생님께 말씀 드리면 나가지 말게 하거나 학교 이름을 걸고 나가는 걸 반대할 거라면서 말을 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출전했다. 아들 팀이 우승을 했지만 학교에 그 결과를 말하기조차 꺼려 했다. 그 정도로 학교에 대한 아이의 불신은 심했다.      


3대3 농구 대회는 사실 학교에 협조를 구할 필요까지는 없는 대회이다. 그저 마음 맞는 아이들끼리 개인적으로 출전하면 되는 대회이다. 하지만 교육감배 농구 대회는 상황이 다르다. 반드시 학교 체육 교사의 인솔하에 참가해야 하는 대회이다. 부상을 입은 아들이지만 한 달 후 있을 교육감배 농구 대회에 출전하고자 학교 체육 선생님께 여쭈었다고 한다.     


“농구 자율 동아리도 구성 안 하고 연습도 안 했으면서 딸랑 몇 명 농구 잘 한다고 나갈 수 있는 대회가 아니다. 난 그런 스타일 싫어한다. 나는 대회 출전시킬 수 없다.”


학년 초에 자율 동아리 구성을 했어야 한다.

한달 정도 전부터 연습을 했어야 한다.

너희들 탓이다.

모든 책임을 아이들에게 지우고 아이들을 탓하며 체육 선생님은 아이들의 부탁을 단번에 거절하셨다.  

    

농구에 열정을 가진 아이들과 농구에 냉담한 학교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 고리도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접점이나 해결책을 마련해고 싶었다. 아니 마련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 생각했다. 학교에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아이들의 패배주의, 학교에 대한 불신은 심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아이들 마음에 패배주의나 학교에 대한 불신이 깊이 자리 잡게 하는 건 방치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두드려 보자.

일단 그 체육 선생님과 통화를 해봐야겠다. 아이가 전하는 말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기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소통을 시도했다. 하지만 내용은 같았다. 리더쉽이 부족한 아들이 아이들의 자율 동아리 모집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아이들의 농구 연습이 부족해서 대회에 나갈 실력이 될 수 없단다. 몇몇 농구 잘하는 아이들을 믿고 대회에 데려 갈 수 없단다.      


“그 대회가 그렇게 대단한 대회인가요? 우승할 게 아니라면 참가도 하면 안되는 건가요? 인근 학교 중 참가하려는 학교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하던데요. 기껏해야 농구 잘하는 아이가 몇 명 뿐이라던데요. 그저 대회에 참가해서 아이들의 기량을 뽐내고 애교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대회의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체육 선생님은 앞서 한 말 만 반복할 뿐이지 나의 말에 속시원히 대답을 주진 않았다. 교육감배 농구 대회가 농구 전문 선수들의 대회도 아닌 데 계속해서 연습 부족을 이유로 대회 참가를 거부하는 체육 선생님의 이야기는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대회에 나가기가 귀찮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없앨 수 없었다.      


❚물러서는 지혜

기를 쓰고 아이의 입장을 설명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물러서기로 했다. 아이를 맡긴 입장에서 학교 선생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봤자 유익이 뭐가 있으랴? 물러설 줄 아는 지혜를 힘들지만 발휘해보기로 했다. 그깟 대회 하나 포기하면 되는 것인데 뭐.      


❚물 건너 가버린 일

포기를 하고 나니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었다. 불합리한 기성세대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춘기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학교에 대한 불신을 키우며 자칫 반항적이 될 수 있다. '우리 학교는 노답'이라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교육적이진 못 한 상황이다.

     

답답한 마음에 학교 교감 선생님께 의논을 드려볼까 하고 학교로 전화 문의를 했다. 공교롭게도 출장 중이시란다. 나의 연락처를 남기며 아쉽게 통화를 끝냈다. 하필 각 학교별 체육과 선생님들의 농구대회 담당자 회의가 있는 날, 교감 선생님 마저 출장이다. 이제 아들 학교 체육 선생님의 불참 의사를 번복시킬 방법이 없다. 그저 물 건너 간 일이 되버렸다.     

 

❚희망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는 가운데, 아들이 대뜸 이런 말을 한다.

“엄마, 우리가 매일 농구 연습하고 있으면 교감 선생님도 늘 오셔서 우리랑 농구 하셔.”

"오늘 아침에 등교하는 데 교감 선생님께서 오늘은 농구공 안 가져오네? 하셨어."      

“진짜? 그걸 이제 왜 이야기해?”

“왜?”

“내가 니라면 교감선생님께 부탁드려보겠다. 교육감배 농구 대회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려봐~. ”     


❚간절함

드디어 주말이 지나고 아들은 간절함을 교감 선생님께 전해보려 결심했다. 긴장되는 지 아들은 아침 등굣길에 몇 번이고 교감 선생님께 드릴 말씀을 나에게 물어본다. 아침 등굣길 내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아들은 속으로 교감 선생님께 드릴 말씀을 몇 번이고 되내이며 교실까지 걸어갔을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들은 그날 교감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교무실을 찾아갔을 때 교감 선생님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히 그날 오후 교감 선생님께서 일전에 전화 번호를 남긴 덕분에 전화를 걸어 오셨다. 살짝 기대를 하며 아들과 친구들의 마음을 전했다.  역시나 학교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서 별달리 도와줄 부분이 없다고 하신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지만 개선되지 않는 상황이라 포기하기보다는 아쉬운 부분을 알려드려야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의견을 드려봤다.      


학교의 결정이 어떻게 되었든, 아들의 부상이 회복되는 데에는 한 달이 걸린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한 달 후 바로 농구를 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경과를 살펴봐야 한다고 하셨다. 병원에 다시 엑스레이를 찍으로 가는 길 내내 기도했다. 별일이 없기를. 지난 주에 비해 다행히 경과가 좋다고 하셨다. 한 달 후면 완치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 달 후 바로 농구를 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고 하신다. 아들의 낙심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오는 차에서 아들은 잔뜩 화난 얼굴로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른 채 마음속으로 기도만 했다.     

 

❚우리가 알지 못한 큰 그림

부상 때문에 결국 그 교육감배 대회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혹여 학교가 허락한다 하더라도 아들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이 출전할 것이다. 결국 몇 날 며칠 학교 체육 선생님께 건의를 하고 교감 선생님께 불편한 사항을 알린 모든 일들이 수포가 되어 버렸다. 아들은 친구들이라도 그 대회에 나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이 일들이 과연 아들에게는 의미가 없던 것이었을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큰 그림이 있는 것일까?

곰곰이 며칠 간의 일들을 되새겨 봤다.


대회 2주 전에는 교회에서 농구 교실을 도와준다고 아들에게 장학금을 주신다고 하셨다.

아들은 잘 따라오던 주일 예배를 대회 1주전 불쑥 가지 않겠다고 애를 먹였다.

지난 3대3 농구 대회에서 아들 팀은 우승도 하고 아들은 MVP까지 받았다.

대회 중 고관절 쪽 골절상을 당했다.

대회 직후 부터 한 달 동안 운동은 전면 금지 되었다.

부상이 완쾌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교육감배 농구대회는 물건너 가버렸다.

이번 주일은 큰 저항 없이 예배에 참석했다.

아들에게 기도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것도 엄청 급하게.

더 많이 다칠 수도 있었지만 한 달 후면 치유될 만큼만 다쳤다.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지혜가 생기길

하나님은 아들을 은혜로운 자녀로 키우기 위해 크고 작은 일들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도 별달리 감사함을 갖지 못한 아들이었다. 대회에서 입은 부상은 다시 아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같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힘이 나도 아들에게도 생길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달간 농구를 할 수 없게 된 상황에 화가 나지만 더한 부상이 아니었음을 감사하고 기꺼이 한 달을 인내할 수 있는 지혜가 아들에게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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