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y Soon Jul 10. 2023

#26. 드디어 초청 강연 날

: 이 맛이구나.

❚브런치 글을 모아

3년 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귀국을 했다. 언뜻 보면 예전 그 자리로 오는 것이기에 그리 새로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 겪어야 할 많은 마음 고생과 방황은 제2의 사춘기라 할 만큼 마음의 출렁임이 심한 시기를 보냈다. 아이들은 우리나라 학교에서, 남편은 새롭게 시작한 자신의 일에서, 그리고 나는 다시 시작한 나의 교직 생활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가꾸는 일을 위해 그 출렁임을 견뎌내고 있었다.     

유학 시절의 그 분주함이 사라진 나의 일상은 지루함을 넘어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과정을 함께 한 건 바로 브런치였다. 귀국 후 만 1년 반이 지난 무렵부터 브런치에 글을 하나씩 하나씩 써가며 갈팡질팡하는 나의 마음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돈이 나오는 글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읽고 인사 치례의 댓글을 다는 정도인 글. 조회수가 많이 나온다고 해도 별 실질적 유익이 없는 글. 그런 글을 써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글들은 내 머릿속 그리고 내 마음 속 여기 저기 어지럽게 산재해 있던 나의 경험치, 기억들, 생각들, 상념들, 지식들을 조금씩 정리해가며 과거와 현재를 정돈하는 데에 너무 좋은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매일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그 성취감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브런치에 발간하기 시작한 <한국식 영문법 말고 원어민식 그림 문법>은 30년의 영어 공부 끝에 뭔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어 문장 원리를 최대한 시각화 해서 설명해주는 브런치 매거진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 그저 나의 배움의 정리를 위한 용도로 쓰일지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저 정리를 해두고 나면 언젠가는 어떻게든 활용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시작한 글들이었다.     

 

❚무산된 강연 초청 그리고 건성으로 대답한 친구 덕분에 

사실 브런치를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친구가 그 학교에서 나의 유학 경험과 영어 공부 과정에 관한 강연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나에게 제안을 해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박사 학위 이외에 이렇다 할 나의 책도 없던 터라 결국 그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그 일이 무산된 게 참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      


그 일 이후 나는 좀 더 본격적으로 나의 배움과 경험을 구체화 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싶어 열심히 브런치를 해나갔다. 꼼꼼하게 세세하게 잘 하는 것 보다 일단 개괄적으로 큼직큼직하게 배움을 구체화 시키는 게 실질적인 결과물을 얻기에 더 유리한 전략이다. 나의 원래 일 처리 스타일 대로 <한국식 영문법 말고 원어민식 그림 문법>을 두 달 간 겨울방학 프로젝트로 혼자 진행했다. 추운 겨울 방학이지만 내 마음은 참 뜨거웠다.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나 하루치 글을 써나가면서 혼자 뿌듯해하며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짧고 인텐스하게 끝이 난 그 브런치 매거진 <한국식 영문법 말고 원어민식 그림 문법>은 그이후 한 동안 내 브런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몇 안 되는 내 브런치 구독자들과 우연히 마주친 독자들 사이에 그 매거진은 완독률이 제일 높은 글이었다. 하지만 그걸 책으로 발간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도 사실 어려운 상황이었다. 남편의 시큰둥한 반응과 나 스스로 해보지 않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국 그 원고를 일 년간 묵혀 두게 되었다. 그럴 즘 예전에 알고 지내던 동료 교사 중 책 발간에 열심인 친구 소식을 전해 들었다. 유학 가기전 연수에서 만난 이후 거의 10년 만에 연락을 해서 책 발간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한창 잘 나가는 그 친구는 많이 바쁜 목소리로 내 질문에 주섬주섬 대답을 하긴 했으나 왠지 모르게 얼른 통화를 마무리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살짝 상한 채 며칠을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더 어려운 일도 했는데 못 할 일이 뭐란 말인가? 이곳은 내 나라 내 언어로 모든 게 이뤄지는 곳이다. 강연 취소와 오랜만에 한 친구와의 출간에 관한 대화로 자존심이 살짝 상한 후 난 조용히 혼자 일을 벌여 보기로 했다. 내 책이 마음에 안 들면 구매를 안 하면 그만이고 나는 첫 출간의 경험으로 많은 걸 배울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결국 그 브런치 매거진을 ‘부크크’라는 자가 출판 경로를 통해 2개월의 마무리 작업을 하여 <한국식 영문법 말고 원어민식 그림 문법>책으로 올 3월에 출간될 수 있었다. 물론 전문가의 표지 디자인도 전문 교정인의 교정도 받지 않은 순수 나의 손을 통해 이뤄진 책이니 일반적인 책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두 달 전 잡힌 강연 일정

비록 시중의 보통 책들만큼 세련미가 있는 책은 아니다. 어학 교재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온라인 전문 서점에서도 내 책이 구매가 가능하다는 게 참 신기했다. 다행히 그 책을 출간한 직후 얼마 되지 않아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그 친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기가 근무하는 고등학교에서는 저자와의 만남 특강 시리즈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특강에 와서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전공하는 사람의 진로와 영어 공부의 필요성 등에 관해 강연을 해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앞뒤 안 재고 열심히 사는 나에게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 나라면 체면을 차리며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나는 선 자리에서 바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새로운 기회고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기회였기에 체면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해보는 저자로서의 강연 준비

일반계 고등학생들에게 영어 공부의 필요성, 그리고 외국어를 전공하는 친구들을 위한 강연에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할까 생각했다.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의 소위 현학적인 전문 용어, 과다한 원서 인용은 최대한 자제하기로 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흔하고 뻔한 이야기 말고 오롯한 내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브런치에 올려둔 내 글의 상당 부분이 다 활용 가능한 주제들이었다. 

  - 영어를 못한 나, 

  - 영어를 두려워한 나, 

  - 아무런 도움없이 혼자 헤쳐나가야 했던 나,

 -  끈질기게 계속해 나가던 나, 

 -  두려움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 레벨 업을 서슴치 않았던 나,

 - 그 일련의 과정에서 느낀 나의 감정, 그리고 결단, 결심      


그 이야기들을 기승전결의 흐름을 생각하고 조금씩 업데이트하며 일단 캔바로 말랑말랑한 테마의 템플릿을 활용해서 68쪽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제작했다. 

강연 일정이 잡힌 한 달 전에 이 일을 완료했다. 늘 하던대로 첫 단계에 모든 디테일을 챙기려는 마음은 아예 먹지를 않는다.      


대략적 아웃 라인을 잡고 난 후 각각의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를 세세하게 수정해 나갔다. 

사실 이런 세세한 부분은 남편이 나보다 더 예리하게 잘 보는 편이다. 나는 일단 큰 그림을 쭉 그려놓고 남편한테 세부 사항의 개선할 부분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과정이 괴롭긴 하지만 남편의 예리함을 늘 동원 시킨다. 남편이 나의 슬라이드에 이것저것 수정할 부분을 말해주다가 나에게 짜증을 받은 날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중요한 개선점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지난 번 책을 출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최종 파워포인트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잠시 머릿 속에서 이 일을 접어 두었다. 나의 무의식이 더 나은 생각과 접근법을 생각해 내도록 시간을 줬다. 강연이 두 주 전으로 다가오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기를 시작했다. 이리저리 순서도 바꿔보고 기승전결의 흐름도 생각해봤다. 68쪽의 슬라이드는 여섯 가지 소재로 구성했다. 



끝으로 그 여섯 가지 소재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영어 포기자였던 내가 미국 주립대 박사까지 되면서 영어를 통해 얻은 경험과 그 세월 동안 영어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와 방법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영어는 삶의 많은 굴곡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강연을 들은 학생들에게도 영어가 그런 존재로 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강연을 마치는 게 나의 계획이었다.      


파워포인트가 완성되고 난 이후 부터는 별달리 연습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러 이번 강연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강연을 앞둔 며칠 전, 영어 수업 시간에 중3 학생들에게 스포츠 관련 단원의 심화 읽기 자료로 전 미국 NBA 농구 스타인 코비 브라이언트의 책 <Mamba Mentality How I Play>를 소개한 적이 있다. 책 소개에 앞서 그의 인터뷰 영상을 아이들과 함께 보았다. 그 영상에서 코비는 “중요한 순간의 슛도 그저 보통의 슛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수천 번의 슛 연습으로 다져진 그는 결승전의 마지막 슛 역시 연습할 때 던지는 슛과 다를 바 없이 아주 쉽게 골을 넣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건 아주 중요한 슛이야’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불필요한 부담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혹여 그런 순간에 평상시 슛처럼 하지 못하는 선수는 연습 부족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미국 대학원시절 모든 수업의 프리젠테이션과 한국어 학부생 수업을 영어로까지 쭉 해온 나로서는 프리젠테이션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다. 그 시절의 영어 프리젠테이션에 비하면 이번 강연은 우리말로 하면 되는 것이니 부담이 훨씬 적다. 게다가 최근 6개월 동안 ‘엄마표 영어 티타임’을 기획하고 운영해 간 것 역시 이번 강연에 큰 밑걸음이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내가 초청해서 그들에게 강연을 6개월간 이어 간 덕분에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강연이나 발표하는 일이 별로 낯설지 않다. 이제까지 나의 경험들이 이번 첫 강연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아주 많기에 그저 머릿 속으로 강연의 장면들을 미리 그려보는 일을 해볼 뿐이었다.    

   

❚상상해본 일

미국에서 학위 공부를 다 하고 귀국을 결심하며 남편과 나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여러 가지 일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남편이 운전하고 내가 여기저기 강연을 하러 다니는 상상도 하곤 했었다. 운전을 별로 즐기지 못하지만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엔 두려움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그보다 더 즐거운 상상은 없었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비록 운전해서 40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의 가까운 도시였지만, 퇴근 후 저녁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처음 해보는 고등학교 강연이라 내가 직접 운전까지 하기에는 신경이 많이 쓰일 것 같았다. 나의 첫 고등학교 강연이 공교롭게도 남편의 모교이니 남편을 동행시키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았다. 즐거운 상상이 현실이 되고 드디어 강연을 할 학교로 이동하면서 남편은 그 예전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참석자들의 마음 사로잡기 

남편의 옛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한켠으로는 강연의 앞부분을 어떻게 시작할까 이런 저런 궁리를 했다. 막상 준비를 크게 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머릿 속에서 조금 있다가 하게 될 강연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강연 참석자들이 영어나 외국어 공부에 관심이 있으니, 이참에 강연 도입 부분에 100% 영어로 진행해보고 싶어졌다. 강연 참석자들은 도전을 받는 것을 즐길 수도 있고 느닷없는 영어 강연에 놀랄 수도 있고 겁을 먹을 수도 있겠다. 물론 본격적인 강연에 들어가면서 우리말로 하겠지만, 참석한 학생들의 감정을 살짝 흔드는 소소한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첫 도입부에서 참가자들의 주의를 확 끌어 당길 수도 있을 것 같고 영포자였던 내가이렇게 영어 강연도 할 만큼 성장한 부분을 증명해줄 수도 있는 것이기에 나의 강연 내용에 더 권위를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착순 마감된 강연

강연 두 주 전에 나를 초청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내 강연이 선착순 마감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 강연이 선착순 25명이었는데 신청자가 5명이나 넘쳐버려 결국 정원을 30명으로 늘렸다고 한다. 강연이 목요일 저녁 6시부터 2시간 이뤄짐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하고 실제로 그날 전원 참석하기까지 하다니 참 놀라웠다.   

   

강연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서 강연장을 미리 둘러 보았다. 아쉽게도 강연장은 소강당 같은 곳이 아니라 각 테이블 마다 컴퓨터가 놓여있는 정보실이었다. 아이들의 모습 전체를 볼 수 없어 조금 아쉬웠지만 아이들의 얼굴은 다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내 노트북을 연결해서 강연을 하고 싶었으나 강연장에는 데스크 탑이 있을 뿐 내 노트북과 전체 스크린을 연동시키는 일을 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내 자료가 내 노트북이 아닌 Canva 플랫폼에 저장되어 있었기에 그 데스크 탑에서 바로 Canva로 액세스를 할 수 있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우연히 두 달 전에 Canva를 시작한 게 참 다행이었다.      


❚저녁 6시 강연 시작

강연 시작 10분 전에 이미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다들 나의 첫 책<한국식 영문법 말고 원어민식 그림 문법>을 손에 들고 강연장으로 들어왔다. 신기했다. 내 책을 다 들고 있다니. 아마도 학교에서 단체로 구입한 모양이었다. 기말고사 기간 직후에 하게 된 강연이다 보니 아이들이 미처 내 책을 읽어 볼 시간을 없었는 지 다들 책이 막 도착한 책인 듯 깨끗했다. 책을 들고 온 이유는 저자로부터 싸인을 받기 위함이라고 운영하시는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 소꿉놀이 같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아직 몇 분의 시간이 더 있었기에 나는 학생들을 쭈욱 훑어 보았다. 힐끗 힐끗 나를 바라 보며 자기네들끼리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는 귀여운 여고생들도 보였고 무뚝뚝하게 앉아있는 남학생들도 보였다.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이들의 기대를 부응하지 못하면 어떻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들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오는 길에 기도도 한 상황이라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하고 기분좋게 강연 시작을 기다렸다. 남편도 내 친구(그 학교 선생님)도 뒷쪽에 앉아 내 강연을 지켜봐주기로 했다.      


강연 시작즘, 업무 담당 선생님께서 교감 선생님을 나에게 소개해주셨다. 이런 경우 교감 선생님들은 잠시 앉았다가 나가시는 게 보통이지만 교감 선생님은 교실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기왕 하는 강연이니 교감 선생님께 나를 알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드디어 강연이 시작되었다. 업무 담당 선생님께서 나의 약력을 말해주고 아이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늘 새 학년 첫 수업, 영어로 내 소개를 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내 소개가 끝나자 마자 나는 대뜸 영어로 나의 멘트를 시작했다. 초대해줘서 고맙다. 나에게 오늘은 아주 의미가 있는 시간이고 이 학교가 개인적인 연고가 많은 곳이라는 등의 말을 한 것 같다. 사실 남편이 이 부분을 녹화하지 못 했고 나는 즉석에서 멘트를 했기에 뭐라 말했는 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무튼 아이들의 표정은 참 재미있었다. 다들 ‘오늘은 영어책의 저자이니 만큼 100% 영어 강연이겠구나’하는 두려움, 놀람, 설렘을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초반 이야기를 영어로 이어나간 후 학생들에게 계속 영어로 할 것을 기대합니까? 하니 “아니요” 한다.      

역시 나의 작전대로였다. 갑자기 놀란 탓일까? 아이들은 나의 강연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나름 유창하게 들리던 영어 대신 나의 모국어인 대구 사투리로 강연의 반전이 펼쳐지자 아이들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덕분에 내 마음도 한결 편해졌고 그 공간은 더 이상 처음인 학교, 낯선 학생들이 아니라 강연 참가자들도 친근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강연은 시작 전 개요 설명이 중요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개요를 말해주는 일은 강연에서 참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목차가 있긴 하지만 오늘 강연의 방향을 쉽게 압축적으로 알려줘야 따라오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강연을 들을 수 있다. 강연 제목이 “내가 체험한 영어 세상”이라 자칫 나의 살아온 이야기로 오해할 수 있겠다 싶었기에 더더욱 강연 초반에 미리 강연의 핵심 사항을 안내했다.     

 “오늘 강연은 영포자였던 제가 미국 대학교 박사가 되기까지 과정에서의 겪은 다양한 좌절과 실패의 경험, 그리고 포기하지 않은 나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영어 공부 방법과 영어 학습의 동기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저녁 제 강연을 들으며 자신이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꼭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방대한 소재를 하나의 방향으로

어린 시절 좌절, 그 순간 영어를 부여잡고 새롭게 시작해보자 했던 나의 집념, 그리고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던 나의 열정, 두 아이를 챙기며 이방인으로 살아갔던 유학 시절의 마음가짐 등, 영어를 통해 얻게 된 모든 경험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고등학생들에게는 마냥 신기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가진 공통점은 강력했다.      


그 예전 고등학교 시절 내가 그랬듯 그들에게도 수능 영어 점수는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 처음부터 영어가 좋았고 영어를 잘 한게 아닌, 오히려 영어가 싫었고 영어를 못 했던 나였기에 나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그랬듯 그들도 먼 훗날 나처럼 영어를 즐기며 영어 덕분으로 세상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그들의 이야기다.      


강연을 이끌어가는 내내 나의 고등학교 시절 영포자였던 그 시간이 나에게 그들을 위로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 참 대단해보이는 강사, 영어 문법책을 발간한 사람,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던 그 사람이 먼 옛날 자기들보다 영어 점수가 더 형편없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위안이 되었으리라. 내 청춘의 가장 암흑기였던 그 사춘기 그 일년이 이렇게 나에게 큰 자산이 될 줄은 그 어린 여고생이었던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강연 마무리는 시작 만큼이나 중요

스스로 묻는다. “So, what?” (그래서 어쩌라고?)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 내가 정리하는 결론은 바로 다음이다.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연설문 중에서 -

- 언젠가 점들이 연결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네가 너의 마음을 따를 수 있는 자신감을 줄 것이다.      

- 열심히 매일 점을 찍어라. 

- 그 점이 뭐에 쓸지 재지 말고. 

- 주변 사람 이야기에 흔들리지 말고.

- 모든 점은 현재의 나이며 미래의 나와 연결된다.     

- 나의 어두운 시절 방황의 시절도 기분 좋은 삶의 어떤 성취도 그 어느 하나 무의미한 게 없었다.     

 

❚절로 겸허해짐

 100분 남짓 강연을 마치고 나니 겸허함이 밀려왔다. 내가 뭐길래 그 아이들이 그토록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 준다는 말인가. 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나는 그저 수많은 영어 선생님 중 한 명에 불과한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오늘 강연에서 만난 그 학생들에게만큼은 적어도 수 많은 영어 선생님 중에 한 명이 아닌 마음에 임팩을 준 사람 중에 한 명이 되었기를 바래본다.   

   

강연이 끝나고 반농담으로 한 사인회가 진짜 벌어졌다. 그 서른 명의 아이들이 내 서명을 받겠다고 줄섰다. 쑥스럽고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나의 보잘 것 없는 싸인이 그들에게 작은 추억이 될 수 있겠지 생각하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그 아이들의 이름과 응원의 메시지를 써주었다. 그렇게 하룻밤의 꿈결 같은 행사가 끝이 났다.      


❚작은 꿈 

초저녁에 시작된 강연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교감 선생님께서 따로 차 한잔을 권하셨다. 50대처럼 보이는 여교감 선생님이시다. 나의 삶의 경험을 온전히 들려주시니 참 열심히 듣게 되었다고 하셨다. 오늘 내 삶의 좌표에 새로운 방점을 하나 찍었다. 오늘의 이 일이 앞으로 어떤 일로 이어질지 설렌다. 학교 운동장은 어느새 한 저녁으로 변해있었다. 다들 집으로 갈 시간이지만 아직도 공부하느라 불이 훤하게 켜진 학교 건물. 각자의 삶의 최선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집으로 오는 차에서 남편은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어. 청산유수였어. 어쩜 매 순간 말이 그렇게 막힘 없이 나오는 지 신기하던데?” 팔불출인 남편은 그렇게 나에게 로드 메니저로서의 멘트를 날려주었다. 늘 나의 장점과 개선점을 정확히 잘 짚어주는 사람. 남편의 긍정적 피드백은 여러모로 힘이 된다.      


❚오히려 많은 걸 얻게 해준 첫 강연

처음의 강연이라 강약 조절, 선택과 집중, 적절한 참여 유도가 아쉽다. 하지만 삶의 힐링을 받은 순간이었다. 100분간 강의는 나의 몰입 100프로였다. 그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말해주고 싶었다. 너무 많은 정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초심자의 열정은 베테랑의 노련미에 비할 만큼 장점이 된다고 믿는다. 나의 강연 기법은 횟수를 거듭하며 나아질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첫 강연에서 내가 충전한 그 열정은 그 오늘이 최고치였으리라. 그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다행히 그 아이들은 오늘 그 열정을 전해 느낀 것 같다.      

앞에 앉아 미소을 기본 표정으로 머금은 여학생들, 시종일관 진지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 중후한 얼굴에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남학생. 나의 질문에 서슴치 않고 손들고 답을 해주던 씩씩한 학생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좌절하고 방황하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나의 경험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참 감사할 일이다. 영어학습의 동기와 학습법이 소재였지만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까지 울림을 갖게 된다고 하니 이보다 뿌듯할 순 없다. 


십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난생 처음으로 한 동기 부여 강연이였다. 하지만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십대 청소년들에게 나의 메시지가 어필이 된 걸 경험하고 나니 슬며시 또 한번 더 기회가 오면 기꺼이 할 용기마저 생긴다. 내가 이쪽으로 좀 재능이 있었던건가? 


      

매거진의 이전글 #25. 마음이 무거운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