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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 Soon Jun 29. 2023

#25. 마음이 무거운 날

:은사님의 부고 소식

❚인연이 깊은 선생님

34년 전이라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다. 눈이 유난히 큰 선생님, 첫 발령지의 초임 선생님이지만 미소로 이미 얼굴에 표정 주름이 보이던 선생님, 그게 내가 기억하던 그 선생님에 대한 첫 인상이다. 전학 간 그 해 담임 선생님이자 영어 선생님이셨다.   

    

중2 여름 방학을 마치고 지금 살고 있는 도시로 두 살 밑 여동생과 유학을 왔다. 큰 도시의 중학교는 학급 수도 내가 다니던 시골 중학교의 세배 정도 였다. 모두 낯선 얼굴, 낯선 공간에 나 홀로 온 전학이지만 새 학교의 담임 선생님이신 그 영어 선생님은 내가 있던 시골 학교 영어 선생님과 대학교 동기였다면서 첫날부터 나를 참 세세하게 잘 챙겨주셨다.


시골에서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던 나에게 영어 과목은 제일 힘든 과목이었다.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채신 담임 선생님은 반 친구 중 영어를 잘 하는 아이, 소문에는 아빠가 영어 선생님이라던 아이를 나의 또래 영어 도우미로 배정해 주었다. 영어에 워낙 무지한 나였기에 또래 도우미로 받은 도움이 크게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낯선 학교로 전학와서 막막해하던 나에게 나를 도와줄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던 것 같다. 나에게 세심한 배려를 해준 좋은 선생님이셨지만 중2 2학기를 마치고 중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담임 선생님이로든 교과 선생님으로든 더 이상 그 선생님과 인연이 연결되지는 못했다.  

    

세월이 흘러 10년이 훌쩍 가고 난 이후 나는 영어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참 신기한 우연이었다. 내가 학생으로 그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그 선생님의 첫 발령교 였다. 그리고 내가 영어 교사가 되어 그 은사님을 처음 만난 건 나의 첫 발령교였다. 나이 차이가 불과 13살 밖에 나지 않았기에 그 선생님은 은사님이라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대략 계산해봐도 그 당시 그 선생님은 마흔 밖에 되지 않았다. 내 나이도 어느 새 마흔을 훌쩍 넘었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마흔이었을 당시 그 선생님은 나를 동료로서 대하기에 상당히 불편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그 선생님은 나를 교생 대하듯 세세한 부분까지 또 챙겨주셨다. 그 선생님에게 나는 어쩌면 어리버리한 학생, 두서없는 초임 교사로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더 늦기 전에 감사

세월이 또 흘러 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5년의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 은사님과 직전 학교에서 같이 근무하신 분을 만났다. 그런데, 나의 은사님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3년 전 폐암 진단을 받으시고 명예퇴직을 했다고 하신다. 더 이상 같은 동료로 만날 수 없게 된 것도 서운한데, 50대 후반의 젊디 젊으신 나이에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단다.     

  

왠지 이번 스승의 날에는 그 선생님께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어졌다. 지난 5월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처를 알게 되어 암 투병중이신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자식들이 임종 면회까지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하셨지만 문자 내용은 그저 평상시 일상의 문자처럼 밝고 긍정적이셨다.   

   

예전 초임 시절의 내 모습도 또 먼 옛날 눈 큰 전학생인 내 모습도 다 기억을 해주셨다. 그리고 5월을 넘기지 못 할 것 같다는 말씀과 나와 같이 근무하는 그 선생님과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아름다운 오월의 풍경을 두고 아직 환갑도 되지 않은 연세에 이제 세상과 이별이라니. 그리고 그 이별을 그렇게도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행히 5월을 넘기고 지난 수요일이 그분의 마지막 하루이셨다. 장례식장에 걸린 영정사진은 너무 고우셨다.      


❚내 마음의 서러움

30년 전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간 그날 교실 밖에서 나를 지켜 봐주던 나의 엄마도, 교실 안에서 나를 반겨주시던 나의 은사님도 이제 모두 내 곁에 없다. 미국에서 지내던 시절 우리에게 처음으로 성경 공부를 시켜주시고 우리 아이들의 학교 생활에 세심한 배려를 해주시던 미국 교회 부설 학교 교장이던 John Geiger선생님의 죽음 역시 그랬다. 그분 역시나 50세 후반 비슷한 연세에 루게릭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제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마음에 따뜻함으로 자리잡았던 분들의 부재는 내 마음의 서러움을 더한다. 모든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매번의 부고 소식은 내 마음에 뭔가 모르는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게 한다.   

  

❚그들이 보낸 메세지

 John Geiger 선생님의 마지막 교회 예배 날에 보이신 그 눈빛은 감히 죽음에 자신을 다 넘긴 사람이라 하기에는 맑았고 온화했다. 나의 은사님과 나눈 마지막 문자에서 그분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참으로 의연하셨다. 그분도 나의 은사님도 남을 위한 삶을 사셨다. 그리고 신앙심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도 놀라울 만큼 의연하게 살아내셨다.


마흔이 될 무렵부터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나에게 삶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든다. 세상을 내 뜻대로 싸우듯이 살아온 내 삶을 이젠 그분들이 살아낸 삶처럼 순응하고 선하게 살고픈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이제야 그분들처럼 나에게도 신앙심이 싹트고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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