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화요일] 가족에 대하여
오늘은 다섯번째 화요일, 가족에 대한 이야기 부분(p.185-201)을 읽었습니다. 같이 읽어 보실래요?
1. 영어 원서로 읽은 영상 : 영어 자막/ 한글 번역 사용
2. 우리말로 읽은 영상: 한글자막 사용
책 제목: Tuesdays with Morrie/ 지은이: Mitch Albom / 옮긴이: 강주헌 / 출판사: 세종서적
The Fifth Tuesday 【We Talk About Family】 p.185-201
“The fact is, there is no foundation. no secure ground, upon which people may stand today if it isn’t the family. It’s become quite clear to me as I've been sick. If you don’t have the support and love and caring and concern that you get from a family, you don’t have much at all. Love is so supremely important. As our great poet Auden said, ‘Love each other or perish.’” p.188-189
사실, 가족이 없다면 사람들이 의지해야 할 토대도 없고 안전한 버팀대도 없는 셈이지. 병이 들면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네. 가족에게 기대할 수 있는 뒷받침과 사랑, 배려와 관심이 없다면 자네는 결코 많은 것을 가진 게 아니야. 사랑이 최고로 중요하네. 위대한 시인 오든은 ‘서로 사랑하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노래하지 않았나.
“Without love, we are birds with broken wings” p.189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날개가 부러진 새와 같네.
“This is part of what a family is about, not just love, but letting others know there’s someone who is watching out for them. It’s what I missed so much when my mother died—what I call your ‘spiritual security’— knowing that your family will be there watching out for you. Nothing else will give you that. Not money. Not fame. Not work.” p.189
그런 것이 가족이란 걸세. 사랑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게 해주는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애타게 그리워했던 것이기도 하네. 난 그걸 ‘영적인 안정’이라 칭하네. 가족이 자네를 지켜봐주고 있다는 걸 아는 거지. 가족 이외에는 어떤 것도 자네에게 영적인 안정을 주지 못하네. 돈도, 명예도, 일도.
“Whenever people ask me about having children or not having children, I never tell them what to do, I simply say, ‘There is no experience like having children. There is no substitute for it.” p.193
사람들이 자식을 가져야 되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하라고 대답하지 않네. ‘자식을 갖는 것에 비교할 경험은 없다. 그 경험을 대신할 것은 없네
“If you want the experience of having complete responsibility for another human being, and to learn how to love and bond in the deepest way, then you should have children.” p. 193
다른 인간에 대한 철저한 책임감을 경험하고 싶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가장 강열한 연대감을 느끼고 싶다면 자식을 가져야 하네.
“ Would I do it again? Mitch, I would not have missed that experience for anything. Even though there is a painful price to pay. Because I’ll be leaving them soon.” p. 193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그렇게 하겠냐고? 미치, 나는 천만금을 준다 해도 그 경험을 놓치지 않을 걸세. 설령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더라도—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네
❚ 물리적 거리와 마음 사이 방정식
영어 표현에 ‘Distance makes the heart grow fonder (떨어져 있으면 더 마음이 애틋해진다.)’ 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또 ‘Out of sight, out of mind(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표현도 있다. 어쩌면 그 두 문장은 서로 상충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결국 물리적 거리가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걸 말해 준다. 일반적인 경우, 예를 들어, 사회에서 만난 직장 동료들은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거나, 더 이상 일상에서 만나지지 않으면 절로 멀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일상적 수준의 친밀도보다 높은 레벨의 친밀도를 형성하는 관계인 사람들, 예를 들어 가족과 학창 시절 친구들과는 떨어져 있으면 더 마음이 애틋해진다.
❚ 관계의 든든함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는 나의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늘 숨을 쉬지만, 공기에 대한 생각을 크게 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우린 수영을 할 때면 바로 알게 된다. 숨을 못 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는 나는 그 수많은 관계의 망에서 특히, 가족 관계에서, 딸이자 며느리, 그리고 엄마로서의 나의 역할과 무거운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그 관계의 망이 다 사라진 공간에 나를 놓고 보니, 그 관계의 든든함이 나를 지탱해주었다는 걸 절실히 알게 되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두 아이들은 15시간의 긴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중한 버팀목들과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같은 시간대의 같은 나라에 살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랜 유학생활의 크고 작은 고비들을 굽이굽이 헤쳐 나가는 데에 그런 관계의 든든함은 참 많은 역할을 했다.
❚ 각자의 단짝
나와 같은 영어교사인 대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가 있다. 서글픈 마음이 드는 날이면 15시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도 하고 마음의 위로도 받았다. 내가 유학 2년차인 해, 우연히, 그 친구는 내가 살던 근처 주의 주립대학교에 한국어 강사로 1년을 근무한 적이 있었다. 비록 차로 7시간 정도 가야 만나는 거리지만, 그 친구가 나와 같은 시간대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엄청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거 같다.
내 여동생과 그 딸은 말없는 우리 딸에게 변함없는 주말 대화 상대자였다. 하루는 이쪽, 저쪽 카카오톡 영상대화를 틀어 놓고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말없이 그저 함께 있음을 즐기는 적도 많았다. 크게 말이 없는 그 세 명(내 여동생과 그 딸, 그리고 우리 딸)은 또 그렇게 가족의 정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라는광고 문구처럼 그렇게 15시간의 시간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함을 나누었다.
❚ 대체불가 가족
그 세월 우리 두 부부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 두 아이들이 한국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는 것을 루틴으로 정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그런 전화 안부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민들레 홀씨 같은 이민 생활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 애틋한 마음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미국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로 한 Milton 할아버지, Lain할머니가 계셨다. 틈나면 우리를 그 집에 불러서 저녁을 함께 먹기도 했다. 하지만, 모리 교수가 말했듯이 가족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요즘 말로 가족은 대체불가임에 분명하다.
❚ 마음의 위안을 주는 음식
우리 아들에게 제일 맛있는 음식은 한국에서 있을 때 늘 먹던 할머니 김치하고 할머니 고디국(뜰깨를 넣은 다슬기국)이다.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스파게티를 하면 아들은 언제나 자기 제일 좋아하는 음식도 해 달라 한다. 그래서 뭐가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이냐고 물으면 언제나 그 5년 세월동안 변함없이 할머니 고디국하고 할머니 김치라고 했다. 우리 아들은 진짜 그 음식이 먹고 싶었겠지만, 어쩌면 할머니의 따뜻함도 그리웠을 지도 모른다. 모리 교수가 말한 것 처럼, 할머니, 할아버지의 존재가 어쩌면, 우리 아이들에게 마음의 안정(spiritual security)를 심어줄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매주 토요일 저녁엔 아이들한테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를 하도록 했다.
❚ 4명이라도 뭉쳐야 산다
가족의 울타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나는 반 농담으로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시작한 날은 내가 엄마가 되기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라고 말하곤 한다. 자식에 대한 무한 책임감으로 나의 삶은 그 구도가 완전 뒤집혔다. 하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마음의 안정과 추진력을 생기게 만들었다. 첫째를 임신하면서 삶의 근원적인 외로움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두 아이를 보며 40세에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결심할 용기를 가졌다. 유학 기간 내내 우리 두 아이는 나의 작은 성취에도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었다.
박사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논문 발표를 ZOOM으로 하던 날이었다. 화면에 있는 사람에게 혼자 주저리 주저리 말하는 온라인 프리젠테이션을 해 본 사람은 그 이상한 긴장감을 안다. 게다가 내 나라 말도 아닌 영어로 미국인 교수들 앞에서 그 프리젠테이션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참 부담백배인 일이다. 나는 무슨 정신으로 그 발표를 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과 두 아이는 다른 방에서 나의 프리젠테이션을 모니터 해주고, 말이 너무 빠르면 천천히 하라고 적은 종이를 나에게 슬쩍 건네주고 나가곤 했다. 그렇게 온 가족의 도움을 받고 무사히 박사 학위 과정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그날 밤 남편과 두 아이는 나를 위해 작은 우리 집 뒷뜰에서 소박하고 근사한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딸이 종이로 접어준 학사모, 두 아이가 삐뚤 글씨로 쓴 손 카드, 그리고 한잔의 와인이 나에겐 그 어느 졸업선물보다 더 감사했다. 둘째는 작은 핀 마이크를 들고 와서 박사가 된 나의 심정을 장난스럽게 인터뷰하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우리는 뒷뜰에서 불을 피우며 이제 한 두 달이면 끝날 이 곳 미국 유학 생활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타지에서 그렇게 우리는 가족의 버팀목 덕분으로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면서 잘 헤쳐 나갔다.
❚ 모두 제자리로
하지만, 박사 과정이 끝날 무렵, 우리 네 명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국을 너무 그리워하고 있었다. 뿌리 없이 둥둥 공중 부양하듯이 살아가는 타지의 이민생활을 한 후 우리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엄청난 심리적 안정을 준다는 것을 은연중 체득했다. 우리 부부는 우리 두 아이들에게 그 보호막이 없는 공간에서 심리적 위축감과 공허함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으로 돌아 온 이후로, 시어머니는 5년간 못 먹인 고디국을 먹일거라 작정이라도 한듯이 매번 우리가 가면 둘째가 좋아하는 그 고디국을 끓여주신다. 그리고, 또 매번 우리 아들은 큰 사발로 고디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그걸로도 아쉬운지, 어머니는 남은 고디국을 싸서 집에 가서 또 먹여라며 내 손에 쥐어 주시기까지 한다.
우리 딸과 여동생 딸은 시간되는 주말이면 함께 공원에서 여전히 ‘말하지 않아도 알아’ 모드로 시간을 함께 보내곤 한다. 참 신기하다. 말없이 그저 각자 폰을 하고 있어도 혼자 각자 집에서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지 웬만한 주말이면 늘 함께 한다.
❚ 딱 하나의 빈자리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를 잡은 느낌이 든다. 나는 다시 가족이 모두 있는 한국으로, 예전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얼기설기 관계의 거미줄을 짓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원래 있던 자리로 오질 않는다. 이 책에서 모리 교수는 다시 태어나도 자식을 낳아서 키우고 싶지만, 헤어질 때 고통은 참 견디기 힘들 거라고 했다. 엄마는 그 당시 삶의 희망을 급격히 잃어버리시면서도 자식인 우리들에 대한 그리움마저 놓진 않으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그 마지막 저녁에 우리를 배웅하면서 우리를 아주 애틋이 바라보셨다. 나는 그게 마지막 저녁인지 알지 못했고, 엄마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