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마음의 상채기는 남아 있다. 나의 기억 속에 모든 것을 지우고 싶을 만큼 끔찍한 인연이 있었다. 문득 문득 내 의식에 쳐들어오는 그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나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내 머릿속에 흩어진 아무렇게 버려진 그 쓰레기 조각 같은 잔상들을 쓸어 담아 밀봉해 버리고 싶다. 두 번 다시 내 마음의 공간이 오염되지 않게 말이다. 인연을 끊은 지 이제 8년 정도가 지났다. 여전히 다시 되내이며 글을 쓰는 것 조차 괴로운 인연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글로 쓰는 이유는 다시 괴로운 나의 기억을 헤집어 내 마음의 쓰레기 같은 그와 관련된 일들을 글로 정리해서 내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기 위함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글을 쓰며 그 인연과 관련된 내 머릿 속에 흩어진 이런 저런 잔상들을 깨끗하게 끌어모아 한 공간에 채우고 밀봉해버리고 싶다. 완전히 내 의식의 공간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말이다.
❚인연 또는 악연
내 삶의 굵직한 결단의 순간에는 사촌의 존재가 늘 있었다. 그 어릴 적 내가 시골에서 인근 대도시로 전학을 결단한 순간에도 그랬다. 우리 집도 참 가난했지만 큰아버지의 집은 더 가난했다. 아빠는 농협에 다니며 나름 화이트 칼라로 월급이라는 걸 집에 가져다 주셨다. 하지만 일찍이 사고로 뇌 손상을 심하게 받은 큰아버지는 40대에 제대로 집안의 가장으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큰엄마가 농사를 지으며 4형제를 억척같이 먹여 살렸던 것 같다. 살 길이 너무 막막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큰엄마에게 지푸라기는 우리 집이었다.
큰집은 정말이지 산을 하나 넘어야 갈 수 있는 두메 산골이었다. 초등학교를 가려면 어린 나이지만 매일 같이 산을 하나 넘어와야 그 교육이라는 서비스도 받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외진 곳에 있었다. 우리집은 다행히 초등학교에서 걸어서 20분 남짓 거리에 있었다. 사촌은 4명이었다.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막내 사촌은 나보다 세 살 위였다. 그래서 대부분 그 사촌들은 평일 저녁은 주로 우리 집에서 잔 것 같다. 이미 우리 집도 아이가 다섯이지만 너무 상황이 딱해서 사촌들이 우리 집에 와서 숙식을 하는 상황을 우리 엄마는 피할 수 없었다. 우리 엄마는 졸지에 아이 아홉을 둔 엄마 마냥 정신없는 일상을 강요 받았다.
사촌 집에는 많은 풍파가 몰아쳤다. 사촌 언니가 4살이 되던 무렵 밭두렁 태우기를 하다가 불이 인근 야산으로 불이 번졌다고 한다. 당시 엄마를 마중하러 온 꼬마였던 사촌 언니는 그 불에 휩싸였다고 한다. 아주 시골이라 소방차가 출동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눈 앞에서 어린 딸이 불에 휩싸이는 걸 보고 몸을 던지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으랴? 큰 엄마는 그렇게 불 속을 뛰어 들어 딸을 구했지만 결국 두 모녀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시골에 병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상황이라 그 이후 많은 고생은 역시나 우리 엄마도 함께 감당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 몇 해 있다가는 술을 좋아하던 큰 아빠가 결국 또 하나의 사고를 쳤다. 장터에서 몇몇 사람들과 낯술을 하다가 실랑이가 벌어져 말다툼으로 번졌고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다고 한다. 작은 체구에 성질은 불같던 큰 아빠는 자기 화를 못 참고 싸움을 하다 그만 뒤로 넘어져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몇 주간 의식이 되돌아 오지 않아 식물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몇 주 후 의식이 돌아왔으나 뇌의 손상이 되었는 지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못 하고 그저 유치원생과 같은 인지 기능만 할 뿐 집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조금도 할 수 없게 되버렸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아빠는 유일한 남동생으로 그 집의 여러 대소사를 다 챙기는 일을 감당했다.
이래 저래 사촌집에 불어 닥친 불행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 집도 조금씩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큰 엄마의 대대적인 결단이 온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고 한다. 사촌 오빠들이 중학교를 들어갈 무렵이었다. 큰엄마는 당시 많은 시골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들을 대도시로 유학 보내려는 결단을 혼자 덜컥 한 모양이었다. 당시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로서는 그 당시 어른들의 세계를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살아 생전 늘 그 집 때문에 희생을 강요당한 게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듯 몇 번이고 그 당시 일들을 우리에게 말하곤 하셨다.
도시에 집 하나 장만하는 것이 지금도 엄청난 돈이 드는 건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그 당시도 그랬던 모양이다. 큰집은 우리집 논을 팔아서 그 돈까지 보탤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이유인 즉은 나중에 우리도 애들 학교시키려면 도시로 보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집 하나 공동으로 사서 그곳에 애들 다 전학시키면 서로 좋지 않냐는 말이었다. 당시 엄마는 이래 저래 희생을 강요하는 큰집의 존재가 너무 싫어 최대한 얽히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두 며느리 중에 우리 엄마를 예뻐한 할머니도 엄마보고 그 집이라 얽혀서 좋을 건 없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런 엄마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 아빠는 그 집에 우리 논을 내어주고 마셨고 그 집은 소위 영끌을 해서 인근 대도시에 집을 구매해 버렸다.
사촌들은 이제 더 이상 학교를 다니기 위해 우리 집에 오지 않아도 되었다. 할머니가 그들을 모두 데리고 도시에서 살았다고 한다. 몇 해 있다가 큰엄마, 큰아빠도 같이 모두 도시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다시 시골에 와서 할아버지와 있었다고 한 것 같다. 현재까지 일들은 모두 나와는 사실 큰 상관이 없다. 비록 우리 엄마는 그 힘든 세월 동안 억척같고 셈이 빠른 손위 동서 때문에 희생을 강요받았지만 말이다.
❚하고잽이 딸
그런 세세한 상황을 나는 알 리가 없었다. 가난한 집의 둘째로 태어난 나는 나라도 공부 열심히 해서 어엿한 직장을 하나 가져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딸 넷에 아들 하나인 우리 집에서 나는 큰 아들같은 그런 책임감 같은 걸 가졌다. 중학교 들어가서부터 든 생각이었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왠지 나라도 잘 커야 집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았다.
결국 중학교 2학년이 될 무렵, 엄마에게 나도 도시에 있는 그 사촌 집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어쨌든 그 집이랑 얽히는 걸 싫어한 엄마지만 자식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던지 아니면 엄마 스스로도 하고잽이 딸이 뭐라도 해낼 거라 믿었던지 엄마는 나의 말을 들어줬다. 중2 여름 방학을 마치고 나와 두 살 밑인 내 여동생은 사촌이 살고 있는 그 집에 가서 함께 일년을 생활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촌이지만 서로 신세를 주거니 받으며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냈었다.
1년 후 엄마는 더 이상 그 집과 인연을 맺는 게 싫었던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따로 분가를 했다. 그때는 엄마가 4살 밑의 남동생과 6살 밑 여동생도 시골에서 데리고 왔다. 비록 허름한 집이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공간에서 우리 식구끼리 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아빠는 시골에 직장이 있었고 언니는 이미 고등학생이 되어 버려 전학이 불가능했기에 언니는 여전히 그곳에 지냈다.
지금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 어린 나의 고집이 결국 우리 집에 도움이 된 것인지 불행의 씨앗이었었는지.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게 나와 우리 집을 위하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힘든 도전이지만 감히 해보려 엄두를 내었다. 그 당시 나의 결정은 사촌의 집이 그곳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뒤에 엄마가 아예 두 동생을 다 데리고 객지 생활을 하기로 마음 먹었던 걸 봐서는 나와 내 여동생이 먼저 도시로 나오지 않았어도 우리 엄마는 그렇게 했었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집의 대대적인 이동의 한 중간에는 사촌집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이 한참 더 흐르고 난 뒤 그 당시 고가에 구매한 사촌의 집은 결국 입지가 좋지 않아 재건축에서도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 논밭을 팔아 산 집은 폐가가 된 채 그 재산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좋은 기회
학창 시절 잠시 얽힌 사촌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세월이 흘렀고 나는 나대로 직장을 잡고 두 아이 엄마가 되었다. 언니도 동생도 모두 결혼하고 언니 빼고 딸들은 교사가 되었고 남동생도 공무원이 되었다. 나의 결단 덕분에 모두들 직장을 잡고 어엿하게 독립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언니 빼고 도시로 온 우리들은 그렇게 각자 안정된 직업을 구하게 되었다.세월이 많이 흘러 그 당시 인연이 깊었던지 사촌 언니도 우리 집이 사는 아파트 근처로 이사를 왔다. 학창시절 같이 밥을 해먹고 다니던 아련한 추억도 추억인지라 우리는 사촌이 아닌 친언니, 동생처럼 지냈다.
❚미국에 살던 사촌 그리고 나의 또 한 번의 결단
나에게 사촌은 4명이었다. 그중 둘째는 나보다 10살 위다. 그는 30대 초반 전기 회사에 근무하다 미국 주재원으로 몇 년 파견 근무를 하다 퇴사 후 미국 현지에서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작은 회사를 차렸다. 한참 현대자동차가 미국 남부 넓은 땅에 현지 공장을 세우는 시기었다. 그 시기에 세운 회사라 회사는 상당히 수익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는 한 번씩 한국으로 사업차 방문해서 사촌인 우리까지 불러다가 저녁을 사주며 나름 플렉스를 즐기는 중이었다.
당시 나는 두 아이의 육아로 정신없이 보내던 시절이었지만, 이따금 그 사촌의 방문은 나에게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인생의 어떤 전환점을 만들고 싶었던 나와 남편은 그 사촌처럼 미국이라는 새로운 곳에 가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고도 싶었다. 당장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활을 시작하는 것 보다 이미 그곳에서 소위 성공을 한 사람, 그것도 나와 가까운 사촌지간의 오빠가 있는 그곳에 가서 시작을 하는 것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영어 교사이라 영어 교육에 관한 석사 학위를 그것도 미국 대학교에서 취득하는 것도 미래를 위한 좋은 투자라 생각했다. 아울러 기계공학을 공부한 남편도 왠지 미국에 가서는 그런 본인의 전공을 살린 새로운 직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우리 두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시키는 것만큼 훌륭한 교육도 없다고 확신 했다. 당시 남편의 생각은 나와 다를 수 있겠지만, 나의 계획은 그랬다.
사촌이 한국을 방문한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후 나의 계획을 의논해봤다. 그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자기 사업에 사람이 필요한데 모르는 남을 쓰는 것 보다 우리가 가서 그 일을 도와주는 게 훨씬 좋다고 한다. 마침 그 사촌은 미국 현지에서 주말 부부를 하고 있었다. 두 아이와 부인은 교육 환경이 더 좋은 인근 대도시에 거주했고 그는 현대 공장이 있는 곳에 예전에 살던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 집은 2층 주택으로 방4개 화장실 2개인 나름 큰 집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그는 우리가 그 집에 가서 함께 살면 주거비도 덜고 내가 집안 일이며 식사 준비를 해주면 여러모로 윈윈이라 했다. 미국 유학의 비용이 한두푼 드는 게 아니였기 때문에 나는 나의 노동으로 생활비를 버는 셈 치고 기꺼이 내 식구가 아닌 그 사촌을 위한 식사 준비도 해줄 의향이 있었다. 완전 공짜로 그 집에 얹혀 살수는 없다 생각했기에 집안 청소며 식사 준비와 같은 나의 노동으로 그 집세를 대신할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사촌도 그 정도의 계산은 한 듯 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외식 한번 하는 데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든다. 남자 혼자 삼시 세끼를 해결하기 위해 외식을 하는 것도 번거롭고 비용이 드는 일이니 내가 가서 식사를 해결해주면 그에게도 나쁜 생각은 아니라 계산한 것 같다.
한편, 본인이 시작하려던 어떤 모종의 사업은 기존에 하던 자동차 관련 일이 아닌 듯 한국에 출장 올 때 마다 사람들을 모아서 무언가를 홍보하는 일을 했다. 그 새로운 사업에 남편이 좀 도와줬으면 하는 눈치긴 했다. 애초에 나의 생각은 기계공학을 공부한 남편이 그 자동차 부품회사에 근무하며 생활비를 벌고 나는 학위를 딸 생각이었지만, 사촌의 생각은 우리의 상상 밖에 있었다. 물론 그 당시 그는 우리에게 그의 새로운 사업에 대한 세세한 것들을 공개하지 않았다. 남편이 가면 그가 하는 이런 일 저런 일을 도와 줄 수 있으니 일단 미국으로 오면 된다는 설명을 했다.
❚엄마에게 작별 인사
궁금하다고 다 물어 볼 수 없고 묻는 다고 다 설명해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 사촌이 우리에게 그랬다. 미지의 곳에 아이 둘을 다 데리고 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곳에서 남편이 하게 될 일을 알았으면 싶었지만 그는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촌지간에 우리에게 나쁜 일을 시킬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사촌과 만나 대략적인 미국 생활을 의논하고 나의 결심을 굳힌 후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미국 대학교 석사 과정 입학 허가서를 받아들었다. 그 이후 상황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의논을 하고 거의 일년 반 만에 미국으로 건너가는 일련의 준비가 완료가 되었다. 우리는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타기로 했다.
마음의 준비와 실질적인 준비가 거의 다 완료될 즘 그저 가족에게 떠나는 슬픔을 안겨준게 미안함만 가진 채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에게 다 말을 했지만 딱 한 사람에게는 나의 결심을 말하지 못 했다. 바로 엄마에게는 차마 살아 생전 나의 은밀한 계획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비록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엄마 산소에 들러 딸이 잠시 세상 구경을 하고 오겠다고 고하고 싶었다. 어느 멋진 가을 날, 나와 남편 그리고 그 사촌은 엄마 산소에 함께 들러 절을 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유년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우리 집에 신세를 많이 졌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사촌은 우리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우리에게 이따금 ‘사촌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하셨다. 내 평생 그 집 사람들과 얽히면서 내가 속을 끓인 게 너무 억울하다고 하시며 너희는 그들과 금전적 어떤 관계에 놓이지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라 한 적은 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깊은 뜻을 어린 나의 식견으로는 알지 못 했다.
사촌 4명 중에 가장 영악하고 약삭빠른 아이였던 둘째와 우리 부부가 함께 계획을 하고 우리가 멀리 미국에 가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하면 우리 엄마는 결사 반대했을 게 뻔하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저 물끄러미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 보며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을 것 같다. 이제 되돌아 보면 엄마의 그 말, ‘사촌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을 듣지 않는 고집쟁이 나 자신이 너무 후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