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리적 공간 그리고 마음의 공간
❚엄마의 죽음
결국 엄마의 마지막은 오고 말았다. 나의 은밀한 계획을 차마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엄마는 나의 계획을 꿈에도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먼저 엄마만의 은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생각지도 못 한 그 계획을 엄마는 결국 실행으로 옮기고 말았다. 그리고 영영 다시 우리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셨다.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학교 당직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 얼굴을 볼 겸 잠시 엄마에게 들렀다. 여느 때처럼 우두커니 거실에 혼자 앉아 계셨다. 아빠는 이미 친구들과 술 약속을 핑계로 엄마를 그렇게 혼자 내버려 두다시피하고 나가 버리셨다. 더운 여름이었지만 엄마 집의 거실 만큼은 음침함과 우울감으로 썰렁했다.
네 명의 딸들 중에는 엄마와 그나마 이야기를 나누던 나였기에 나는 엄마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걸어 봤다. 물론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어떤 질문을 해도 엄마는 그저 먼 산을 볼 뿐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 교육을 참 잘 시키셨고 성실하게 삶을 살아내신 엄마였는데 왜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바보처럼 저렇게 우두커니 텅 빈 거실에 앉아만 있는 사람으로 변했는지.
너무 답답한 마음에 엄마에게 “엄마,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엄마에게 성질을 내며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만 그 앞에서 울고 말았다. 이제 어떠한 감정도 남아 있지 않는 엄마 같았다. 딸이 그렇게 울고 있어도 엄마는 미동도 없이 그저 계속 앉아만 있었다. 이미 해는 뉘엿 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를 두고 떠날 수 없었기에, 언니와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집에서 저녁 밥을 먹자고 했다.
다행히 우리 자매들은 모두 엄마 집 근처에 살았다. 그래서 금방 아이들을 다 이끌고 시끌 벅적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 엄마 혼자 있는 집으로 몰려 왔다. 엄마가 즐겨 드시던 찜닭을 시켜 먹었다. 평상시에 거의 드시는 게 없던 엄마가 어쩐지 그날은 집닭을 제법 많이 드셨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드디어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옆 방에서 무언가를 챙겨오셨다. 막내 여동생이 결혼을 하기 전에 그 집에서 몇 년간 부모님과 살았기에 여동생의 짐이 아직 이것 저것 그 집에 있다. 그 중에 엄마는 그 여동생의 학창시절 성적표와 사진 몇 개를 건네 주었다. 갑자기 왜 그것들을 챙겨주는 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 한 채 그저 집이 좁아서 이런 저런 짐을 정리하려는 가 보다 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에 너무 늦은 시간까지 그곳에 앉아 있지 못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아빠가 돌아올 즘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게 우리가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 6시경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여동생은 울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우리 엄마는 많이 아픈 건 맞았다. 우두커니 삶의 희망을 놓은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것도 맞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마저도 하지 않고 아에 우리를 떠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날 새벽 엄마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리셨다.
❚정리해야 할 물리적 공간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 후 두 달 정도는 그 슬픔을 감당하기 벅찼다. 잠시 시간이 날 때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 슬픔을 눈물로 덜어 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흐를 즘 계획한 나의 출국도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 했다. 엄마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난 후라 엄마에게 나의 계획을 말할 필요도 이젠 더 이상 없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그 아파트를 매매하고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해 오셨다. 이젠 우리 집도 정리할 때가 성큼 다가왔다.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거의 8년간 전세로 살고 있었다. 9월 경 주인에게 우리 상황을 설명하고 남은 두 달은 월세로 전환했다. 오랜 세월 인연을 맺은 주인이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상황을 이용해서 시세보다 높은 월세를 요구했고 장기수선 충당금(보통은 세입자가 가져 가는 돈) 마져도 내어 줄 수 없다고 요구하는 등 어이없는 일들이 많았다.
더 이상 그 집에 남은 정도 없이 그렇게 우리는 살던 집에서 이사를 나왔다. 8년의 세월 동안 늘어난 짐은 정말 엄청났다. 앞 베란다 양쪽에 있던 저장 공간은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사 나오기 직전 밤 자정까지 나와 남편은 그 많은 물건들을 쓰레기 분리 수거장으로 옮겨 내리느라 애를 먹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우리는 땀을 흘리며 그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고 버렸다.
❚정리해야 할 마음의 공간
살던 아파트에서 완전히 이사를 나온 후 12월 한 달은 친정 아빠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을 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혼자 되신 아빠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며 저녁도 자주 같이 먹고 아이들의 모습도 더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 나와 남편은 미국으로 완전 이민을 가는 것 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친정 아빠와의 그 한 달 간의 시간은 내 마음 속에 매일 이별을 하는 시간들이 었다. 물론 이제 다시 귀국을 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당시를 회상하면 참 웃기는 일이지만, 미래는 늘 알 수 없기에 나는 세상 미안함과 슬픔을 마음 속으로 삭히고 있었다.
늘 근처에 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하던 언니네도, 여동생네도 이젠 며칠이 지나면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는 곳으로 우리는 떠난다. 떠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나였다. 언니와 여동생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제 더 이상 나와 우리 아이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서운하고 허전할까? 나는 그 당시 차마 그 서운해할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아쉬움도 마음 속 깊이 숨긴 채 드러내지는 못했다. 이모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또 이렇게 나 역시 떠나는 모습을 보여드려 참 죄송하다고 말씀을 전했다.
떠나는 사람은 새로운 곳에 대한 희망을 품으니 그나마 덜 힘들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겨지는 사람들은 그저 서운함과 아쉬움 뿐 이니 그 시간들이 더욱 힘이 들었겠다’ 싶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 들 내가 가려던 횡보를 이젠 멈출 수도 없다. 모든 것들은 이제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떠나기로 한 그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