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꿈을 헤집고 달려가 그만 뚜욱-

: 여기가 어디지?

by Hey Soon

1월이지만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

❚따분한 천국

우리가 도착한 그 대도시에 사촌 한 명이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사업을 하며 꽤나 돈을 잘 벌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결심할 즘 그 사촌은 내가 가족과 같이 미국 유학을 올 거면 남편이 자기가 하는 사업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제안은 당시 나의 유학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미국 유학, 그것도 두 아이와 남편과 같이 가는 상황이라면 모아둔 돈으로 감당하기에는 불가능 한 일이다. 사촌의 제안을 받고 나는 미국 현지에서 남편이 생활비를 벌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유학을 결단했다.


그 사촌은 우리를 마중하러 왔고 우리는 그 집에서 이틀 밤을 지냈다. 한국의 아파트에는 입구에 비밀 코드를 넣는 게 흔하지만, 미국의 주택 단지에는 그런 게 보통은 없다. 그런데, 아주 고급 빌라 단지의 경우에는 경비원이 입구에 늘 상주해 출입하는 사람의 신원을 파악한다. 우리가 이틀을 머문 집은 넓은 골프장이 딸린 고급 주택가였다. 무료할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주택 단지였다. 겨울 방학 기간이라 중3, 고3인 그 집 아이들도 집에 있는 있었다. 비록 두 아이가 집에 있으나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밖에 나가 놀 친구도 없는 그야 말로 하루 종일 있어도 사람 구경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그 커다란 집에 아이들 과외 선생이 초인종을 누를 뿐 다른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정신없는 직장맘이었고 복작거리는 도시의 아파트촌에서 살던 나는 아주 별스러운 과거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그 사촌의 부인은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딱히 생계를 위해 다녀야 할 직장도, 만날 친구도, 친인척도 없으니 혼자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딱히 매일 할 것이 없어보였다. 그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돌볼 뿐 별 다른 일이 없었다. 그때까지 만해도 미국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마주한 한국 이민자들은 그 사촌 부인처럼 비록 경제적 여유를 누리더라도 심심하고 따분한 일상을 살아가는 건 사실이다.


❚신용불량자의 삶 Day #1

이튿날 우리는 바로 자동차 구입을 하러 나갔다. 당장 다음 주부터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대학교의 학기가 개강이었다. 남편도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생활하면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차를 둘러볼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이라면 자동차를 쫓기듯 사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타국에서 일은 기존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참으로 많았다. 자동차 구입은 그런 어이없는 상황 중 하나로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생활할 곳은 그 대도시에서 4시간 더 남쪽으로 가야 하는 곳이었다. 시간될 때 쉽게 자동차를 또 보러 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그날 자동차 구입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도시는 미국에서 몇 번째로 큰 도시라 중고차 업체가 아주 많았다. 그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큰 카맥스 (Car Max)라는 곳에 들렀다. 중고차가 엄청나게 많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허락된 차는 하나도 없었다. 국제 면허증만 소지하던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는 중고차 매입도, 테스트 드라이브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직원이 말해주었다. 우린 그런 세부 사항까지 알고 가진 못했다. 이방인이 되어 본 게 처음인 데다가, 자동차도 보통 다른 물건 쇼핑하듯이 당연히 살 수 있는 물건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린 황당스럽기 짝이 없었다. 처음으로 난 내가 신용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교사라는 직업 자체만으로도 은행이나 관공서 같은 곳에서 암묵적인 신뢰나 신용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나는 그저 수많은 외국인들 중에 한 명이다. 그것도 키 작은 아시아 이민 여성이다. 도착 이튿날 만에 나는 바로 현실 직시 모드로 들어가야 했다.


❚먹고 먹히는 정글의 힘없는 먹잇감

팔지 않는 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차는 사야 했다. 결국, 정식 루트로 차는 살 수 없어서 우리는 대안을 찾았다. 결국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중고차 매매업소에 가서 차를 살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 먹잇감이 되어가는 사실을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사촌이 소개해 준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고차 가게에 갔다. 내가 아이들과 같이 탈 밴으로 4년 정도 된 패밀리 밴을 2만 2천불 (한화로 2천 7백 만원 가량)로 샀다. 그 일 주일 후, 같은 중고상에 또 다시 가서 남편이 타게 될 3년 된 중고 작은 승용차를 1만 2천불 (한화로 1천 5백 만원 가량)주고 구매했다. 엄청난 거금을 그 친척에게 송금하기로 하고 그 친척의 카드로 결재를 했다. 결국 우리는 엄청난 거금을 현금으로 주고 중고차 두 대를 질렀다.


❚어벙벙한 놈은 먼저 본 놈이 임자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사촌은 우리 덕에 혜택을 누린 셈이다. 사업하는 그 친척에게 우리가 거금 4천 만원가량을 현금으로 줬다. 게다가 그는 그 큰 금액을 신용카드로 사서 신용 점수를 엄청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이 신용 점수는 돈으로도 못 사는 것이다. 신용 점수는 거금의 물건을 할부로 사서 매달 잘 갚으면 점수가 올라가게 되어 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사회다. 소비를 부추기고 빚을 지게 만드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용 점수를 쌓으려면 세월을 두고 꾸준히 빚을 갚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처럼 현금으로 사고 나면 나의 신용 점수엔 아무런 혜택이 없다. 현금으로 사게 되면 신용카드 할부로 살 때 쌓을 수 있는 금융 신용점수를 일도 못 얻게 된다.


이런 저런 세세한 정보가 결핍된 채 우리는 그저 아는 사람이라곤 유일했던 그 사촌의 말에만 의존했다. 그는 우리에게 당분간 차를 렌트하고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차를 살 수 있다는 말은 해 주지 않았다. 나중에 신용점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주위 사람들로부터 듣고 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그 일 이후,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사회의 이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촌에 대한 신뢰는 그 일 이후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본인의 이익을 먼저 따지고 드는 악덕 사업주 자세가 그 사람 몸에 베여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차츰 그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동차 부품을 대기업에 납품하는 사업을 시작하며 돈을 꽤나 벌었다고 들었다. 그 이후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위 말하는 영주권 장사(?)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10여년간 미국 생활을 그는 돈이 된다는 일이라면 악착같이 덤벼들었던 모양이다. 그 동네에 머물면서 곧 그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도 자주 듣게 되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사촌과의 악연으로 마음이 서글퍼지는 날들이 많았다. 먹고 먹히는 정글과 같은 그런 곳에서 우리는 힘없는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묵혀둔 질주 본능

썩 마음에 드는 차는 아니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이라 우리는 차에 대한 후회를 떨치기로 했다. 새로산 차로 끝없이 펼쳐진, 넓고 쭉 뻗은 도로를 4시간 달렸다. 한국에서 고속도로에서는 쌩쌩 달리는 차에 겁을 잔뜩 먹으며 운전을 하곤 했다. 그런데, 미국의 고속도로는 영 딴 세상이었다. 가끔 사고가 있을 때 빼고는 도로가 막히는 일은 없다. 길 양 쪽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그 직선 코스의 고속도로는 운전 소심자인 나마저도 질주 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코끝 찡한 청량한 밤공기 그리고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들

우리는 늦은 밤, 작은 시골 도시에 도착했다. 그 주의 행정수도이며 주정부가 있는 도시지만, 남부의 시골도시라 도로가 조용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이라 집집마다 출입문 근처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은 시끌시끌 성대한 파티를 연상케 만들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텔레비전에만 있는데, 여기는 온 동네 길거리에 가득했다. 미국 사람들은 부활절, 독립기념일, 할로윈, 풋볼 시즌,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들을 집 앞 현관문 장식으로 즐기는 문화가 있었다. 첫 날 우리의 마음은 그냥 현실이 아닌 꿈 속 같은 느낌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생소했고, 풍경은 신선했다. 그리고 어릴 적 시골에서 마셨던 그 청량한 공기가 내 코끝을 찡끗거리게 만들었다.


우리가 당분간 머물기로 한 곳은 그 사촌이 예전에 가족과 지내던 2층 주택이었다. 교육을 위해 인근 대도시로 가족 모두 이사 가고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 그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사촌은 주말 부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이삿짐이 도착하기 전까지 당분간 우리는 그 집 2층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대학교 근처로 이사를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착 며칠 후, 우리의 그 계획은 먹잇감인 우리의 계획이었을 뿐, 그 정글에서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여러 정황으로 우리는 유학 시절 중 일 년 반을 그 집에서 지냈다. 그게 마음 고생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월이지만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

우리 아이들은 첫날밤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정원에 있던 잎이 넓은 야자수 나무가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는 우리를 이국적 정취에 빠지도록 하는 데 충분했다. 1월이지만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봄은 이미 와 있는 것 같았다. 들뜬 마음으로 우리 집 막내와 나는 벌떡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봤다. 집 앞에 세워진 우편물 배달통은 뭔가 아기자기한 시골 정취를 한껏 더해 주었다. 그 우편함이 너무 신기했다.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우편함이 있다니! 한국에서 우편함은 동네 어디에도 이젠 볼 수 없는 희귀한 아이템인데, 미국의 집은 집집마다 하나 씩 있다. 출입문이 안 달린 작은 USPS (United States Postal Service) 트럭이 동네를 매일 돌았다.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 우편함에 우편물—대부분은 선전물이지만, 가끔은 청구서도 들어있음---을 잔뜩 넣어두고 가곤 했다. 그리고 어떤 우편함은 빨간 깃대가 세워져 있는 데 이건 보낼 우편함이 들어 있다는 신호라고 했다. 참 귀엽고 심플한 소꿉놀이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꿈길을 헤집고 달려와서 뚜욱-----

오는 길에 H-마트라는 한인 마트에서 급한 찬거리를 사왔다. 그걸로 아침을 대충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한국식의 아침밥을 차려 먹었다. 배가 부르자 슬슬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들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정신없이 꿈 속을 헤매다 이제 겨우 잠에서 깬 것 같았다. 꿈길을 헤집고 달려와 이제 겨우 조용한 공간에 도착해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알고 지내던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완전히 낯선 공간에 우리 네 명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집 밖을 봐도 지나가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동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아이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공간이동이 머리에 인식이 덜 된 탓에 우리는 조금만 걸어가면 예전 한국에서 그랬듯이 내 여동생 집이 나올 거 같았다. 동생에게 전화하면 금새 바로 만날 수 있을 거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3~4일 만에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 와 앉아 있었다. 우리 뇌의 인지 기능도 그 짧은 기간에 그 엄청난 차이와 거리를 처리하지 못한 채 버퍼링 중이었다.


이제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우리 뿐 이라는 현실이 조금씩 인지 되면서 슬픔도 조금씩 밀려왔다. 내 여동생네랑은 거의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동갑내기 그 집 딸과 우리 아들은 태어나서 여태껏 거의 매일 만났다. 여동생도 초등학교 교사라 나와 출퇴근 시간이 똑같았다. 친정 엄마가 동생 딸과 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퇴근 해 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돌봐주셨다. 매일 같이 함께하던 동생도 엄마도 조카딸도 없이 갑지기 이렇게 우리 네 명만 딸랑 그 낯선 집에 앉아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게 뭐지?’하고 느꼈을 게 분명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넷은 영 어색했고 무료함을 느꼈다. 한껏 들떠서 멀리멀리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텅 빈 집에 덩그러니 우리 넷 만 남겨진 거 였다. 늘 이종사촌들이 우리 집에 와서 북적거리며 같이 놀고 같이 밥 먹고 하던 시절에 길들여진 우리 두 아이들은 그 많은 시간을 단둘이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채 심심하고 따분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생일 파티 장에서 풍선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갑자기 사막에 추락한 그 느낌이랄까? 그 이후 우리 9살 아들은 책 읽기로 시간을 주로 보냈고, 자기 핸드폰을 아직 갖지 못한 12살 딸은 내 핸드폰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꾸미기, 다이어리 꾸미기, 액체 괴물, 뭐 이런 혼자 놀이에 시간을 보냈다. 지켜보는 나의 마음이 참 먹먹해져왔다.


❚유학 기간 내내 혼자 되내인 그 질문: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내가 뭘 하려고 이곳에 온 거 였더라? 속으로 몇 번이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아직 답을 찾기에 내 마음은 시,공간 분간초자 힘든 멍한 상태였다. 그렇게 남편, 두 아이, 그리고 나는 그 먼 타국, 텅 빈 집에서 연말 연초를 쓸쓸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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