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뭐든지 좋아 보이는 렌즈

: 렌즈 너머 보이는 허상과 내가 겪은 실체

by Hey Soon

❚신용불량자 Day #2

만날 사람 하나 없는 연말, 오붓하다 못해 쓸쓸함이 밀려오는 첫 주말을 보냈다.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다. 첫 월요일에는 한국은행에 계좌 개설을 하러 갔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의 은행은 사람도 많고 직원도 많고 뭔가 모르게 빠르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은행에는 그런 분위기를 찾아 볼 수 없다. 직원도 몇 안 될뿐더러 찾아오는 손님도 거의 없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마치 아늑한 커피숍 같은 분위기마저 들었다. 다만 들어가는 입구에 경비원이 서서 손님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문까지 열어 준다.


미국 여행은 한 적은 있지만 생활한 적은 없었다. 당연히 미국에서 나의 신용 점수는 0이다. 신용 점수도 일정한 수입도 없는 나와 같은 유학생은 그야말로 신용불량자와 같은 급으로 취부된다. 당연히 신용카드 발급은 불가능하다. 신용카드를 사용해서 포인트를 누적해서 공짜로 한국 여행을 다닌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하지만 학생 비자로 와 있는 나에겐 그런 일은 그림의 떡이다. 신용이 없으니 대신 6000달러 정도의 예치금을 맡기고서야, 겨우 자유 출입식의 계좌를 열 수 있고 그 계좌에 연결된 데빗 카드(우리나라의 직불 카드) 정도를 발급 받을 수 있었다.


첫 계좌 오픈에 대한 보답으로 은행에서 체크북 (수표 모음)을 선물로 줬다. 작은 수첩처럼 생긴 그 체크북은 아기자기한 소꿉놀이 소품 같았고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빠르게 돌아가던 한국은행 시스템과 달리 미국에서 은행은 아주 느리고 고전적이었다. 폰이나 인터넷 뱅킹으로 계좌 이체가 일상인 한국과 달리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수표라는 걸 사용해서 돈을 지불을 한다고 했다. 많은 중요한 비즈니스 거래는 수표에 액수를 기입하고 서명을 한 후 상대방에게 건네주는 식이다. 나중에 보니 자신만의 예쁜 체크 북을 만들어 주문하는 온라인 사이트도 많았다. 아이들 학비처럼 액수가 고정된 것은 자동 이체를 시켜 두었지만, 방과 후 스포츠 수업이나 돌봄 교실비처럼 매달 액수가 다른 교육비는 수표를 써서 학교 사무실에 제출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IT 기술의 선두를 지키는 미국이지만, 거대한 땅의 어마어마한 인구 전체를 모두 선진화시키기에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 듯, 미국은 상반된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었다.


❚뭐든지 좋아 보이는 렌즈

그날 오후, 우리는 동네 지리도 익힐 겸 여기저기를 차로 다녔다. 구글맵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 초행길이지만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식료품을 사러 근처 월마트로 갔다. 한국에서는 월마트가 이미 영업을 중단한 지 꽤 되었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월마트가 단연 잘 나가는 대형마트 중 하나로 손꼽힌다. 우리가 머물렀던 도시에도 월마트가 여러 개 있었다. 월마트에 대한 특이한 점은 계산원이 주로 노년층의 사람이거나 유색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정년퇴임을 하고도 남을 만큼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다양한 연령의 흑인 여성들이 주로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뭐든 다 좋게 보려는 렌즈를 써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정착 초기엔 뭐든지 다 좋아 보였다. 정년퇴임이 거의 의무인 우리나라에 비해 노년층의 노동권을 보장해 주는 미국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늦은 밤까지 월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비싼 의료비 때문이라고 한다. 보장이 많이 되지는 않지만 그나마 직장 의료보험이라도 있어야, 혹시 모를 병원비 폭탄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절대 한국처럼 병원 진료를 마음 편하게 할 수 없다. 감기같은 가벼운 질병으로는 병원에 절대 가지 않는다. 그나마 독감 정도라 진료를 받게 되면 기본 병원 진료비가 15만원에서 20만원 정도이다. 미국의 평균 임금 수준이 우리보다 다소 높은 편이지만 턱없이 비싼 병원비를 지불할 만큼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병원 진료보다는 그저 자연 치유를 선택한다.

미국에서 보낸 4년 반의 유학 생활은 내가 그 렌즈를 벗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거의 평생을 영어를 공부한 나로서는 미국이 좋아 보이게 하는 특별 렌즈가 꽤나 단단히 씌여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중에는 미국에 대해 잘못된 동경을 하는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초에 그런 렌즈를 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다.


❚셋방살이

우리가 머물던 곳은 한국 기업이 이미 10여 년 전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라, 이미 8000여명 가량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한국식당도 꽤 많았고 자그마한 한국 식료품 가게도 하나 있었다. 한국 식단을 고집하던 나에게는 아주 다행스런 일이었다. 월마트에서 기본 생필품을 사고 난 이후, 그 도시에 자리하고 있던 한국 식료품 가게로 갔다. 그 동네의 외곽에 자리 잡은 그 자그마한 상점에는 한국 물건과 간단한 한국식 먹거리 등이 소규모로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소규모 동네 슈퍼 같은 곳이었다. 먼 이국땅에서 눈에 익숙한 물건이며 한국 식자재들이 진열된 것을 보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다른 한편으로 그 가게가 풍기는 동네 구멍가게 같은 풍광은 소외된 소수 민족인 우리의 처지를 민낯으로 내보이는 듯 했다. 타국 생활에서 가지는 이방인의 서글픔이 그 슈퍼를 들어서는 순간 물씬 풍겼다.


우리가 주인이었던 모국에서 뚝 떨어져 서러운 셋방살이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첫 인상은 거의 5년간 머무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곳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한국 물건을 보며 새록새록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딸에게도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딸은 좋은 미국 브랜드 샴푸를 다 마다하고 꼭 비싼 우리나라 샴푸를 고집했다. 달달한 과자를 달고 사는 딸은 학교 시험이 끝나면 꼭 크고 값이 싼 미국 과자보다 작고 비싼 한국 과자를 사달라 졸랐다. 한국 마트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는 거의 7~8년째 그곳에 계셨다고 하셨다. 장사는 제법 잘 되지만 늘 한국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다. 미국 거주 첫해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아저씨의 말씀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 슈퍼 근처에는 한인 회관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민 초창기에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한국 이민자들의 커뮤너티(community)를 형성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거금을 기부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했다. 정기적인 체육대회도 열고 음악회나 축제 같은 행사도 해마다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 후 그 한인회는 음력 설날 행사를 개최했다. 지역에 있던 작은 컬리지(college) 강당에서 노래자랑도 하고 한국 음식도 나눠 먹었다. 봄에는 체육대회도 열었고 유학 첫 해에는 우리도 체육 대회에 참가했다. 타국에서 한국에 대한 향수병을 달래고 한국인들끼리의 정을 느낄 수 있던 행사들이었다.

하지만 그 한인 회관는 그 후 3년 정도는 어느 정도 행사를 운영하더니 결국 회원들 사이 단합이 되지 않아 내부 갈등이 심화 되었다. 한인회 회장 자리를 두고 서로 대단한 권력 다툼을 하는 듯이 꽤나 시끄러웠다. 그 이후 몇몇 행사를 이끌었으나 지역 사람들의 단합은커녕 운영진 사이의 불협화음만 증폭되어 결국 나중에는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전직, 현직 회장단들 간의 소송 분쟁과 잇권 다툼 등 크고 작은 일들로 결국 그 구심점은 사라져 버렸다.

❚가까이 하기엔 안 가까워지는 관계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한국 성당이 있었다. 정착 초반 두 달 가량 그 성당에 다녔다. 성당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이민 2세이거나 이민 온 지 꽤 된 아이들이라 서로 영어로 대화했다. 우리 아이들이 할 줄 아는 영어 문장은 겨우 몇 개 뿐이었다. 결국 같은 생김새의 한국 아이들 속에서도 우리 아이들은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이질감을 느꼈다. 한편, 오랜 이민 생활로 그곳에 지내는 한국 이민자들은 이미 ‘반은 미국인 반은 한국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공감이 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일요일 성당 예배에 우리는 서로 ‘안녕하세요’만 건넬 뿐 마음을 열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었다. 이민자들은 아무런 도움이나 보조 없이,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그곳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아주 치열하게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옆을 살필 겨를도 여유도 이유도 없이 앞을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쉴 새 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일상을 견디는 듯 했다.

내가 그곳에 머문 지 2년 정도 될 무렵, 그 지역 사람들끼리 정보 공유 및 중고 물품 거래를 위한 카카오톡 공동 채팅방이 생겼다. 은퇴하신 한국인 교수님이 그곳 한국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를 일구려고 만드셨다. 그런데, 점차 그 채팅방도 서로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살벌한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미국 현지 한국인들은 서로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가까이 가면 다칠까 서로 조심하는 가시 돋힌 선인장 같았다. 결국 그 채팅방은 귀국자들이 급히 처리할 싼 물건을 사냥하거나 중고 물건 거래 장터로 활용될 뿐 서로 마음을 나누는 공간은 절대 되지 못했다. 지금은 그곳이 더 나아졌기를 바랄 뿐이다.


❚무늬만 한국인

본격적으로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왕복 2시간 통학하고 대학교 내 파트ㅇ타임 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한국인들과의 교류는 크게 줄었다. 두 아이가 적응하기 힘들어하던 한국 성당도 두 달 정도만 다니고 그 이후에는 미국 현지인들이 다니는 교회로 옮겨 갔다. 다행히 아이들은 그 교회에서 오히려 현지 미국 아이들과 더 잘 어울려 지낸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귀국하기 전까지 쭉 그 교회를 다녔다.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내린 유학 결정인 만큼 미국에 머무는 기간동안 가급적 현지인들과의 교류를 좀 더 활발히 하려 했다. 물론 미국 본토 사람들과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로 인해 문화 충격은 적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사고방식과 정서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부터 얻는 마음의 상처보다는 오히려 극복하기가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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