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 비록 '맨 땅의 헤딩' 이었지만

by Hey Soon

❚아기자기한 미국 초등학교 투어

미국의 봄 학기는 1월 첫 주에 대부분 시작된다. 새해 첫 주 정식 수업이 있기 며칠 전부터 교직원은 출근한다. 개학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주소지가 속해 있는 공립 초등학교에 전화를 걸어 전입학에 관한 안내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냥 불쑥 방문하면 담당자가 자리에 없을 수도 있고 가져가야 할 서류가 있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허탕을 치지 않는다. 다행히, 오피스의 직원은 반기는 목소리로 내일 오후로 시간을 예약하면서 그때 학교로 방문하면 투어도 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냥 불쑥 가면 기본적인 서류 안내는 받을 수 있지만 미리 전화로 예약을 했기 때문에 학교 투어 같은 서비스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끼리 연말 연시를 보내느라 영어 한마디 하지 않고 며칠을 보낸 터라 영어 말하기 연습도 할 겸 전화를 해보길 잘했다. ‘내 영어 실력이 현지에서도 통할 만큼 꽤 쓸만하네.’ 하면서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 날 시간을 맞추어 우리 네 식구는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찾아갔다. 미국 학교는 한국 학교와 외부 풍경부터 사뭇 달랐다. 한국의 초등학교는 동네 한 가운데 있고 넓은 운동장은 동네 주민들의 운동 공간이자 아이들의 방과 후 놀이터이다. 그러나 미국의 초등학교는 차로 5분 남짓 간 외딴 곳 넓은 들판 한 가운데 동그마니 학교 하나가 있었다. 넓은 운동장은 없고 뒷 뜰 같은 작은 터에 미끄럼틀, 그네가 몇 개 있는 게 다였다. 물론 그 작은 놀이터도 학교 일과 이외에는 외부인 출입을 금하며 울타리가 쳐져 있다. 학교 건물 앞은 등하교 시간, 학부모들의 차들이 들어오고 나가도록 하는 드라이 쓰루 자동차 길이 있고 그 앞에 주차장이 있을 뿐 학교 외부 모습은 허전할 만큼 단촐했다.


건물 안은 한국 학교보다는 훨씬 작지만 코너마다 아담하게 그리고 아늑하게 잘 장식해 두었다. 우리가 찾은 시기가 크리스마스를 막 보낸 후라 여전히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장식이 실내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근무하던 중학교 우리 반 교실은 몇몇개의 전달 사항을 안내하는 공지만 있을 뿐 그냥 휑한 공간이었다. 나의 예술적 감각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한국 중학교는 아기자기하게 교실을 꾸미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아무튼 나의 교실에 비하면 비록 이곳이 초등학교이지만 훨씬 잘 꾸며져 있었다.

이곳의 교실은 마치 어느 가정집의 거실을 연상케 할 만큼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카페트가 깔려있고 은은한 램프도 있고, 좋아하는 스포츠 팀의 로고가 새겨진 깃발도 있었다. 대부분 교실 한 귀퉁이에 카펫이 깔린 공간에서 아이들이 몰려 앉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각 담임 선생님들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꾸며져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용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학교 개학이 있기 며칠 전에 ‘오픈 하우스’라는 날이 있는데 이날 재학생들은 미리 공지된 한 학기 학용품을 각자 구입해서 학교에 가져오도록 되어 있다. 그날 가져온 학용품은 각 교실에 잘 정리 되어 비치된다. 학습적인 부분을 돕기 위한 코너도 있었다. 수학, 영어의 기본 개념이 담긴 학습 자료가 벽이나 칠판에 부착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보기에도 복잡해 보이는 반도 있었다. 아무튼 개성이 넘치는 나라라 각 반 교실도 개성이 넘쳤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곳은 그 학교 도서관이었다. 초등학생 키 높이에 맞춘 아담한 키 높이의 책장에 숫자가 크게 적혀있었고, 책마다 작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AR(Accelerated Reader)이라는 어린이 독서 권장 프로그램에서 등급화한 순서대로 책이 정리되어 있었다. 영어 교사였지만 나는 어린이 영어 독서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바가 없던 상태였다. 아마도 그 당시 열의가 있는 엄마들은 다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그날 AR이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접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둘째에게 이 도서관은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이 학교 도서관에는 한국 엄마가 매일 봉사하러 오신다고 했다. 아이를 입학 시키고 나도 대학원 개강이 있을 테지만 오전 시간은 다소 여유로운 편이라 이곳에 봉사를 하러 올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반가웠다.


❚무서운 주사 4대씩 순삭

학교 투어를 끝내고 오피스 직원은 우리에게 입학을 시키기 위한 필요 서류를 안내해 줬다. 입학을 시키기 위해서는 현 거주지 주소로 보내진 부 또는 모의 이름이 적혀있는 전기세 청구서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내에 보건소에 들러서 법정 필수 예방 주사를 맞고 접종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전기 회사에 찾아가서 새로 전입해 왔다고 신고하고 전기료 청구서에 나의 이름을 등록시켰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20분 운전해서 보건소에 갔다. 역시나 보건소도 외딴 곳에 있었다. 초행길이고 한국에서도 고속도로 운전은 거의 안 한 나로서는 아주 살 떨리는 운전을 하고 타운 외곽에 있는 보건소에 도착했다.

보건소는 참 이상해 보였다. 한국 보건소는 참 친절하고 실내도 환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그런데, 이곳은 냉랭함이 절로 풍기는 그런 회색 시멘트 건물에 아무 장식도 없었다. 예전 기차역 발매소에 가면 유리창 너머로 기차표를 발매해 주는 직원이 일하듯이 그 보건소 직원도 그렇게 두꺼운 유리창 너머에서 일하고 있었다. 미국의 공공 기관은 대체로 총기 사고를 막기 위해 방탄유리 막을 치고 그 너머로 민원 처리를 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는 아이들 여권을 내밀고, 법정 필수 예방 주사를 맞으러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미리 아이들 예방 접종 내역서를 영문으로 발급 받아서 갔어야 했다. 그것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전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은 이미 맞았을 지도 모르는 주사까지 다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두 아이는 양쪽 팔에 2대씩 총 4대의 주사를 하루에 맞았다. 정말 무지막지한 나라이다. 나는 애들한테 참 미안했고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새 학기 준비는 당연 교복

그 날 저녁 학교에서 받아 온 학교 안내 서류 뭉치를 펼쳤다. 부모가 서명해야 할 서류들이 한가득이었다. 대충 읽고 사인하고 학교로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런데 교복이 문제였다. 한국 초등학교는 교복도 없을뿐더러 중, 고등학교라 해도 교복 파는 특정 브랜드 매장에 가서 사이즈만 말하면 바로 현장 구매가 가능하다. 미국 모든 도시가 그렇지 않겠지만 우리가 살던 그 도시는 초등학교부터 교복이 있었다. 초등학교의 경우 우리같이 딱 정해진 교복은 아니지만 학교마다 복장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하의는 카키색 면바지여야 하고 상의는 폴로 티셔츠이다. 바지는 학교별 상이하지 않지만 폴로 티셔츠는 학교마다 색깔이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다닐 학교는 진한 녹색이었다.


급하게 월마트, 올드 네이비(OLD NAVY), 타겟(TARGET)이라는 대형마트에 갔다. 미국은 가을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된다. 그래서 여름 방학 끝날 무렵에는 가게마다 폴로 티셔츠며 카키 면바지가 사이즈 별로 많이 있다. 비록 봄학기 시작 전이지만 우리처럼 교복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에 가게마다 그런 물건을 별로 진열해 두지 않아 구하기도 힘들었고 맞는 사이즈를 찾기는 더욱 힘들었다. 이리저리 급히 다니며 대충 사이즈가 될 만한 것으로 구매하고 집으로 왔다. 아직 1월이라 낮이 짧은 시기였다. 집으로 돌아올 즘,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아직 새로운 동네라 지리가 익숙치 않은 데다 막상 어둠이 찾아들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서글픔을 뿜어내는 해질 녘 풍경

낯선 공간에서의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풍경은 알 수 없는 서글픔을 공기 중에 뿜어냈다. 대학원 개강을 한 주 반 앞둔 시점이지만 아직 대학원 수업 준비도 전혀 하지 못한 상황이다. 내가 받게 될 수업 수강 신청에 대한 안내도 받지 못했다. 그저 입학 허가서만 들고 이 먼 곳에 왔을 뿐이다. 하나하나 확인하고 문의하고 헤쳐 나가야 할 세부 사항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두 아이와 낯선 도시의 쇼핑몰에서 내비게이션를 키고 어둑어둑한 저녁 길을 뚫고 낯선 집을 찾아가고 있다. 아직 내비게이션 없이는 이곳이 어딘지 동서남북 분간도 전혀 되지 않는 상태이다. 폰이라도 꺼져버리면 그야말로 미아가 되는 지경이었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

아이들 등교 첫날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들여보내고 아이들의 학교 도서관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50대 후반의 여자 사서 선생님과 한국인 학부모 도우미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 학부모는 그곳에서 2년째 자원봉사를 도맡아 하고 계신다고 했다. 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한국 엄마들에게 자원봉사 일을 부탁하셨고 이민자로 온 엄마들에게는 아이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1시간 운전해서 가야 하는 유학생 처지라 매일의 일정이 빠듯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 학교 적응과 나의 현지 생활 적응을 위해 그 학교 도서관에 자원봉사 일을 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 아이 둘을 데리고 학교로 갔다. 아이들은 각자 교실로 가고 나는 도서관으로 가서 오전 내내 자원봉사를 하곤 했다. 그 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외국인 학부모인 우리들을 아주 따뜻이 맞아주셨다. 학교 교사로 지내던 나의 경험으로는, 사실 학부모가 학교에 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외국인 이민자들의 학부모라면 더더욱 선뜻 마음이 열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아주 고마워하시고 매년 도서관 도우미 어머니들을 위한 티타임 행사도 열어 주시고 감사 선물도 주실 만큼 이민자 아이들과 어머니들에게 호의적이셨다.


❚노련한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영업 비밀

그 학교 아이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색깔 혹은 레벨의 책을 읽고 온라인 AR(Accelerated Reader) 퀴즈를 맞춰서 통과하면 일정 점수를 받는다. 쿠폰을 모으면 선물을 받듯이, 모은 점수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도서관에 와서 작은 상품을 받는 식이다. 그 공립학교는 대부분 흑인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학업 수준과 학습 의욕이 미국 평균에 아주 밑도는 그런 학군이었다. 그 사서 선생님은 그런 여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사기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엄청 애를 쓰셨다. 귀여운 초등학생들은 책을 열심히 읽고 자신이 이룬 점수에 엄청 뿌듯해 하며 상품을 받아 갔다.


그 흰머리의 사서 할머니 선생님은 그냥 상품을 덜렁 주는 게 아니라, 하이파이브 엉덩이 쿵 손뼉 짝 등의 일련의 세러모니 동작을 하고, 랩과 같은 짧은 노래를 아이와 함께 하고서야 선물을 건네 줬다. 어쩌면 세상 시니컬한 대한민국 중딩들이라면 그 엄청난 오바 액션에 눈살을 찌푸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스스로를 엄청 자랑스레 생각하며 그 마음이 표정에서도 절로 풍겼다. 처음에는 지켜보는 나도 살짝 적응이 안되어 어색했지만 매일 그런 풍경을 접하다보니 점차 익숙해졌고, 우리 아들이 선물을 받는 날에는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그 선생님의 열정 덕분에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 둘째의 독서 습관도 잘 자리 잡았고 영어 실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엄마가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도 낯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아이들의 학교생활 적응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특히 둘째 아들의 경우 기가 조금 죽어 보였던 초반에 비해 훨씬 학교생활에 자신감을 얻는 것 같았다.

첫 해 동안 거의 매일 오전 아이들이 다니던 그 초등학교에서 도서관 도우미를 했다. 덕분에 그 사서 선생님과 정착 초기의 이런저런 고민 상담도 받을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나뿐 아니라 우리 한국 엄마에겐 참 고마우신 선생님이셨다. 2년째 도우미를 하고 있던 한국 엄마와도 친분이 생겨도 현지 생활에 관한 이런저런 것들을 잘 알려주고 챙겨주셨다.


그 도서관 한 켠에는 작은 준비실이 있었다. 아이들이 반납한 책들과 보다가 책상에 그냥 둔 책들을 다시 레벨별로 책꽂이게 정리를 다 해놓고 도우미 엄마들에게는 잠시의 커피 타임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한 맥심 커피 믹스는 단연 인기템이었다. 백인 사서 선생님께서 일부러 한국 마트에 가서 우리를 위해 사두시곤 하셨다. 이제 갓 이민 온 한국 엄마, 오래 있었던 한국 엄마 모두 각자 현지 생활의 고달픔을 수다로 털어내고, 다양한 생활 정보 등을 공유하며 정착 초반의 고단함을 조금씩 덜어내곤 했다.


그 1년 후 그 사서 선생님은 아쉽게도 근처 영재 학교로 전근 가셨다. 후임으로 젊은 여자 ESL(외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선생님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학부모 도우미를 원하지 않으셨고 학부모의 도서관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냉랭한 전형적인 미국 백인 30대 여자 선생님이었다. 예전의 그 사서 선생님의 열린 태도가 이민자의 학부모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었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비록 맨땅에 헤딩이었지만

유학 시절 첫 한 학기 동안 시작할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압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막연한 두려움과 압도감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 내가 두려움에 떨면, 나를 믿고 온 우리 두 아이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모성애의 최대치를 끌어올려 매일의 일들을 헤쳐 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곳에도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하며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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