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의 미풍을 맞으며 순조로운 항해 시작
❚F1 비자의 의미
미국에 F1 비자를 받고 입국한다는 것은 미국 내 교육기관에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약속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열심히’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대학원 과정일 경우는 학기당 최소 9학점(3과목 수업)을 들어야 하고 학점도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F1 비자 홀더이고 남편과 두 아이는 나의 부양가족으로 등재된 F2이다. 한국에서 학부 과정을 조기 졸업하고 교사 시험에 합격한 전력이 있던 내가 절대로 학점 관리에 소홀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두 아이 뒷바라지를 하면서 공부하고 또 틈나면 대학교 내 파트 타임 일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대학교는 우리 집에서 1시간이나 운전해서 가야 하는 거리였기에 나의 스케줄은 늘 빡빡했다. 어쩌면 아이가 아프거나, 아이가 숙제를 혼자 해결 못 하거나, 차가 어두운 고속도로에서 고장이 나거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 하거나, 내가 아프거나 등등.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고도 남은 상황이다. 어떤 돌발 상황이 생겨 공부를 제대로 챙겨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나에게 대학원 공부가 너무 힘들 수도 있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저런 이유로 현지 대학원 생활에 적응을 못 하면 이 멀리까지 가족을 다 데리고 와서 그냥 바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내 마음 한켠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남편은 솔직히 그런 상황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도 딱히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보니 늘 ‘공부는 대충 해도 된다’라고 했다. 비록 동분서주해야 하는 일상이지만 솔직히 난 공부를 대충 한다는 게 뭔지 모른다. 맞추어야 할 데드라인을 알고도 그걸 안 맞추는 게 대충인지, 해야 할 공부를 그냥 설렁설렁해서 전체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는데도 넘어가는 게 대충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일부러 노력을 아끼는 게 대충인 건지 모르겠다. 그저 다른 일 없이 공부만 하면 되던 한국에서 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이곳 유학 생활에서의 공부 또한 그렇게 하려 하니 마음에 걸리는 염려가 참으로 많았다. 타국에서 두 아이를 뒷바라지하고 남편과 같이 녹녹치 않는 재정 상태를 신경 써가며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열 일을 저글링하며 공부하는 유학맘인 나는 그렇게 오만가지의 염려를 안은 채 미국 석사과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I-94 라는 서류
더군다나, 여기는 내 나라가 아니고 딴 나라다. 나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매사를 처리 해야하는 곳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정신을 헐렁하게 먹을 수 없다. 첫 학기를 시작하기 위해 알아봐야 하고 챙겨야 할 일이 산더미다. F1 비자로 입국한 사람은 학기 시작 최대 한 달 전 입국이 허용된다. 그리고 도착 후 부양가족이 모두 입국했음을 알리기 위해 유학생 사무실(International Student Office)에 부양가족을 모두 데리고 방문해서 I-94라는 서류를 받아야 한다. 나와 남편은 두 아이를 데리고 따뜻한 1월의 초록 들판을 차로 쌩쌩 달려 내가 입학한 대학교로 향했다. 가는 들판 간간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도 보이고 말도 보였다. 정말 전형적인 미국 시골 풍경이 시야에 펼쳐졌다.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일자로 쭉 뻗어있어서 그냥 앞만 보고 달리면 된다. 그렇게 1시간을 속 시원히 달려 드디어 캠퍼스에 도착했다. 아직 학기 시작 2주 전이라 학교는 한산했고 주차단속도 하지 않았다.
❚미국 대학교 지도교수님과 첫 미팅 & 수강 과목 선정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기 위해 통보 받은 장소에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도 없었다. 시간에 10분 정도 늦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사이에 다 끝이 났을까? 반신반의하며 오피스에 가니 1월 입학생이 별로 없어서 그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했다. 나는 결국 아무런 설명도 안내도 없이 그냥 바로 미국 대학원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나마 지도 교수님과의 미팅이 그날 오후에 잡혀있었다. 중요한 건 그 미팅에서 전달받고 문의하면 될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무실에서 I-94서류를 발급받고 잠시 학교 앞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미팅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국인이 제법 많이 사는 도시라 학교 앞에 한국 식당이 바로 보였다. 제육볶음과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물론 값은 한국의 두배 정도이지만 낯선 곳에서 이렇게 익숙함을 발견하는 그 안도감의 값이다.’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약속 시간 까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아이들과 교정 여기 저기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제 겨우 초1, 초4를 한국에서 끝내고 온 두 꼬마에게 이런 미국 대학교가 어떤 인상을 남겼을지 참 궁금하다. 둘은 넓은 잔디 밭을 뛰고 깔깔거리며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다.
드디어 지도교수을 만나러 갔다. 미국 교수님의 사무실은 참 작았다. 수업을 들을 건물은 좌표 평면의 1사분면부터 4사분면에 각각 네모로 강의실이 배치되어 있는 구도였다. 나의 인지 능력으로 그런 복잡한 곳에서 방향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정말 비슷해 보이는 강의실에, 동서남북에 대한 이렇다 할 이정표도 없는 그 건물 안은 최악의 미로였다. 운이 없는 날에는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서 강의실을 찾아 들어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지도 교수 사무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학교 지원 단계에서부터 학교 홈페이지에서 쭈욱 보던 얼굴을 실제로 만나니 반가웠다. 40대 후반인 그 여교수님은 신기하게도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 교사로 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도 내가 근무했던 대구에서 말이다. 공통점이 발견되자 그 교수님과 대화는 아주 잘 이루어졌다. 게다가 미국 대학교 교수는 기본적으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 내가 다니던 한국의 국립대 교수들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첫 학기에 어떤 수업을 신청할지 정하는 것이 그날 미팅의 목적이었다. 교수님은 영어 교육 전공 수업 하나, 특수 교육학(Special Ed.) 수업 하나를 추천했다. 외국 생활이 처음인 두 아이의 학교 적응이 나의 대학원 생활 적응보다 더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머지 한 개 수업은 좀 쉬운 영어 작문 기초반으로 신청하고자 했다. 다행히 그 교수님은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허락해 주셨다. 그 교수님한테 연락을 해놓겠다고 했다. 미국 대학 내 왠만한 일은 모두 이메일로 주고 받는다. 그 만큼 프로의 세계에서 이메일을 제대로 확인하고 응대하는 건 중요한 스킬 중 하나이다. 석사 졸업 후 같은 대학교 박사 과정 중 실제로 한국어 강사를 하면서 그 경험을 제대로 했다. 아무튼 성질 급한 나로서는 그 기다림의 상징인 이메일에 적응하기에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며칠 후 그 영작문반 교수님으로부터 허락 이메일이 왔다.
❚설레는 첫 학기 수업
드디어 미국 대학원 수업 첫 학기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교육대학원 수업은 대체로 오후 5시에 시작되어 8시에 끝난다.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1시간 운전을 해서 캠퍼스에 도착했다. 평일 낮에 이렇게 멋진 드라이브를 하다니 감개무량했다. 첫 수업은 지도 교수님 수업이었다. 수강생들 반은 미국인이고 나머지는 중국인 그리고 말레이시아 사람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Canvas 앱을 띄우고 과목 소개, 과제 및 시험에 대한 안내를 해주셨다. 캔바스(Canvas)는 미국내 대학교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업 관련 자료 안내 및 숙제 제출 등을 위한 플랫폼이다.
구글 클래스룸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전문적인 교육용 플랫폼이다. 구글 클래스룸의 대학생 버전으로 수업에 관한 모든 자료와 과제 제출 그리고 성적 조회등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플랫폼이다. 코로나 이전의 세월이라 그런 캔바스의 기능은 참 놀라웠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친 지금으로서는 그런 앱들이 참 많고 사용 경험이 있지만 그 당시는 2016년이라 그런 앱은 보는 게 처음이었다.
첫 학기 첫 수업에 전까지도 난 그 Canvas 라는 플랫폼에 대해 소개받은 적도 계정을 부여 받은 것도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받지 못 하고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첫 시간 교수님들이 보여주는 그 Canvas 화면에 너무 당황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학생들은 아주 익숙한 듯 차분히 수업에 대한 안내를 듣고 있었다. 나중에 박사 과정을 하면서 한국어 강의를 5학기 동안 가르치면서 그 Canvas 플랫폼에서 내 한국어 강의를 운영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학생의 입장이 아닌 수업자로서 캔바스의 모든 기능을 활용해 볼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채점하고 쪽지를 보내는 등 티칭과 관련된 모든 활동이 다 가능한 편리한 앱이었다. 하지만 그 첫 학기 첫날 수업에서 나는 도무지 딴 세상에서 혼자 헛도는 불안함이 훅 들어왔다.
마침, 내 옆에 앉아 있던 귀엽게 보이는 중국인 여학생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이미 한 학기를 한 친구여서 나에게 Canvas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줬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그 친구와는 석사기간 동안 절친이 되었다. 이제 20대 초반인 친구와 40대 아줌마의 우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중에 그 친구는 내가 교내 영어 강사로 일하던 마지막 학기에 한 달간 교생실습을 하러 내 수업에 오게 되었다. 친구가 가끔 데이트를 가는 날에는 슬쩍 결석을 눈감아 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연애 상담도 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친해졌다. 차차 전공 수업도 적응을 해나갔다. 거의 16년간 영어 교사로서 겪은 경험은 그 전공 수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그 수업들이 참 흥미로웠다.
❚역시 퀄러티가 다른 미국 대학원 수업
첫 학기에 신청한 전공 수업은 아주 신선했다. 이민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영어 교사의 자질에 관한 수업이었다. 지도 교수님이 개설한 강의였는데, 영어를 어떻게 가르치는 것에 앞서서 미국 내의 영어 학습자 및 이민자들의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들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 강의의 목적이었다. 남미에서 불법으로 이주해 온 체류자들의 삶을 영상으로 보고 그들 즉 영어 학습자들에 대해 영어 교수자로서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 수업은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았다. 미국에 가기 전까지 현직 중등 영어 교사였지만,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의 눈물겨운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영어는 계층 상승을 위한 일종의 교양 수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어는 생필품과 같은 것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절대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니 이민자들의 삶을 먼저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어느 저녁 수업에 교수님은 무비 나잇(Movie Night)을 한다면서 우리들에게 팝콘을 들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기대를 하며 저녁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갔다. 교수님은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여주셨다. 한 멕시칸 청년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오다가 사막에서 죽은 사건에 관한 비디오였다. 미국에는 그렇게 위험천만한 이민 행렬이 늘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출퇴근 길에 듣던 미국 국내 뉴스에는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오는 이민자들에 대한 뉴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렸다. 나는 그 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탈북민들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그 비디오를 보고 우리는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을 토론했다. 조별 그룹 프로젝트로 자기 주변의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짧은 유튜브 동영상 제작을 하는 과제도 수행했다. 미국 가기 직전까지 그 예전의 폴더 폰을 쓰던 40대 아줌마였지만 미국 대학원 과정은 나에게 신세계를 보여주었다.
10년 전 첫 아이 임신 즘에 다니던 한국의 대학원 수업과는 그 퀄러티가 달랐다. 나는 아주 흡족했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고 있기에 그 수업의 주제와 과제는 아주 흥미로웠다. 미국 현지인이면서 영어 교사 지망생들인 친구들의 답변들도 재미있었다. 그들은 한번 도 외국에 나가 산 경험이 없는 대학원생들이라 외국인 학생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었다. 그렇게 첫 학기는 내가 꿈꾸던 그런 공부를 할 수 있었던 학기였다.
지도 교수님의 권유로 수강 신청한 또 다른 전공수업은 특수 교육(Special Ed.)이었다. 졸업필수 과목이기도 하고 매 학기마다 강의가 오픈 될지 알 수 없으니 먼저 들어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특수 교육은 모든 교육 대학원생들이 들어아 하는 수업이라 다른 전공 쪽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된다. 첫 학기 수업이라 나는 아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이 그리고 나와 같은 유학생도 거의 없는 완전 미국 현지 대학원 수업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여전히 그 캔바스라는 앱이 뭔지 모른 채 어리버리 유학생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그저 맨 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내가 전공하던 영어 교육에는 과의 특성상 유학생들이 많은 편이었고 지도 교수님도 유학생에 대한 배려심이 많으신 분이셨다. 하지만 이 수업의 경우 교수님은 전혀 그런 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의실은 창문 하나 없이 하얀 벽으로 되어 있었고 전면은 벽 하나를 다 차지할 만큼 큰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창문이 없는 교실은 평생 처음이라 얼핏 감옥을 연상케 하긴 했다. 그 공간이 주는 압박과 혼자 외국인인 상황이 나를 충분히 주눅들게 했다. 나는 교실 한 귀퉁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첫 수업이라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아래와 같은 질문을 했다. “Before you pass away, what legacy do you hope to leave behind? (죽기 전에 어떤 가치를 세상에 남기고 싶습니까?” 특수 교육 수업이다 보니 삶의 가치관에 대한 생각을 한번 해보라는 질문 같았다. 그 당시 나는 그런 교수님의 깊은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다소 쌩둥맞은 대답을 한 듯 하다. 질문에 대해 모든 학생들이 각자 한 명씩 발표를 하고 이어서 교재, 교수 요목 (syllabus), 과제 안내를 해주셨다.
영어 교육 전공 수업보다 이 수업이 빡센데 게다가 나 혼자라는 생각에 불안함이 생겼다. 결국 지도 교수님을 찾아가 그 수업을 취소하고 대신 다른 수업을 추가 신청해야겠다고 의논을 했다. 최소 9학점을 유지해야 하는 유학생 학교 규정 때문애 나는 3학점 짜리 수업을 모두 3개를 신청해야 했다. 그 교수님은 나의 상황을 이해하시고 영어 프리젠테이션 반을 추천하셨다. 다행히 그 수업은 영어 작문 기초반과 같은 교수님이 강의를 하니 아마 수강을 허락할 것 같다 하셨다.
영어 작문 기초반 수업은 논문을 쓰기 위한 기초 작문 연습을 하는 반이었다. 과제에 대한 큰 부담 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군인 여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첫 수업에서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인인 한국인이지 살짝 확신이 없어서 수업을 끝내고 인사를 건넸다. 한국인이었고 육군 사관학교 졸업생인 현직 장교였다. 이미 석사를 그곳에서 졸업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공대 쪽 박사를 하러 온 상황이라 그 미국 대학교 현지 가이드로 딱 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군인 여동생”이라 부르며 수업 후 점심을 같이 먹곤 했다.
추가로 신청한 영어 프리젠테이션 반은 대학원 조교들을 위한 프리젠테이션용 말하기 수업이었다. 영어 작문 기초반과 영어 말하기 수업은 같은 교수님이 가르쳤고, 말하기 수업은 6명 정도뿐인 단촐한 규모였다. 그 교수님의 생일날 집에서 머핀을 구워가서 축하해 준 적도 있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그 교수님은 날 잘 챙겨주셨고, 두 번째 학기에 나에게 교내 ESL 수업을 가르치는 강사 자리를 알아봐 주셨고 그 교수님 덕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자존감이 아래로 내려가던 마당에 그 일자리는 다시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새로운 나라에서 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2016년 1월, 봄날의 미풍
나의 미국 석사 과정 첫 학기 시작은 조금의 좌충우돌이 있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한 명, 두 명 알아가면서 봄날의 미풍을 맞으며 순탄한 항해를 시작했다. 유학 시절 초반에 가졌던 막연한 불안함과 학업에 대한 부담감은 서서히 사라졌고 현지 유학 생활에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난 행복하고 감사했다. 비록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그곳에 있는 거였지만, 나에게 주어진 그 매일이 감사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난 철없는 10대들과 감정싸움을 하며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이제 난 모든 걸 뒤로 한 채 어른들만 있는 교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어 공부를 실컷 할 수 있는 세월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