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거 없는 자신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시작한 두 번째 학기
늦깎이 유학생이지만 첫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 한 이후 대학원 공부에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두 번째 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전공 수업과 필수 교양 수업을 수강해야 했다. 두 번째 학기에는 졸업을 위한 필수 교육학 강의 중 교육 심리학을 들어 보기로 했다. 교육 심리학 수업은 첫 학기에 수강하려다 취소한 특수 교육보다는 그나마 진입 장벽이 높지 않게 느껴졌다. 교육 심리학은 교사 임용 고시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롭게 공부하던 과목이기도 했다. 그 이후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당시 공부한 내용이 어느 정도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대부분 대학원 수업이 그랬듯이 교육 심리학 수업 역시 다양한 과제가 학기 내내 주어졌다. 과제는 대체로 학술지에 실린 글이나 전공 서적을 읽고 요약 및 정리하기, 개인별로 지정된 주제에 관한 조사, 결과 보고서 쓰기 및 프리젠테이션 같은 과제였다. 매주 학생 개별로 전공 교재 중 맡은 챕터를 미리 공부해서 40분간 발표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처음으로 혼자 준비하고 발표해야 하는 과제이만 교육 심리학 수업에서 다룬 내용은 대부분 익숙한 내용이라 비록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어려운 과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16년간의 교직 기간 동안 많은 영어과 연수를 이수했고 특히 100%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의 열풍이 불던 2000년대 초반 10년 덕분에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에 큰 두려움도 없었다.
비록 그게 현지 원어민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유학생으로 영어로 진행하는 발표이긴 했지만 교육 심리학에서 배운 전공 내용을 영어로 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없었다. 챕터 핵심 사항을 파워포인트로 정리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영어로 다시 정리하는 일은 다소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다. 파워포인트를 제작하며 어느 정도 내용이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다. 여러 번 슬라이드를 넘기며 핵심 내용을 익히고 발표날을 기다렸다. 대학원 과정 내내 모든 과제는 마감일보다 적어도 3일 전에는 반드시 완료하는 것이 나 스스로 정한 원칙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유학 맘이라 예측 불허의 돌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나의 최소한의 방책이었다. 이번 과제 역시 발표일보다 며칠 앞서 나름의 준비를 다 완료했었다.
발표일까지 시간이 며칠 더 있었음에도 각 슬라이드별 말할 문장을 달달 외우려 하진 않았다. 통째 암기를 하면 실제 프리젠테이션에서 더 긴장되기 일쑤다. 교사 시절 발표 수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략적인 궤를 꿰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말을 하여 이어나가는 것이 더 여유있고 즐거운 프리젠테이션이 되었다. 이번에도 그 전략을 쓰기로 하고 파워포인트만을 제작하고 별다른 연습을 더 하지 않고 발표일을 기다렸다.
❚ 악몽 같은 첫 영어 프리젠테이션
드디어 기다리던 발표 날이 다가왔다. 10명 가량 현지 미국 사람들이 둘러앉았고 교수님은 그 뒤에 앉아서 나의 프리젠테이션을 참관하셨다. 교사 생활 16년이 쌓아준 나의 내공이 아예 없지는 않은 듯 크게 긴장하지 않고 차분히 발표를 시작했다. 듣고 있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활동을 시키던 평소 내 영어 수업에는 그래서 중간중간 쉼이 있었다, 그런 영어 수업과 달리 이번의 발표는 내용을 내가 정리해주는 그야 말로 혼자 시종일관 내용을 설명해야 하는 발표였다. 발표하면서 그런 차이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나의 집중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으로 영어 원어민인 ‘미국 사람들’ 앞에서 100% 영어로 40분이상 혼자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슬슬 나의 영어 배터리가 방전되기 시작했다.
결국 사단이 나버렸다. 영어로 전문적인 심리학적 내용을 설명하려니 핵심 영어 단어가 바로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용 설명에 필요한 핵심 영어 단어는 미리 챙겨서 메모라도 해두었어야 했다. 내가 설명하는 그 내용에 몰입을 하지 못 한 채 언제나 시간이 끝이 나나 하는 생각 뿐 이었다. 다행히 대부분 현지 미국 사람들이라 유학생인 내가 영어로 하는 발표를 경청해주었다. 내가 혹여나 실수나 멈춤을 하는 순간에도 교수님이 도와주었고, 친구들이 보완해서 멘트를 날려주었다. 그렇게 나의 발표는 그럭저럭 해야할 분량을 다 커버하고 마치긴 했다. 그렇게 나의 첫 영어 프리젠테이션은 나의 기대와는 영 다르게 흘러갔고 준비 미흡으로 나의 대학원 시절의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다행히 교육 심리학 수업은 발표 과제 뿐아니라 객관식 선택형 이론 시험도 학기 성적에 포함되어 있었다. 달달 외운 임용고사 준비 시절 공부 덕분으로 당시 이론 시험은 현지 친구들보다 월등히 잘 받았다. 거의 만점에 가까운 이론 점수 덕분으로 교육 심리학 수업의 성적은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날의 악몽이후 프리젠테이션에 대한 근거없는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