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겁거나 악몽 같거나
❚젊은 20대들 사이에서 즐겁게 적응 중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일에 대해 드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애써 버리기로 했다. 미지의 것을 막연히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냥 정면으로 마주 해보기로 했다. 새로운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해보지 않은 일을 시작하는 것도 그 좋은 우리말을 두고 영어로 살아가야 하는 삶도 즐겨 보기로 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 바로는 모든 것이 재미있고 신선했다. 새 학기 첫날 우연히 근처에 앉게 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야 하는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미국 첫 학기 전공 수업에는 미국 현지인 친구,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도 꽤 많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한 친구는 돌쟁이 아이를 본국에 두고 온 현직 영어 교사였다. 나처럼 현직 교사라는 이유로 그 친구와 쉽게 친해졌다. 중국에서 온 한 여학생은 나와 거의 십 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첫 수업에서 우연히 근처에 앉게 되면서 석사과정 내내 나의 절친이 되기도 했다.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여러 나라 젊은이들과 배움을 함께한다는 점이다. 미래에 대한 멋진 꿈을 꾸며 다들 열심히 오늘을 살고 있는 그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있노라면 나 역시 그들처럼 다시 20대가 된 듯 한 기분마저 들곤 했다. 비록 그들보다 십여년 더 살긴 했지만 나 역시 그들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꿈은 행복하게 꾸었다.
석사과정에서 교양 과목에는 간혹 나이 드신 현지인 수강생도 있었지만 전공 수업에는 20대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 이었다. 전공 수업에서 나는 유일한 늦깎이 유학생이었지만 누구보다 즐겁게 수업에 참여 했다. 비록 늦은 저녁 시간 수업이지만 집에 가서 두 아이 뒷바라지하는 일에 비하면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웠다. 매 수업 시간 순간순간을 아주 아끼듯이 즐겁게, 집중하며 참여 했다.
❚세대 차이, 문화 차이, 혹은 성격 차이
첫 학기에 수강한 전공 수업에서 개별 발표 과제는 다행히 없었다. 대신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관용을 높여야 한다는 주제의 동영상을 제작하는 과제가 조별로 주어졌다. 중국 여학생 두 명과 나는 한 팀이 되었다. 서로 같은 문화권에서 온 유학생이라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이 조별 과제의 의논이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민자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한 후 그들의 현실과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동영상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미국 유학 직전까지 폴더 폰을 사용하던 마흔의 만학도인 상황이라 컴퓨터 관련 역량은 거의 전무후무한 상태였다. 비록 개별로 영상을 만드는 게 숙제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영상 제작 쪽은 완전 문외한이라 부담이 되었다. 물론 당시 조교가 맥북에 설치된 아이 무비라는 무료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설명해주긴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들고간 국내산 노트북이라 그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조교의 모든 설명을 내가 바로 써먹을 수는 없었다. 그 이후 두 번째 학기 시작 전에 거금을 들여 맥북을 사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일단 3명으로 이뤄진 우리 조는 각자 업무를 나누었다. 맥북이 없던 나는 이민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데이터를 정리해 오기로 했다. 나머지 두 명은 내가 조사한 설문지의 결과를 바탕으로 동영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우리가 머문 곳에는 이미 한국 커뮤너티가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도서관 도우미 엄마들도 꽤 알고 있었고 당시 몇 번 다녀 본 한국 성당에도 우리나라 엄마들이 많았기에 30명 정도에게 설문지를 부탁했다. 그 설문 결과를 문항별로 분석하고 자유 서술식 문항의 답들도 주제별로 정리해서 영상을 제작하기로 한 두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발표일이 다가와도 영상 제작은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 친구가 귀뜸해주었다. 영상을 맡아서 제작하기로 한 중국 친구가 그 사이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모든 학업을 중단하고 있다는 거였다. 참 기가 막혔다. 젊은 남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그 여학생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여학생이 언제 다시 마음을 추스릴지 알 수 없고 발표날은 다가오는 상황에서 마냥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나보다 어려도 한참 어린 그 친구지만 그래도 성인인 그 친구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결국 지도 교수님을 찾아가 의논해보기로 했다. 세상에 그런 일로 과제 기한을 연기하는 게 가능할 것 같진 않았지만 당시 나의 능력으로 그 과제를 혼자 다 해낼 자신이 없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단 교수님은 며칠 시간을 더 두고 기다려보고 의논을 해보자고 했다. 우리나라 대학원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이야기이다. 지도 학생의 말도 안되는 상황까지 다 신경을 써주고 해결책을 도와주는 미국 대학교 교수님들의 서비스 정신은 나의 상상 이상이었다. 첫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세 학기 정도 교육 대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계의 서울대라 할 만큼 교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그 대학교의 교수님들은 그야말로 꼰대 중에 찐 꼰대라 할 만큼 대단히 권위적이었다. 결국 도중에 자퇴를 하고 배움을 중단한 나로서는 미국 대학원의 교수님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물론 미국 대학원에 내가 지불한 학비와 국내 대학원에 냈던 학비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 맞다. 실제로 미국 대학교의 수입의 상당 부분은 유학생의 학비가 차지하고 있다. 교수들이 유학생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하는 건 어쩌면 돈의 논리로 봐도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학업과 관련이 없는 일까지 세심하게 배려 해줄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들은 늘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특히 나의 전공 지도 교수님은 나보다 예닐곱살 정도 밖에 더 많지 않았지만 속이 깊으시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진정으로 공감을 해주는 분이셨다. 다행히 그 여학생은 일주일 후 실연의 상처를 딛고 다시 수업에 출석했다. 조별 과제도 잘 마무리 지어서 무사히 발표를 할 수 있었다. 마흔에 시작한 나의 미국 대학원 첫 학기는 세대 차이, 문화 차이, 성격 차이를 다 극복하고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나의 아이디: 평생 학습자
석사과정 첫 학기부터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까지 다양한 과제들을 수행하며 많은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그게 컴퓨터를 다루는 하드웨어적인 능력이든 자기 관리 능력이나 인간관계와 같은 소프트웨어적 능력이든 나의 미국 유학 기간은 나에게 엄청난 배움의 시기였다. 불과 5년의 세월이지만 미국 유학 전과 후의 나의 정체성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새로운 일은 단지 해보지 않은 일일 뿐 그게 반드시 힘이 들고 내 능력 밖이라 단정 짓지는 않는다.
매일 같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 지금도 여전히 적응 중이다. 하지만 이젠 적어도 그런 변화에 담을 쌓지 않고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 배워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5년 만의 귀국과 복직, 그리고 원격 업무와 온라인 티칭이 필수이던 코로나 시기임에도 순조롭게 잘 적응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온라인 세상에서 아직 초보자 단계지만 새로운 아이디를 가지고 걸음마를 시작할 수 있는 것도 미국 유학에서 얻은 배움 덕분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