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학생들과 캠브리지대학교 교수님을 줌으로 만나다
❚ 졸업 시즌
4년 반의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아주 오랜만에 중3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일 년 내내 마스크를 쓰고 지내야 했지만, 올해 중3 학생들과는 정이 많이 든 거 같다. 이제 그 학생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 예전과 지금의 학교는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은 졸업 시즌에 느껴지는 그 뭔가 모를 두려움과 아쉬움이 우리의 마음 한편에 동그마니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졸업을 맞이하는 학생들은 별 달리 특별한 이벤트도 없이 그저 졸업식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학생들끼리 준비한 미니 콘서트도 최근 인근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연거푸 발생하면서 모두 취소되었다. 그야말로, 학생들은 아무 할 일도 없이 그냥 졸업식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 일요일 저녁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문득 번쩍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스탠포드 대학교가 스티브 잡스를 모셔다가 졸업 연설을 부탁 했듯이, 우리 학교도 졸업생을 위한 특별 연설을 특별한 누군가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생각이 났다.
❚ 전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님과의 인연
우리 학교에는 작년 8월 영국 출신 원어민 여자 선생님 한 분이 파견되셨다. 원어민 담당 업무를 맡은 나는 그 선생님을 내 차로 직접 교육청에서 데려와야 했다. 학교로 오는 차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질문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한참을 운전하다가, 그 선생님에 대해 깜짝 놀랄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의 아버지가 캠브리지 대학교 물리학 교수라는 거였다.
미국 유학 시절 동안 얻은 나의 깨달음 중 하나는 작은 만남이 엄청난 일의 시작점 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있었던 결정적인 삶의 전환점들도 그 시작은 작은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미국 대학교에서 외국어 학부에서 한국어 학점 수업을 맡은 강사로 근무할 수 있었던 것도 작은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또, 유학을 갈 당시 박사 학위까지도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계획에 없던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게 된 것도 다 그 작은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절실히 알게 되었다. 사람과의 만남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취업의 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나에게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용기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우연한 만남이 나에게 긍정의 에너지와 성장의 큰 원천이 되었다. 결코 그 시작점은 그냥 작은 인연이 아니고, 귀한 씨앗이고 큰 인연이다. 나는 이 원어민 선생님과의 인연도 그 아버지와의 인연도 귀한 씨앗으로 쓰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학생들을 위해 쓸 지는 사실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이 인터뷰 계획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영어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
나는 오랜 세월 영어 교사로 일하며 학생들이 영어를 그저 시험을 치기 위한 과목으로만 여기지 않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유학을 다녀와서는 더욱 그런 욕구가 강했고, 시험을 위한 영어 수업은 그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나는 매체로 쓰이는 장면을 실제로 보여 준 적이 한 번 도 없었던 거 같았다. 고작 원어민 선생님들과 대화를 한 게 다인 거 같았다. 물론,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영어 학원을 많이 다니던 상황이라, 원어민과의 대화마저도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다른 곳의 사람들과 영어를 매개로 하여 소통하는 경험을 해보게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전 캠브리지대 교수님 줌 인터뷰
나는 나의 줌 인터뷰 계획이 현실 가능한지 더 나은 접근법은 없을지 알아보려고 나의 계획을 남편한테 말했다. 남편은 훌륭한 과학자이자 교수님과의 줌 미팅은 아이들에게 신선한 경험이 될 거고 멋진 생각이라면서 엄청 긍정적인 말로 나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줬다. 나는 한껏 부풀어서 월요일 아침, 학교에 출근해서 1교시 수업에 들어가서 중3 학생들에게 나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관심이 있는 지를 타진해 봤다.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의 인맥이 그렇게나 넓은지 신기해 했다. 나는 으쓱하면서 아이들이 나를 대단한 인맥의 소유자로 우러러 보는 것을 즐기며 ‘당연하지’ 하고 살짝 뻥을 쳤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만일 그 분을 줌으로 만난다면 무슨 질문을 드리고 싶은지 아이들에게 설문을 했다. 아이들은 다음 질문들을 궁금해 했다.
- 학창 시절 즐거웠던 기억은 무엇인지?
- 학창 시절에 대해 후회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 공부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는지?
-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중 무엇을 진로로 선택 해야 하는 지?
- 졸업생을 위한 명언이나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지?
-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중3 아이들 치고는 꽤 괜찮은 질문을 생각해냈다. 사실 나도 그 질문들의 답이 궁금해졌다.
내가 맡은 네반 학생들이 모두 높은 관심을 보여주어서, 나는 이 생각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세워봤다. 그러자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줌으로 졸업식 날 실시간으로 미팅을 할 까? 미리 줌 미팅을 하고 영상을 녹화해서 편집할까? 교수님께 축하 연설을 맡길 까? 인터뷰 형식의 담화를 나눌까?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교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보다 그 유명한 교수님이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주실까? 그것도 9시간이 시차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이 모든 답은 일단, 교감 선생님과 의논을 해보고 결정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서 의논을 드리러 갔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의외로 교감 선생님의 반응은 싱거웠다. 교장 선생님과 의논해보고 연락을 준다는 거였다. 나는 어이가 좀 없었다. 그렇지만, 졸업식 행사의 일부로 이 인터뷰 영상이 쓰였으면 좋겠다 싶어 내 마음 대로 인터뷰를 바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를 기다렸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으로부터 답이 없었다. 들뜬 마음이 거의 절 반 정도 날아가고 내 마음에 회의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먼저 연락을 드리니 그제서야, 교장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셨다고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게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멋진 생각이라는 반응을 기대했던 터라 교장 선생님의 그 반응에 김이 확 샜다.
❚ 회의감이 나의 설레임을 먹어 치우기 전에
그렇지만, 학생들에게 이미 뱉은 말도 있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을 찾아 줘야겠다는 의무감도 있고 해서, 원어민 선생님한테 이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엄청 반가워하며, 아버지도 이 생각에 대찬성 하실 거고 흔쾌히 승낙하실 거라 했다. 자기가 물어봐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내심 안도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원어민 선생님의 긍정의 에너지를 한껏 받았다. 그리고 방법적인 세부사항을 의논했다. 아무래도 실시간 줌 미팅을 졸업 당일에 한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니 녹화를 미리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일방적인 졸업 연설 보다는 학생들과의 인터뷰가 더 학생들을 끌어당길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미리 녹화해야 해당 졸업식에 맞게 길이 조절도 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다.
나는 다시 원래의 설렘을 되찾고 원어민 선생님의 아버지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그날 저녁 나는 정식으로 그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나의 취지와 여쭤보고 싶은 질문들 그리고 줌 미팅 날짜 및 링크를 자세히 적어서 보냈다. 그랬더니 바로 다음 날 답장이 왔다. 이제 모든 줌 미팅의 준비는 끝이 났다. 일요일 저녁 떠올린 나의 생각이 목요일 아침 줌 미팅으로 실현되는 데는 불과 4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내 안에 회의감이 나의 열정을 먹어 치우기 전에 이 일을 해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그렇게 상황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 Held 교수님과 주고 받은 이메일 등 준비 과정 모두를 학생들과 나누기
하지만, 이 빠르게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학생들에게 공유하지 않은 채 완성된 인터뷰 만을 덩그러니 졸업식에 내보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졸업식 명연설은 유튜브에 널리고 널려 있다. 나는 이 인터뷰를 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학생들에게 노출 시키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주선하게 된 과정에서 내가 영어로 그 분과 주고 받은 이메일, 새로운 생각을 실천에 옮기면서 겪는 나의 심리적 갈등, 그리고 그럼에도 실행에 옮기게 된 나의 결심 및 구체적인 단계들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게 영상 하나 보는 것 보다 학생들에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중에 그 학생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두려움으로 주저함으로 실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때, 나의 이 작은 경험이 그 학생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 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영어 교사로서 왠지 모를 사명감이나 뿌듯함 그런 것이 생겨났다. 그리고 더 이상 교장, 교감 선생님 그리고 다른 영어 선생님들의 무관심은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학생들을 위해 하고, 그 과정을 학생들에게 그대로 보여주기로 한 내 결심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당하게 그것을 펼치면 그만 이지 남 눈치나 분위기 따위에 신경 쓰며 주눅 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드디어 중3 학생들과 교수님의 줌 미팅
드디어, 줌 미팅 당일 아침 8시 20분, 영국 현지 시간은 밤 11시 20분,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30명 정도만 수용 가능한 협소한 회의실이라, 안타깝지만, 학생들에게 사전 참가 예약을 받았다. 당일 아침 학생들은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등교해서까지 이 회의에 참가하는 열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너무 신이 났고, 짜릿했다. 이 멋진 생각에 영어교사로서 내 자신이 기특해졌다. 너무 심한 자뻑이라도 할 수 없다. 나는 단언컨대, 중학교 영어 교사가 이런 멋진 생각을 실행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고 장담한다. 결국 영어 교사로서 처음으로 하는 멋진 시도였고, 학생들도 처음으로 맛보는 멋진 만남이었다. 20분간의 실시간 화상 미팅은 별 무리 없이 잘 진행되었다. 나는 교수님의 답변을 다음 질문과 적절히 엮어가며 진행해갔다. 참가한 학생들의 눈빛은 신기함으로 가득했다.
그 동영상을 들고 나는 며칠을 편집했다. 무관심한 다른 교사들에게 20분을 다 틀어버리면 분명히, 불평불만을 털어 놓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동영상을 7분으로 압축했다. ‘Georg Held 교수님과 직접 영어로 대화를 하며 그분의 지혜를 배우고 넓은 세상의 새로운 사람과 소통하는 기회와 즐거움을 졸업생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라는 시작 메시지와 교수님의 약력 등을 넣고 배경음악을 넣어 그럴 듯한 졸업 축하 영상을 만들었다. 뿌듯한 마음과 설레는 마음으로 졸업식날을 기다렸다.
❚ 쓸쓸함과 씁쓸함
마침내 졸업식날, 나는 담임이라 우리 반 학생들과 반에서 방송실에서 진행되는 졸업식을 시청했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나의 줌 인터뷰 동영상을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덩그러니, 방송실에서 내보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행히, 대부분 우리 반 학생들은 끝까지 영상을 잘 봐주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3학년실에 왔다. 역시나 누구하나 영상 잘 봤다는 인사는 나에게 건네지 않았다. 나는 뭔가 쓸쓸함이 생겼다. 이게 바로 한국이구나! 나는 실감했다. 나는 아직 유학 시절의 내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고 신선한 시도를 하고 싶은 열정을 잃기 싫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름 아닌 한국이고 내 동료는 칭찬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한국사람 이구나’ 생각이 들었고,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그런 느낌이 물씬 들었다.
❚ "선생님은 키팅 선생님(영화-죽은 시인의 사회) 닮았어요."
그날 저녁 나는 이 마음을 풀 데 없어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내 친구 지금은 주립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그들은 모두 나의 열정을 지지해줬고 잘했다고 응원해줬다. 졸업식이 끝나고 우리 반 일등인 여학생이 나에게 작은 손 편지를 건네줬었다. ‘선생님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을 닮았어요. 영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늘 기억할 게요.“ 나는 졸업식의 쓸쓸함과 서운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영어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다시 회복했다. 나는 멋진 영어 교사다~.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환경에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되고자 하는 멋진 영어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좀 더 굳건하게 만드는 일을 남은 나의 재직 기간 동안 나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