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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본업에 충실해야 할 때

: F1 비자는 공부해야하는 비자

by Hey Soon

❚ F1비자의 의미


미국에 F1비자를 받고 입국한다는 것은 미국 내 교육기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을 약속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열심히’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대학원 과정일 경우는 학기당 최소 9학점(3과목 수업)을 들어야 하고 학점도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F1비자 홀더이고 남편과 두 아이는 나의 부양가족으로 등재된 F2이다. 예전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교사 시험에 합격한 전력을 봐서는 절대로 학점 관리에 소홀할 스타일이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공부가 너무 힘들거나, 적응을 못 하면 이 멀리까지 와서 그냥 바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는 일이 있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내 마음 한켠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를 못 했다. 늘 대충하라는 말을 했다. 난 대충하는 게 뭔지 모른다. 두 아이 뒷바라지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또 틈나면 대학교 내 알바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고 대학교가 집에서 1시간 운전해서 가야하는 거리였기에 나의 스케줄은 늘 빡빡했다.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고도 남은 상황이다. 아이가 아프거나, 아이가 숙제를 혼자 해결 못 하거나, 차가 어두운 고속도로에서 고장이 나거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 하거나, 내가 아프거나 등등.


❚ I-94 라는 서류


더군다나, 여기는 내 나라가 아니고 딴 나라인데다가 나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매사를 처리해야하는 곳이다 보니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정신을 헐렁하게 먹고 다니진 못 했다. 그렇게 정신 무장을 하고 첫 학기를 시작하기 위해 나는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해야 했다. F1 비자로 입국한 사람은 학기시작 전최대 한 달 전이후로 입국이 허용된다. 그리고 도착 후 부양가족이 모두 입국했음을 알리기 위해 International Student 오피스에 부양가족을 모두 데리고 방문해서 I-94라는 서류를 받아야 한다. 나는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따뜻한 1월의 초록 들판을 차로 쌩쌩 달리면 소도 보고 말도 보며 미국 시골 풍경을 한껏 감상했다. 1시간 동안 쭉 뻗은 고속도로를 속시원히 달리고 나니 드디어 캠퍼스가 시야에 펼쳐졌다. 아직 학기 시작 2주 전이라 학교는 한산했고 주차도 크게 단속하지 않았다.


❚ 미국 대학교 지도교수님과 첫 미팅 & 수강 과목 선정


지정된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기 위해 해당 장소에 갔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오피스에 가니 1월 입학생이 별로 없어서 그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안내도 없이 그냥 바로 미국 대학원 생활을 시작해야했다. 그나마지도교수님과의 미팅이 그 날 오후에 잡혀있었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I-94서류를 발급받고 지도교수을 만나러 갔다. 미국 교수님의 사무실은 참 작았다. 수업을 들을 건물은 좌표 평면의 1사분면부터 4사분면에 각각 네모로 강의실이 늘어 서 있는 구도였다. 나의 인지 능력으로 그런 복잡한 곳에서 방향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참 어려웠다. 정말 비슷해보이는 강의실에 동서남북이 헷갈리는 그 건물 안은 미로였다. 가끔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서 강의실을 찾아 들어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지도교수 사무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보던 얼굴을 실제로 만나니 훨씬 마음이 놓였다. 40대 중반인 그 여교수님은 신기하게도 10여년 전에 한국에 원어민 교사로 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도 내가 있던 도시에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교수님과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미국대학교 교수는 기본적으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 내가 다니던 한국의 국립대 교수들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첫 학기에 들을 수업을 선정하는 것이 그날 미팅의 목적이었다. 교수님은 나에게 영어교육전공 수업 두 개, 특수 교육학(Special Ed.) 수업 하나를 추천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 뒷바라지에 좀 힘이 드니 전공 두 개 중 하나는 좀 쉬운 영어작문 기초반으로 신청하고자 했다. 다행히 그 교수님은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렇게 허락해주고 그 영작문반 교수님한테 연락을 해놓겠다고 했다. 미국의 모든 연락은 이메일이 유일한 방법이다. 며칠 후 그 영작문반 교수님으로부터 허락 이메일이 왔다.


❚ 드디어 첫 학기 첫 수업 &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드디어 미국 대학원 수업 첫 학기 첫 수업이 있는 날이 다가왔다. 교육대학원 수업은 대체로 오후 5시에 시작되어 8시에 끝이 난다.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혼자 오후에 1시간 운전을 해서 캠퍼스에 도착했다. 평일 낮에 이렇게 멋진 드라이브를 하다니 감개무량했다. 첫 수업은 지도 교수님 수업이었다. 수강생들 절 반은 미국인이고 나머지는 중국인 그리고 말레이시아 사람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Canvas앱을 띄우고 과목 소개, 과제 및 시험에 대한 안내를 해주셨다. 첫 학기 첫 수업에 가기전 까지도 난 그 Canvas 라는 수업 관련 자료 안내 및 숙제 제출 등을 위한 플랫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일종의 구글 클래스룸의 대학생 버전인 캔바스 앱은 수업에 관한 모든 자료와 과제제출 그리고 성적 조회등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플랫폼이다. 나는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첫 시간 교수님들이 보여주는 그 Canvas 화면에 너무 당황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학생들은 아주 익숙한 듯 차분히 수업에 대한 안내를 듣고 있었다. 나중에 박사 과정을 하면서 한국어 강의를 5학기 동안 가르치면서 나는 그 Canvas 플랫폼에서 내 한국어 강의를 운영하는 수준까지 되었지만, 그 첫 학기 첫날 수업에서 나는 도무지 딴 세상에서 혼자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일을 어찌하나 하다 옆에 앉은 귀엽게 보이는 중국인 여학생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이미 한 학기를 한 친구여서 나에게 Canvas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줬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그 친구와는 석사 기간 동안 절친이 되었다. 이제 20대 초반인 친구와 40대 아줌마의 우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중에 그 친구는 내가 교내 영어 강사로 일하던 마지막 학기에 한 달간 교생실습을 하러 내 수업에 오게 되었다. 친구가 가끔 데이트를 가는 날에는 슬쩍 결석을 눈감아 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연애 상담도 해줘가면서 우리는 친해졌다. 그렇게 전공수업은 적응을 해나갔다. 거의 16년간 영어 교사로서 겪은 경험은 그 전공 수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나는 그 수업이 참 흥미로웠다. 미국 내 영어 학습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이 메인 주제인 그 수업은 여러모로 배울점이 많았다. 유튜브 영상 제작도 그때 처음 해봤다.


영어작문 기초반 수업은 논문을 쓰기 위한 기초 작문 연습을 하는 반이었다. 과제에 대한 큰 부담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군인여동생”을 만나게 되었다. 첫 수업에 눈에 띄는 중국인인가 싶은 동양인이 있었다. 수업을 끝내고 인사를 하니 한국인이었고 육군 사관학교 졸업생인 현직 장교였다. 이미 석사를 그곳에서 졸업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공대 쪽 박사를 하러 온 상황이여서 그 미국 대학교 현지 가이드로 딱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군인여동생”이라 부르며 수업 후 점심을 같이 먹곤 했다. 나는 영어쓰기 기초반 수업말고 하나를 더 들었는데, 그건 대학원 조교들을 위한 프리젠테이션용 말하기 수업이었다. 둘 다 같은 교수님이 가르치는 수업이었고, 말하기 수업은 6명 정도 뿐인 단촐한 사이즈였다. 나는 그 교수님이 생일 때 집에서 머핀을 구워가서 축하해준 적이 있었다. 그게 계기가 되었는 지 그 교수님은 날 잘 챙겨주셨고, 두 번째 학기에 나에게 교내 ESL 수업을 가르치는 강사 자리를 알아봐주고 일자리를 갖게 해주셨다.


❚ 2016년 1월, 봄날의 미풍을 맞으며 순탄한 항해 시작


그렇게 나의 첫 학기 시작은 조금의 좌충우돌은 있었으나, 좋은 사람들을 한 명, 두 명 알아가면서 봄날의 미풍을 맞으며 순탄한 항해를 시작했다. 유학시절 초반에 가졌던 막연한 불안함과 학업에 대한 부담감은 서서히 사라졌고 현지 유학생활에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난 행복하고 감사했다. 비록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그 곳에 있는 거였지만, 나에게 주어진 그 매일이 감사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난 철없는 10대들과 감정싸움을 하며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이제 난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어른들만 있는 교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어 공부를 실컷 할 수 있는 세월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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