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한 오버랩 그리고 내 인도 친구 아유
❚꿈속 사람이 보내온 카톡 문자
“선생님~, 드디어 저 1월에 한국 가요.” 분명히 그건 내 인도 친구 아유가 인도에서 보내온 카카오 톡 메시지였다. 나는 기분이 묘했다.
아유는 내가 미국 유학시절 알게 된 친구다. 사실은 내가 가르친 한국어 수업의 학생이었다. 많은 한국어 수강생들 중에 아유는 유독 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학부생들이 수강하던 내 한국어 수업에 아유는 유일한 석사과정 학생이었다. 그런 아유가 첫 학기 수업, 첫 일주일은 열심히 들어오더니 더는 수업에 오질 않았다. 어떤 이유로 수강 취소를 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학기 그 한국어 수업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학기가 끝날 때가지 열심히 수업에 참여한 내가 가장 아끼는 학생들 중에 한 명이었다. 첫 수업시간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아유는 자신의 다섯 번째 언어로 한국어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유는 인도에서 미국대학으로 우주항공학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온 참 똑똑한 여학생이었다. 엄청난 재능을 가진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늘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아주 친절했다.
❚20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우리
아유는 20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아유의 엄마는 40대 중반으로 나와 나이가 비슷하다고 했다. 내가 아유의 엄마 벌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유는 내겐 마음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같은 존재였다. 아유와 나는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할 만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같은 동양계 유학생으로 가지게 되는 공감대는 의외로 깊었다. 배타적인 미국 남부의 문화와 은근한 인종 차별적인 분위기에 우리는 살짝 마음이 심드렁해져 있었던 터였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이기주의적인 부분이 있다는 둥 우리는 우리의 동양문화권과 다른 미국의 문화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서로 쏟아 놓았다. 그 친구와 나는 이내 친해졌다. 나는 은근히 우리의 ‘정 문화’와 선배 후배간의 서로 챙겨주는 문화 같은 한국문화의 좋은 점을 한국어 수업을 통해 자랑 아닌 자랑을 많이 했다. 물론 아유는 이미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대해 엄청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을 기약할 수 없던 우리
아유를 만난 시기는 둘 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던 즘이었다. 나는 한국어 강의를 하며 지내는 그곳 생활을 나름 만족해했지만 그래도 박사를 졸업하고 다시 귀국해서 나의 본업을 하며 밀린 인생의 과업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데, 아유도 미국 대학교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서울대학교에 가서 자기 전공분야의 박사과정을 밟는 것도 생각 중이라고 했다. ‘미우주항공국인 NASA도 미국에 있고 한데 왜 구지 한국을 올려는 것일까? 기왕 미국에 온 김에 여기서 박사를 하는 게 더 멋진 계획이지 않을까’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물론 서울대학교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이긴 하지만 여전히 세계랭킹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인 대학교가 아님을 알기에 나는 의아해 했다. 그렇게 아직 미래를 기약하지 못한 채,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모든 학교 졸업식이 취소되면서 각자 집에서 조용히 졸업을 자축했다. 졸업 후 나는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의 귀국을 서둘렀다. 아유는 인도로 가는 비행기가 연거푸 취소되면서 발이 묶인 채 미국에 한두 달 더 남아 있었다.
❚꿈속 사람이 현실로 온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예전처럼 영어 교사의 일을 했다. 가끔 카톡으로 전해오는 아유의 안부 메시지는 마치 먼 옛날 내가 꿈결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편지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 년 반이 지난 가을 무렵 아유에게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선생님~ 저 내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에서 박사공부하게 되었어요~”. 미국 대학교 캠퍼스를 거닐면서 나에게 하던 아유의 말이 그 당시 지나가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그 사이 아유는 진지하게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이 한 번의 불합격을 겪고 마침내 서울대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세상에~. 내가 꿈속에서 만난 아유가 여기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온다고? 딱 그런 느낌이었다. 완전히 다른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을 바꾸어서 살다보면 한 번씩 현실감을 잃을 때가 있다. 한국에서 살고 있으면 미국에서 있었던 일 들은 다 꿈이었던 듯 느껴진다. 반대로 미국에 있을 동안 한국에 잠시 다녀오면 한국에 갔다 온 일이 꿈인 듯 느껴졌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와 미국에 살던 시절을 떠올리면 모두가 꿈처럼 여겨진다. 그 세월이 너무 멋져서 꿈같다는 게 아니라, 정말 현실의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꿈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그곳에서의 일들은 모두 꿈이었다고 하면 ‘맞아, 꿈이었지’라고 할 만큼 한국에서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유가 실제로 내년 3월에 서울에 온다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아유가 우리나라에 오기를 기다렸다. 1월경에 집을 알아봐야한다며 나보고 한국어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괜찮은 방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이래저래 링크를 걸어줬지만 결국 아유는 비싼 서울 물가가 부담이 되었던지, 결국 두 달 임시 거처로 신림동 고시원을 하나 계약했다고 했다. 신림동 고시원은 또 무슨 우연인가? 먼 옛날 영어교사 시험을 준비하던 힘든 시절, 나는 한 학기 정도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아유가 온다고? 나의 20대 시절, 힘들게 보내던 그곳에 20대인 아유가 힘들지만 새로운 꿈을 위해 그곳으로 온다는 거였다.
❚반갑고 고맙고 신기한 인연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나는 봄방학을 이용해서 아유를 만나러 서울대학교에 갔다. 꿈속의 친구를 현실에서 만나는 그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불과 일 년 반이 지난 시간이지만, 낯선 미국에서 본 친구를 우리나라에서 본다니 참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말로 설명할 길이 없는 그 벅찬 느낌과 반가움은 나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아유를 만나자마자 나는 코로나시대에 하면 안 될 포옹을 하고 말았다. 잃어버린 친구를 찾은 듯한 반가움과 우리나라를 선택해 준 고마움과 끊어지지 않은 우리의 인연의 신기함이 뒤범벅이 되어서 주루죽 눈물이 흘렀다.
오랜만에 만난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의 대표 맛집을 선보여야 마땅하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피크를 치던 때라 어쩔 수 없이 캠퍼스 내 작은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 외국인 등록증이 없어서 은행계좌 계설도 못한 상황, 그리고 그 식당에 혼자 외국인이라는 상황은 키 작은 아유를 더욱 더 작게 만들었다. 나는 이방인이 가지는 그 불안한 마음을 잘 알기에 아유를 최대한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싶었다. 간단한 피자로 점심을 때우고 우린 커피를 들고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밀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고단한 이민 생활을 끝내고 편안한 나의 집으로 온 나로서는 또 다시 그 고단한 유학생의 삶을 시작하는 아유가 대견해보이면서도 안스러웠다. 집의 맏딸로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로 자신의 자리메김을 하고 있는 아유는 누구보다 당차게 자신의 꿈을 위해 매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3~4년을 예상하는 박사과정을 끝내고 자신의 고국인 인도로 돌아가 우주항공 분야 발전에 일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꼭 우주비행사가 되어서 우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작은 몸의 아유지만 아유의 열정만큼은 이미 우주를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대학교 입학이야기, 그사이 생긴 늦둥이 남동생 이야기, 내년에 자기 따라 한국으로 유학오고 싶어한다는 여동생 이야기, 한국에서 평생 처음으로 눈이라는 걸 봤다는 이야기 등등. 아유가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운동장을 한 가득 메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40대인 내가 다시 20대의 나를 만난 곳
일년 반 동안 못 전한,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아유의 임시 거처가 있는 신림동으로 아유를 데려다 주었다.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나의 20대를 보낸 그곳에서 40대인 내가 다시 20대의 나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유를 내려주고 잘 지내라는 포옹을 해주었다. 나는 멀리 아유가 사라질 때 까지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사라지는 아유의 뒷모습에서 그 먼 옛날 힘들었던 나의 20대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용기 절정을 이룬 40대의 미국 유학시절과 내 인생에서 가장 저점을 찍은 20대의 임용 준비시절은 내 인생 곡선의 각각 최고점과 최저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월의 갭을 뛰어넘고 그 두 지점에 내 친구 아유가 있었다. 먼 미국 땅, 첫 학기 첫 수업에서 아유를 만난 그날, 나는 오늘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고 그 인연이 이어지는 과정, 과정들은 참 드라마와 같다.
❚나만의 드림캐쳐
미국 유학을 모두 끝낸 후 나에게 주어진 값진 리워드는 바로 그런 인연의 선으로 가득한 나만의 드림캐쳐였다. 먼 훗날 멋진 우주항공 엔지니어가 된 후까지도 우리의 인연이 이어질 수 있길 기대한다.
부디 아유가 자신의 꿈을 이루고 인도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의 정을 많이 나누길 바란다. 그리고 착한 한국 사람들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