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씩씩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지혜롭게 활용하기
❚두렵다는 것은 무언가를 도전하려고 한다는 것이니 좋은 것이다.
대부분 우리는 사춘기를 겪고 사회 초년생이 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일들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런 새로운 일들은 언제나 두려움을 생기게 한다. 나의 사춘기 시절과 사회 초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 직업인으로 16년 정도의 경력을 쌓은 이후, 특히 소위 말하는 불혹의 나이가 될 무렵까지 나는 나와 관련된 일로 두려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다지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할 일이 없었으므로 두려울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40이라는 나이에 두 아이와 남편을 데리고 학생비자를 받아서 미국 유학을 가서부터 나의 인생은 참 많은 변화를 감당해내야 했었다. 익숙한 내 나라를 떠나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이 도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울 게 참 많았다. 그리고 두려울 이유도 참 많았다.
❚두려움이 없이 무언가를 도전하는 사람은 없다.
나를 가장 가까이 지켜본 언니와 여동생들은 내가 두려움 없이 그 많은 삶의 변화를 헤쳐 나갔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의례히 나는 그들과 다른 아주 도전정신이 투철하고 용기가 넘치는 사람이라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나는 언니와 여동생과는 사뭇 다른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다. 두려움에 떨며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기 보다는 바들바들 떨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해보려 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 안의 두려움은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려운 마음은 언제고 내 마음에 슬며시 들어와서 자리를 잡으려 했다. 내가 어떤 일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두려움은 어느 새 눈덩이처럼 부풀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곤 했다. 늦깍이 유학생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두려울 만한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 처음으로 하는 일들이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일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세월을 보내면서 나는 두려움을 극복 하기 위한 나만의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나만의 No.1: 두려운 그 대상을 조각 내어 각 조각에서 두려울 게 있는지 따져보기
그렇게 두려움이 찾아오면 내가 하는 가장 첫 단계는 내가 두려워하는 그 일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두려움을 주는 그 덩치 큰 그 녀석을 하나 둘 해부한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던 날 한 시간 차를 운전하며 캠퍼스로 가던 날, 나는 가만히 나의 50분 수업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그려봤다. 그렇게 잘게 조각을 내고 각 조각에서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게 있는 지를 다시 생각한다. 그렇게 솜솜히 따지고 보면 또 그렇게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든다. 그렇게 나는 두려움이 산처럼 몰려오면 일단, 그렇게 잘게잘게 해부해보는 게 그 녀석을 처단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나만의 No.2: 혼자서 씩씩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지혜롭게 활용하기
그렇게 두려움을 주는 일들을 조각 내고 두려울 이유가 없음을 확인한 후 내가 쓰는 두 번째 단계는 ‘혼자 씩씩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지혜롭게 활용 하기’이었다. 5년 간의 유학 기간 동안 나와 관련된 일로 두려움을 느낀 일들이 몇 번 있었다. 그런데 내가 두려워 하던 그 순간에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늘 있었다. 사실 우연히 그런 고마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있었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 교내 아르바이트 면접 보던 날 & 중국 유학생
한국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매월 월급 날은 그저 당연히 통장에 돈이 들어와 있는 날로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 땅에서 돈을 버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미국 땅에서 돈을 벌어 보려고 교내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다. 도서관에 위치한 글쓰기 센터에 스케줄 관리를 해주는 사람을 뽑는 곳에 지원했다. 비록 시간 당 9불의 말단직이지만 면접을 보러 가기 전의 내 마음은 두려움이 이미 한 가득 이었다. 한국에서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해 영어로 면접을 보던 것보다 몇 배 더 긴장되었다. 더욱이, 그 면접관들은 쓰기, 말하기에 도가 트인 영어 전문가라고 생각하니 주눅이 절로 들었다. 면접을 보기로 한 날도 나는 유학생들의 사무를 처리해주는 인터네셔널 오피스의 로비에 앉아서 공부도 할 겸 면접 준비도 할 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득 그곳에 아르바이트생인 중국 여학생이 내 눈에 띄었다. 그 친구도 유학생으로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입장이기에 나는 뭔가 조언이나 위로 같은 것을 기대하며 그 친구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내가 오늘 처음으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는 데,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마음이 무겁다고 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행히 그 친구는 나를 이상한 아줌마라 여기지 않고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아마 면접에 별 어려운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게 그 친구와의 인연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 이후 그 친구는 내가 하던 교육학 박사 과정으로 오게 되었고 전공 수업을 여러 개 같이 듣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의 조언대로 나는 차분히 묻는 질문에 소신껏 대답을 했다. 그날의 면접은 미국에서 한 최초 면접 경험이었다. 그 날의 면접은 그 이후 다른 면접을 위한 좋은 연습이 될 수 있었다.
2. ESL강사 오리엔테이션 & 내 친구
내가 공부하던 미국 대학교에는 외국 유학생들의 생활 영어가 아닌 학문적 영어 소통 능력을 높이기 위한 인텐시브 영어 프로그램(Intentisve English Program)이 운영되었다. 그곳의 영어 강사는 현지에 석사나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들은 영어 원어민도 있지만, 제2언어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같이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외국 유학생도 그들에게는 좋은 강사로 여겨졌다. 쓰기 센터의 시간 당 9불의 아르바이트가 돈이 너무 안 되어서 나는 용기를 내어 좀 더 업그레이드 된 일자리를 찾던 중 영어 강사 자리에 지원을 하기로 했다.
서류 심사와 면접을 다 통과하고 드디어 그곳의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강 일주일 전, 여러 가지 업무 관련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라고 통보가 왔다. 비록 내가 강사로 임용은 되었으나, 내가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 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참 우연히도 그 즘 멀리 한국에서 내 친구가 나를 방문했다. 나는 그 친구와 같이 그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걱정을 하고 있는 내 옆에서 그 친구는 나를 격려해줬다. 내가 거기에 있는 어떤 강사에 뒤지지 않고 내가 손색없이 영어를 잘 구사하니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덕분에 그날의 두려움도 무사히 극복하고 또 한 산을 넘을 수 있었다.
3. 첫 한국어 수업 & 외국어 학부 학장님
영어 강사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이후에 이번에는 학부생들에게 4학점짜리 한국어 과정을 가르치는 정식 강사자리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나의 영어교사 티칭 경험과 한국어 원어민이라는 자격요건을 가지고 당당히 면접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박사과정 첫 학기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딸로 한국어를 잘 구사한다. 당연히 나에게 모국어인 한국어는 영어보다 훨씬 쉬운 언어이다. 그러니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영어를 가르치는 일보다 훨씬 더 쉽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한국어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한 번도 한국어 문법 규칙에 대해 의식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의 첫 학기 한국어 강의는 참 힘이 들었다. 특히 첫 학기 첫 수업은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그 수업에는 외국어 학부의 학장님도 학생으로 수강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이 그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수업을 시작한 것인지 나를 모니터링 하기 위해 그러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학기 한국어 수업이 그 대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어 강사를 채용해서 한국어 수업을 개설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이다보니 학장님께도 나의 수업이 염려가 된 모양이었다. 그 수업이 잘 진행이 되고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아야 다음 학기에도 계속 개설을 하고 초급 뿐 아니라 중급 한국어도 개설 할 수가 있다. 그런 이유로 그 학장님은 그 한국어의 수업이 잘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계셨다. 독일어 교수님이신 그 학장님의 외국어 학습에 대한 학구열은 대단하셨다. 그 학장님은 내 수업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고 도우미 역할을 참 많이 해주셨다. 나는 학생들이 내 설명을 이해 했는 지 아무런 반응을 주지 않을 때는 늘 그 학장님쪽을 바라봤다. 그러면 그분은 알아 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였고 모르는 게 있으면 나에게 질문을 하곤 하셨다. 그래서 그 학장님은 내 수업 진행에 엄청 도움이 됐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점점 한국어 강의에 자신감을 가지고 진정으로 그 일을 즐기게 되었다.
4. 논문 proposal 하는 날 & 통계학과 교수님
드디어 박사 졸업의 가장 힘든 관문이 남았다. 내가 연구 주제를 정하고 연구 계획서를 써서 전공 교수님들과 통계학과 교수님앞에서 그걸 프로포즈하는 날이 왔다. 물론 나의 교수님께서 나의 연구 계획서를 미리 검토해주시긴 했으나, 그 교수님은 꼼꼼한 스타일이 아니셔서 그저 좋다고만 하시고 더 이상의 조언을 해주시진 않으셨다. 특히, 데이터 분석에 관한 나의 계획부분은 구멍이 많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자신 없는 내 속 마음을 애써 숨기며 논문 심사원들 앞에서 나의 연구 계획을 설명했다. 역시나 통계학 교수님께서 이런 저런 지적을 하셨다.
보통 우리는 남이 자신의 의견에 관한 지적을 하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옹호하고 자신의 이야기가 옳음을 기를 쓰고 피력한다. 하지만, 나는 그 위기의 순간에 반대의 전략을 폈다. 나는 나의 말을 더 설명하기 보다는 그 교수님께서 하신 말이 참 좋은 포인트라고 오히려 두둔해드렸다. 그리고 그 교수님께 현재 연구 계획서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오히려 부탁했다. 그렇게 해야 그 교수님도 그 자리에 있을 명분이 있으시고 앞으로 내 연구가 무리 없이 진행이 될 거라 순간 생각했다. 그 순간의 판단 덕분에 그 이후로도 그 교수님은 나의 논문에 아주 친절하게 상세한 조언과 코치를 해주셨다.
5. 논문 마지막 발표 날 & 나의 멘토 레인, 밀튼 할아버지
많은 피드백을 받고 교정을 여러 차례 한 이후에 나의 논문심사는 마지막 단계인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우려한 대로 코로나사태로 학교가 전면 폐쇄되었다. 나는 그런 기상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졸업을 계획한 대로 해야 했다. 이미 한국에 복직원을 내 놓은 상태라서 더 이상 스케줄의 변동을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해져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나의 마지막 논문 발표(final defense)행사는 줌(Zoom)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줌으로 발표한다는 것은 참 이상하고 힘든 일이다. 마치 벽보고 혼자 말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말을 몰래 엿듣는 것과 같은 그런 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상대의 반응과 긍정적인 피드백이 없이 순전히 혼자 영어로 지껄여야 하는 것이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오랜 시간 그렇게 혼잣말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그 발표의 내용도 온전히 나의 연구결과이기에 과연 그 컨텐츠에 대한 자신감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의 제약도 생각해야하는 상황이기에 나의 마음은 뭐 하나 편하지 못했다.
줌으로 논문 마지막 발표를 하기 몇 주 전에 나는 곰곰이 그 상황을 상상하며 누가 나와 함께하면 내 마음이 편할 수 있을 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멘토이신 레인 할머니와 밀튼 할아버지를 그 줌 미팅에 초대했다. 원래 마지막 논문 발표일에는 가족과 친한 지인들을 초대하는 게 관례였다. 다만 그게 역사상 처음으로 하는 온라인 논문 발표 미팅이기에 그렇게 지인을 줌 미팅에 초대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도 교수님께 허락을 받고 나는 그 두 분을 초대했다. 다행히 두 분 다 대학교를 졸업하신 신세대 할머니, 할아버지이셔서 기본적으로 그런 컨퍼런스에 대한 기본 컨셉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밀튼 할아버지의 사교성은 과히 국제적이라 그 누구와도 쉽게 마음을 열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시는 분이다. 그래서 발표 초반, 지도 교수님과 밀튼 할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며 그 어색한 기운을 싹 없애시는 동안, 나는 차분히 내 발표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혼자하는 혼잣말과 같은 줌 발표이지만, 나는 한번씩 레인 할머니와 밀튼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무 정신없이 진행되는 행사라 그 역사적인 날 녹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 날을 그렇게 기억에만 담게 되어 너무 아쉽지만, 그렇게 두 분의 응원과 도움에 힘입어 큰 실수 없이 그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나만의 두려움 극복 방법 두 가지 정리
1) 두려운 그 대상을 조각내어 각 조각에서 두려울 게 있는지 따져보기
2) 혼자서 씩씩하려 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지혜롭게 활용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