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년 경력 영어교사지만 교생실습은 필수
❚5월은 교생선생님이 오시는 달
매년 5월은 잊혀져가는 날이지만 ‘스승의 날’이 있는 달이고 역시나 교생 실습이 있는 달이다.
비록 한국에서 16년 영어 교사경력이 있는 나였지만, 미국에서 영어 교육 석사과정의 마지막 학기에 ‘Clinical Residency’라는 교생 실습과 같은 과정을 면제 받지는 못했다. 보통 한국에서 교생실습은 5월 한 달 동안 이루어진다. 하지만 ‘Clinical Residency’라는 과목은 그 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ESL 어학원에 3개월 가량 동안 출근하여 거의 150시간에 달하는 엄청난 시간의 참관을 하고 끝날 무렵에는 자신의 수업도 시연해 보이는 필수 과정이었다.
❚미국 영어 교육석사 과정 시절 나의 교생 실습
그 당시 우리 가족은 대학교 캠퍼스에서 차로 한 시간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보통 일주일에 3일 정도를 통근했다. 하지만 이 어마 무시한 교생실습을 하려면 매일같이 그 왕복 두 시간의 운전을 해야 했다. 나는 그 왕복 운전 시간과 기름 값이 너무 아까웠다. 우리가 살던 타운에는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분교가 있었다. 이름은 같은데 다만 그 지역 이름을 딴 분교였다. 그 곳에는 역시나 ESL어학원이 있었다. 나는 혹시 내가 그 어학원에서 교생실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록 한 두 번의 교실 방문이 아닌 그 150시간에 달하는 기간의 수업 참관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해도 될지 나 자신도 확신이 없었지만, 일단 그 곳의 어학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나의 상황을 설명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달리 손 쓸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저 물어보는 건 나쁠 것도 없지. 게다가 내가 손해 볼 일도 아니고’ 하며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먹고 그 어학원에 전화로 먼저 문의를 했다. 영 싫다고 하면 나의 영어 교사 경력을 내세우며 교실 관리와 같은 허드렛일이나 복사해주는 일 이런 것 등을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고 어필할 계획이었다.
❚전문가적 예의?
의료계, 법조계 등과 같은 전문직 업종에는 ‘Professional Courtesy (전문가적 예의)’라는 관행이 있다. 그 업계의 연수생들이 현장의 경험을 쌓기 위해 무료로 그 직업 현장에 들어가서 실질적인 경험을 하도록 하는 관행이다. 이것이 교육계에도 전파가 되어서 전문 교육기관들은 교생들이 수업 참관과 수업시연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다. 물론 법적 강제성이 없기는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그런 에티켓에 관한 것은 법보다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그런 아름다운 관행이 있는 지 처음 전화로 문의 할 때는 몰랐다. ‘그저 부딪쳐서 해보고 안 된다고 하면 말지’하는 마음 뿐 이었다. 운 좋게 나는 그 곳 어학원장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놀랍게도 한 푼도 내지 않고 나는 그 2개월간의 모든 ESL수업을 참관할 수 있었다. 그것도 그곳의 모든 교사들의 수업을 골고루 다 참관하는 특혜까지 누렸다. 강사들 마다 참 색깔이 다양했다. 역시나 그곳에도 그저 시간을 떼우는 강사와 열의를 다해 가르치는 강사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부류 모두에게 골칫덩어리는 비자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을 형식적으로 다니는 학생들이긴 했다. 대놓고 수업 중에 엎드려 있기까지 하는 성인 학습자들이 간혹 발견되었는데, 강사들에게 그들은 참 머리 아픈 존재였다.
❚현지 ESL 수업 참관 포인트 3가지
2개월간의 수업 참관 대장정의 첫날부터 교실 맨 뒤 의자에 앉아서 그저 참관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아무런 루틴이 없이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참관만 하면 그 세월도 참 지루할 것 같았다. 비록 우연히 쉽게 얻은 기회이긴 하지만 베푼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해서 최대한 성실하게 그 시간을 활용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내 나름대로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수업들을 참관해 보기로 했다.
1. 수업의 전반적인 프레임
교사가 그 한 시간 수업의 흐름을 어떻게 잡는 지, 어떤 활동들로 그 수업의 전체 프레임을 잡는 지였다. 영어 교사로서 이 부분은 상당히 관심이 가는 분야였다. 같은 내용을 가르치더라도 적절한 활동 선택과 그 활동의 순서 배열은 소위 전문가의 식견이 필요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2. 원어민들의 다양한 영어 표현법
영어 학습자로서 그 원어민들인 영어 강사들이 구사하는 수많은 영어 표현들을 받아 적어 보기로 했다. 하루는 한 강사분이 나에게 ‘뭐를 그렇게 적냐’고 물어 온 적도 있었다. 늘 맨 뒤에서 무언가를 받아 적고 있으니 그 사람들도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3. 다양한 국적 학습자들이 수업 중 보이는 행동들
어른 학습자이긴 하지만 그들 사이의 어떠한 배움이 일어나는 지에 관해 관찰하는 것이다. 강사의 역량에 따라 배우는 학습자들의 반응과 태도는 사뭇 달랐다. 특히 그 학습자들은 여러 국적의 외국 유학생들이기에 나는 아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학습자들은 여전히 남녀가 같은 조에서 활동하는 것을 꺼려했다. 하루는 조별로 벽에 붙은 문장을 빨리 읽고 조원에게 말해주는 활동을 하는 데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학생들 사이에 뭔가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다. 상대 팀의 남학생이 벽에 붙혀진 영어 문장을 보러 가면 여학생들은 그저 그 남학생이 자기 자리로 갈 때 까지 그 벽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나로서는 참 의아스러운 광경이었다.
❚우연한 곳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매 시간 수업 참관은 나에게 조금도 지루함이 없었다. 그 2개월 동안 나는 지금도 친언니처럼 지내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중3아들을 데리고 관광비자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국한 그 분은 그 5년간 학생 비자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참 아들을 위한 눈물겨운 희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 분을 만났을 때 그 아들은 미국 대학교에 입학을 한 직후 무렵이었다. 다행히 그 즘에 그 분의 남편이 그 동네 회사로 전근을 오시게 되어서 더 이상 학생 비자를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내가 그분을 만난 그 학기가 미국에서 학생으로 머무는 마지막 학기였지만 늘 반듯하게 앉아서 수업을 열심히 들으셨다. 또 그 곳의 강사로 일하던 백인 선생님은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 교사를 하다가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 선생님 가족과도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도 초대하는 그런 사이로 가까워 졌다. 그렇게 우연히 문을 두드린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까지 만나게 되었다.
❚성인 학습자 가르치기 VS 한국 중딩 가르치기
기나긴 수업 참관의 의무 시간을 다 마칠 때 즘에는 실제로 그곳의 성인 학습자들에게 나도 영어 수업을 시연했어야 했다. 지도교수님도 한 시간 운전을 해서 그곳에 오시고 나름 준비를 좀 한 영어 수업이었다. 이미 친분이 있게 된 학생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성인 학습자라 그런지 한국에서 일반 중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 보다 훨씬 수월하게 수업을 마쳤다. 누구하나 떠들거나 내 말을 무시하는 학생이 없이 하나같이 열심히 활동에 참여하고 참 흐뭇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나의 교생실습은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혹시나 영어 강사로 일할 수 있을 지도?
기나긴 교생 실습을 끝내고 성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진지하게 그곳에 ESL강사로 정식 취업을 하려고 지원까지 했었다. 그 이전 학기에는 한 시간 운전을 해서 가야하는 본 캠퍼스에 영어 강사로 일을 했었다. 비록 학생 비자 신분이지만, 이름이 같은 분교라 어쩌면 이곳에도 교내 취업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적용 될 수 있으리라 내심 기대를 하며 지원을 했다. 하지만, 면접까지 다 통과를 했으나, 결국 학교 행정처로부터 이 분교 캠퍼스는 엄연히 타교육기관이라 나의 학생 비자로는 취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쉽지만 나의 교생 실습으로 시작된 그 어학원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두 번 다시 올 미국이 아니라면 미련을 남기지 않기
영어 표현 중에 ‘To leave no stone unturned’가 있다. 영영사전의 뜻풀이는 ‘to do everything possible to find something or to solve a problem (무언가를 찾거나 문제를해결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해보기)이다. 나는 이 영어 표현을 늘 마음에 담아두곤 했다. 두 번 다시 올 미국이 아니기에 있을 동안 뭐든지 다 해보고 조금의 미련이라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계획대로 살던 타운의 어학원에 취업을 하지 못 했지만, ‘그 또한 더 나은 방향으로 나를 이끄는 절대자의 뜻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모든 돌을 다 뒤집으려는 마음의 자세로 살아갈 뿐이다’라고 또 한 번 마음을 다독였던 기억이 난다.
❚Paying Forward (앞으로 갚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중학교 영어 교사 일을 한 지도 거의 2년이 다 되어 간다. 미국에서 했던 나의 교생 실습이 아련히 떠오르는 5월이다. 나는 교생을 지도하는 담당교사로 지원했다. 올해는 2명의 영어 교사 지망생들이 교생 실습을 하러 우리 학교에 오셨다. 미국에서 교생실습을 하면서 그 현지 영어 강사들에게서 받은 은혜를 비록 다른 사람이지만 갚을 수 있는(‘Paying Forward’)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현지 영어 강사들처럼 멋지게 ‘Professional Courtesy’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시도를 해 보려한다.
❚겸손해도 너무 겸손한 두 교생 선생님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히려 내가 젊은이들과 함께 일 하는 것을 더 즐기는 것 같다. 언제든 인생의 푸릇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게다가 그 두 교생 선생님은 겸손하기까지 하다. 다가올 주부터 맡게 될 영어 수업을 미리 계획하고 의논하는 미팅에서 두 분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참 귀담아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녹음해도 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열심히 내 말을 받아 적고 녹음까지 하는 모습에 ‘내가 그렇게 대단한 뭔가가 있던 사람인가?’생각하면서 잠시 민망해졌다. 긴 미팅을 끝내고 내 자리에 와 있는데 퇴근 전에 갑종 수업을 맡은 남자 교생 선생님이 나에게 또 확인하러 왔다. 아까 내가 추천한 수업의 시퀀스가 이게 맞는 지 확인을 받으러 왔다. 나는 내심 ‘아이고~ 이 일을 어째?’ 하며 황당해 했다. 그냥 추천을 한 것 뿐 인데 무슨 절대적 명령이라 되는 냥 그렇게 토시하나 안 빼고 수업 지도안에 나의 말을 다 넣었다. 아직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 뭐라 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저 ‘잘 하셨어요. 이렇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냥 선생님께서 마음 편히 하시기만 하면 다 잘 될 거예요’ 하고 응원을 해줬다. ‘평생 처음으로 해야 하는 수업이니 마음이 얼마나 두려울까’ 생각했다. 아마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것 같다. 그렇게 애를 쓰는 모습이 기특 하기도하고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멋진 영어 교사되시길
가르침에는 절대 한 가지 길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배움과 경험이 밑바탕이 된 자신의 교육 철학이 있는 가르침을 하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 교생 선생님들이 영어를 가르치는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는 훌륭한 영어교사가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