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롭게 극복하려고 애쓰는 중
❚저도 우리 집 귀한 딸이에요.
유독 봄에는 가족과 관련된 행사가 많이 있다. 시부모님 생신이 3월 4월에 있다. 그리고 내 생일과 남편 생일도 3월이다. 축하해주고 축하받을 일이 많은 기분 좋은 날인 생일이 많은 봄 인데, 해마다 봄만 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20년 전 결혼한 첫 해 나의 생일이 다가오는 봄에 하루는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남편 생일보다 니 생일이 먼저니 니 생일을 챙겨 먹지 말아라’라고 나한테 진지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니가 남편 앞길을 막을 수 있으니 니 생일을 챙겨먹지 말거라.’ 뭐? What? 난 그 당시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그 당시 겨우 26살의 어린 며느리였던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x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저도 우리 집에서 귀한 딸인데, 왜 제가 제 생일을 챙겨 먹으면 안 되는 거죠?’하고 나름 대들었다. 그랬더니 내 말은 싹 무시하고 그저 ‘어디 물어보니 니 생일은 안 챙겨 먹는게 남편한테 좋다하더라. 그래 알고 있어라’하며 시어머니는 내 말을 일축해 버렸다. 그리고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시어머니는 나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전화도 조금의 용돈 같은 것도 일절 건 낸 적이 없었다. 반면, 해마다 남편 생일이 다가오면 ‘00이 생일이 xx일 맞제? 00이 생일에 미역국이라도 끓여줘라~’하고 전화로 신신당부를 한다. 심지어 우리가 미국에 살 때에도 시어머니는 그 전화를 빠트린 적이 없었다. 귀하신 당신 아들 생일이니 혹여나 미역국을 못 얻어먹을 까봐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더 아이러니 한 건 시어머니 본인 생일도 시아버지 생일 보다 앞에 있다. 그런데 해마다 집안 큰 행사인 듯, 멀리 다른 시에 사는 두 시누네까지 총 출동해서 모여 시끌시끌하게 시어머니 생일을 축하했다. ‘이건 뭐지?’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시집온 내내 나의 생일은 쭈욱 무시되어졌다. 혹여나 남편이 소위 '대단한 직업군'에 속해 있고 재력이 엄청난 시댁이라면 속된 말로 ‘내가 모든 것을 그 돈하고 바꿨다’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나의 시댁은 그저 평범한 시골의 농사짓는 여염집인데다가 남편의 직업군은 '대단한 직업군'에 속하지도 않는다.
❚앗! 그만 눌러서는 안 되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5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나서 남편과 나는 다시 예전의 일상을 찾기에 분주한 2년을 보냈다. 다시 예전의 직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나와 달리 남편은 다시 예전에 하던 개인 비즈니스를 새로이 처음부터 시작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예전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오랜 유학 기간 동안 나와 아이들 뒷바라지를 묵묵히 해준 남편이었기에 나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의 쪽이든 남편 쪽이든 부모를 만나고 오는 날에는 나의 긍정적이던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고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던 차에 급기야 우려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코로나에 대한 규제가 많이 완화된 시기라 우리는 이번 어버이날을 그냥 넘어가기 뭐 해서 음식을 사서 형님네하고 시댁에서 모이기로 했다. 형님은 오리백숙을 사가고 우리는 회를 사서 같이 시댁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비싼 회이기도 하거니와 회로 점심을 할 건 아니었기에 회를 아주 넉넉히 사가진 않았다. 그런데, 형님네가 좀 늦어져 우리가 먼저 시부모님과 회를 먹어야 했다. 먼저 먹는 입장에서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회 한 점 안 남기고 다 먹자니 경우가 아닌 것 같아, 나는 회를 조금 덜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러다 보니, 식탁에 차려진 회의 양이 넉넉하진 않았다. 회를 엄청 좋아하는 시부모는 많이 안 드시는 눈치였다. 얼마 안 되는 회를 다 먹고, 다들 그저 덩그런 식탁에 둘러 앉아 오리백숙을 가져 올 형님네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이 어버이날이든 뭐든 나는 ‘콩 한쪽도 나눠 먹어야지’하는 생각에 냉장고에 넣어둔 회를 다시 꺼내 오진 않았다. 나중에 도착한 형님과 조카는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거의 안 먹었다. 결국 어버이날인데 정작 시부모님은 회를 거의 못 드시고 아주버님 혼자 남은 회를 실컷 먹게 만든 꼴이 되버렸다. 게다가 ‘소주까지 사왔어야지’하는 밉살스러운 말까지 해가면서 회를 먹는 모습에 남편은 화가 좀 났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남편의 속내까지는 몰랐다. 그날 저녁 영 마음이 안 풀렸던지 남편이 다시 그 회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 말을 듣자하니 결국 내가 회를 움쑥 덜어서 냉장고에 넣은 게 잘못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러게 당신이 돈 좀 잘 벌어왔으면 그 회 실컷 배터지게 먹도록 사갔을 거고, 그러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 라고 그만 눌러서는 안 되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말을 내뱉고 바로 나는 후회했다. ‘앗! 이를 어째?’ 하지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나는 그저 창밖만 바라봤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날 저녁에 알게 된 일이지만, 최근에 형님이 로또에 당첨되어서 500만원 상금을 탔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점심은 형님네가 한 턱 내려고 했다는 거였다고 남편이 말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우리도 어버이날인데 뭔가를 해가야 면이 서겠지’하면서 우기다시피 해서 사갔던 거였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형님이 로또에 당첨될 그 즘에 나와 우리 아이들은 코로나에 “당첨”되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였고 일은 꼬여갔다. 남편이 일전에 나에게 말을 했다고 했는데, 사실 코로나에 걸린 나는 남편에게 옮기지 않으려고 최대한 남편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시기였기에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자로 시작되는 말이 나오면 나는 살짝 내 귀를 반쯤 닫고 듣는 버릇이 있다. 20년간 결혼 생활로 생긴 나의 생존법이다. ‘니 생일은 챙겨먹지 말거라’하는 시어머니 말을 귀담아 듣고 살았다가는 마음의 홧병이 생겼을 것이다.
❚미국 유학 후유증
유학을 다녀와서 우리가 예전처럼 경제적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나의 자격지심 때문일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저런 이유로 인해 나는 시댁만 가면 내 키가 삼분의 일은 줄어든 느낌이다. 그렇게 마음에 소용돌이가 또 한 바탕 일렁이면 나는 유학을 결심한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 마냥 마음이 불편하다. ‘지난 5년간 내가 어떻게 달리 했어야 했던 건가?’하고 자꾸 되내이게 된다. 아무리 되돌아봐도 유학 시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 헤쳐 나갔고 살아서 돌아왔다는 생각에 나는 내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지지만, 정작 나의 아빠와 시부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형님은 운 좋은 여자로 로또도 당첨되는 데, 막내 며느리는 ‘고생도 사서하는’ 희한한 여자로 비치는 것 같아 속이 너무 상했다. 주변의 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정신없는 직장맘의 일상을 살고 있는 나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건데?’ 하는 반항심마저 들게 된다. 사춘기의 심드렁함이 자꾸 나를 찾아온다. 그런데 나는 대한민국 교사이고 유학씩이나 다녀온 교양이 있도록 기대되는 신여성(?)이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멀리 하고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생존을 위한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유학을 다녀온 이후로 나는 부모든 시부모든 거리를 두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내가 부모를 기피하는 못된 자식처럼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또 한편 스스로 가지게 되는 자격지심 때문에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이일을 어떻게 하지?
학교에선 적어도 나의 경험이 유용하게 쓰인다. 그래서 난 기분이 좋다. 열심히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때면 행복함을 느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다시 마음이 다운된다. 특히 주말에 시부모나 나의 아버지를 만나야하는 주는 더욱 그렇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도 딱히 현실적 방법이 없다. 부모가 원하는 부분은 나의 재정상태가 나아지는 것이지만, 나의 재정상태가 갑자기 좋아질 수도 없다. 유학가기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자면 유학을 다녀온 것 때문에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건 사실이다. 그런데, 부모 눈에는 그 부분이 더 크게 보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분들 앞에서 내 마음은 자꾸 더 꼬여만 간다.
❚유학 후유증 덜어내는 방법 1
마음이 무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내가 평상시 즐겨 찾아보는 자기 계발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습관?’이라는 영상이 내 눈에 띄였다. 그 영상에 출연한 게스트는 소아 정신과 의사로,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매일 4가지 측면(자신, 주변사람, 물질, 경험)에서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라고 말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는 더 이상 어떤 마음의 미동도 되지 않을 만큼 아주 흔하디흔한 말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4가지 측면들, 특히 ‘경험’이라는 부분에 대해 감사할 것을 찾아라‘는 말은 색다르게 들렸다. 나의 유학에 대한 선택과 그로 인해 겪은 나의 경험은 어쩌면 또 다른 ’나‘라고도 할 수 있다. 쉽게 내린 결정도 아니었고, 쉬운 유학시절도 아니었지만, 나는 용기를 발휘하여 갖게 된 나의 경험을 스스로 칭찬해주기는 커녕 ‘유학을 왜 가서 그렇게 애를 먹었니?‘하고 나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보다 주위의 사람들 편에 서서 나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몰입하느라 내가 감사함을 느껴야 할 많은 것들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함을 가지지 못 한 건 사실이다. 그 유튜브 영상을 다 보고, 마치 고백이라 하듯이 나는 그 네 가지 측면에서 내가 감사함을 느끼는 부분을 생각해봤다.
1) 자신
나 자신에 관한 것 중에 감사할 만 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의 능력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곳에서 내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내가 사서한 고생들로 인해 늘어난 나의 능력을 내가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참 감사할 일이다.
또 하나 나에 대해 감사할 일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전히 유학 후유증으로 허덕이고 있지만, 그래도 기도하며 하소연하고 기도하며 도움을 구한다. 바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내 마음에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참 감사하다.
2) 주변사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딸, 아들, 그리고 묵묵히 매일을 살아가는 남편, 언제든 아줌마 토크가 하고 싶으면 불러낼 수 있는 친언니와 친여동생, 이방인으로 겪은 나의 유학시절 고충과 현재 겪고 있는 유학 후유증을 언제든 100% 공감해주는 원어민 선생님과 유학시절 나의 한국어 제자였던,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 유학 중인 인도 친구, 멀리 있지만 나의 멘토 레인 할머니, 그들이 늘 내 곁에 있어주어서 참 감사하다.
3) 물질
내가 오늘 하루치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 5년간 미국 유학 기간 중에 절대적 빈곤층의 고충을 살짝 느끼던 시기가 있었다. 당장의 집 렌트비와 생활비가 궁해진 시절이 있었다. 돈이 여유로워서 갔던 미국 유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절대적 가난을 느끼며 산 적이 있었다. 조교로서 작지만 매달 나오는 월급이 있었지만, 그 마저도 6월 7월은 아에 그런 월급이 없다. 그래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초4학년 여학생에게 수학과 한국어를 가르치고 점심도 먹이는 소위 가정교사이자 베이비시터를 하며 여름방학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내 상황은 참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See the birds of the sky, that they don’t sow, neither do they reap, nor gather into barns.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n’t you of much more value than they? - Matthew 6:26 -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새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 마태복음 6:26-)
Therefore don’t be anxious for tomorrow, for tomorrow will be anxious for itself. Each day’s own evil is sufficient. - Matthew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마태복음 6:34-)
4) 경험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마음의 불편함은 지난 5년간 유학을 가기로 한 결정에서 비롯된 건 사실이다. 비록 남편의 희생이 따랐던 기회였지만, 미국 생활 기간동안 겪은 수많은 좋거나 나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한 모든 것들은 우리 가족 전체에게는 분명 가치로웠던 경험이다. 초등학생이던 우리 딸과 아들은 어린이들답게 매일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질 만큼 친구들과 잔디밭에서 뛰어놀 수 있었다. 그런 활동을 통해 영어를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서 한 경험은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심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의 그 시간들은 나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투자한 것이다. 그것은 후회할 경험이 아니라 용기 있게 해낸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무사히 끝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후유증 덜어내는 방법 2
오랜 기간 준비했고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5년간 유학시절을 그냥 세월에 묻혀 없어지기 전에 글로 남기고 싶은 나의 욕심으로 시작된 브런치 글쓰기가 이젠 나의 새벽 루틴이 되었다. ‘글을 써서 뭐에 쓸건 데?’ 하면 난 당장 답을 할 수 없다. 당장 내가 글 하나를 써서 발행 버튼을 누른다고 그게 경제적 이익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글을 쓴다. 내가 생각하는 브런치 글쓰기의 유익은 두 가지이다.
1) 덜어내고 객관화할 수 있다.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오히려 내가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나의 경험을 기록하면서 뭔가 마음의 어수선하게 헝클어진 것들이 차분히 결을 잡고 정리되는 느낌을 가지게 되어 좋다.
5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내 마음은 참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힘들게 다녀온 미국 유학이지만 마치 아련한 꿈 속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내 마음은 참 어수선했고 내가 그동안 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라는 회의감마저 생기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 무렵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시작한 브런치 글쓰기는 기대 이상으로 나에게 참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었다. 나의 유학 이야기를 글로 적음으로서 나의 경험을 좀 더 객관화할 수 있었다. 더불어 나의 생각 정리도 함께 되어 갔다. 유학과 관련된 많은 마음의 고충들을 글로 쓰면서 내 마음의 짐을 한껏 덜어낸 것도 사실이다.
2) 커뮤너티가 나에게 위로가 된다.
유학에 관한 나의 블런치 글에 많은 작가님들이 공감을 해주시고 댓글까지 해주셨다. 나의 경험과 나의 존재가 뭔가 의미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또한 그런 커뮤턴티의 멤버로서 여러 나라에 사시는 작가님들, 여러 연령층의 작가님들 모두 다 자신의 소중한 경험들이 담긴 글 읽기를 참 즐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의 글을 발견하는 날에는 나와 닮은 새로운 친구 한명을 사귄 듯이 반갑다.
피곤한 일상이지만 이른 아침 나의 경험을 글로 쓰고 이를 브런치에 발행 버튼을 누르고 출근하는 날은 참 상쾌하다. 퇴근 후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분 좋은 약속이 있는 날처럼 하루가 즐겁다. 브런치 앱에서 내 글을 읽고 새로이 만나게 될 작가님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감이 나의 하루를 즐겁게 만든다. 브런치 앱에 글쓰기로 한 나의 결심은 참 잘한 일이다.
미국 유학 후유증은 이따금씩 앞으로도 나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난 나를 둘러싼 것에 대한 감사함을 발견하고 사소한 나의 생각일지라도 브런치에 글로 정리하며 슬기롭게 이 시기를 보내려고 한다. 그 후유증이 사라질 그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