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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엄두내기와 박사학위의 상관관계

: ‘이래서 못해 리스트’

by Hey Soon

❚엄두와 염두


‘엄두’는 흔히 부정적인 말과 쓰여, ‘감히 무엇을 하려는 마음을 먹음 또는 그 마음’을 뜻하는 말로, '나는 그 일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그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성두 어머니는 엄두가 나서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염상섭, 복≫'와 같이 쓰입니다.


한편 ‘염두’는 ‘생각의 시초’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저 멀리 여객선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지만 너무 멀어서 소리쳐 불러 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와 같이 쓰일 수 있고, ‘마음속’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염두에 두다/그날 이 우물가에서 본 슬픈 광경 하나가 염두를 떠나지 않는다.≪김소운, 일본의 두 얼굴≫'와 같이 쓰입니다. (출처: 국립국어원 사전)



결국, 엄두는 심리적인 마음의 시작인 것이고 염두는 이성적인 생각의 시작인 것이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과 ‘염두가 나지 않는다’는 함께 간다. 마음과 생각은 늘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마음 따로 생각 따로 일리가 없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일이나 어려운 일을 시작하려 할 때 ‘마음 속 시작’과 ‘머릿속 생각의 시작’ 모두를 어려워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갈래의 두려움은 그대로 두면 서로서로 똘똘 뭉쳐져서 더욱 더 커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마음 속 시작’이라는 단계와 ‘머릿 속 생각의 시작’은 참으로 하기 힘든 단계이다. 그리고 그대로 묵히면 두려움이 더욱 커져버린다. 그래서 어떤 일이 하고 싶거나 해야 할 때는 두려움이 생기더라도 바로 시작해버리는 게 더 낫다.


그럼, 마음의 시작과 생각의 시작 중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의 시작을 먼저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마음의 시작은 더 복잡하고 구체화 시킬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가 생각의 시작을 먼저 하게 되면 마음의 시작도 저절로 이루어 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생각의 시작을 하지 않으면 절대 마음의 시작도 생길 리 없다.


❚엄두가 나지 못한 이유 있는 대로 다 적어보기


미국 유학 시절, 특히 박사과정 중간을 넘어섰을 무렵, 박사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을 엄두를 내는 데 참 오랜 시간이 들었다. 어느 날 곰곰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박사 논문을 엄두 내지 못하는 가지가지의 이유들이 있었다.


박사 논문은 보통 120쪽 정도인데, 그 어마어마한 분량이 무서웠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써야한다는 부담이 엄청 컸다.

박사 논문 씩이나 되니 뭔가 가치로운 것을 연구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박사 논문을 다 완성하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절차들을 모두 다 빠짐없이 밟아야 하는데, 솔직히 무엇 하나라도 중간에 놓칠까봐 두려웠다.


아이 둘의 엄마이니, 아이들 뒷바라지가 우선순위 0번 이어야 한다, 논문을 쓰면 아이들을 잘 챙겨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학교와 집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으니, 그 세세한 절차를 밟으러 왔다 갔다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라 너무 에너지가 많이 들 것 같았다.

‘박사학위 딴 다고 내가 교수가 될 것도 아닌 데, 내가 뭐 하러 그 짓을 해?’ 하고 빈정거림도 올라왔다.


❚끝없는 핑계 리스트

그렇게 끝없는 리스트를 적었다. 그리고는 곰곰이 하나하나를 따져 물었다. 결국 그것들은 합당한 이유라 하기에는 근거가 없었다. 그냥 새로운 일을 거부하려는 본능에 충실한 변명일 뿐이었다. 게다가 모두 부정적인 상황을 상상하며 내가 머릿 속으로 만든 상상 속의 걱정이었다. 이렇게 마음의 시작 즉 엄두를 못 내는 이유들은 대부분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없애거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꾸기에는 힘이든다. 그래서, 박사 논문을 쓸 마음의 시작,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노교수님의 논문연구 첫 강의 시간

미국 대학교 박사과정 끝 무렵 왠만한 코스워크(필수 및 선택 강좌)를 다 이수하고 나면, 논문연구라는 과목을 듣도록 되어있다. 이 수업은 대부분 논문을 각자 쓰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논문 쓰기에 관해 필요한 절차적 지식이나 방법을 교육받는 시간이다. 그 논문 연구 수업 첫날, 나는 얼마나 대단한 비법을 우리에게 알려 줄지 내심 큰 기대를 했다. 그 첫 수업준비물은 각자 관심 분야의 논문을 한 부씩 가져오는 것이었다. 수많은 영어 교육관련 박사 논문 중 고심 끝에 언어학습 동기에 관한 논문을 한부를 출력해서 가져갔다. 그리고 요약해서 설명해보라나 하지 않을 까 싶어서 살짝 요약해보는 연습도 미리 해두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각자 들고 온 논문의 서론(챕터 1)의 쪽수를 돌아가며 말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숫자를 쭉 적더니 맨 아래에 평균쪽수를 적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챕터도 마찬가지를 했다.

결국, 그날 계산한 각 챕터별 평균 쪽수는 대충 아래와 같았다.


Chapter 1 (Introduction 서론) : 11 pages

Chapter 2 (Literature Review 선행연구) : 48 pages ( 소제목 8개, 각 소제목별 6쪽)

Chapter 3 (Method 연구 방법) : 13 pages

Chapter 4 (Findings 연구 결과) : 18 pages

Chapter 5 (Conclusion 결론 및 제언) : 13 pages


박사 논문은 하나의 큰 덩어리이지만, 각 챕터별로 나누어 보면 결국 5개 챕터이다. 그리고 두 번째 챕터도 하위 제목으로 나누면 각 하위 제목 마다 6쪽 씩만 쓰면 된다는 말이다. 각각의 챕터를 보면 최대로 13쪽 정도의 글만 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것들을 다 묶기만 하면 논문 하나가 된다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눈으로 확인을 하고 나니 뭔가 느낌이 달랐다. 석사, 박사 과정기간 동안, 수많은 과제들을 한 경험으로 볼 때 최대 13쪽 분량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논문 연구 수업 첫날, 심플한 그 쪽수 계산을 한 행동은 참 보잘 것 없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그렇게 조각내기를 하고 나니 생각의 시작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날 과제는 논문 목차를 완성해오는 것이었는데 그날 수업이후 나는 일단 나중에 수정할 지도 모를 논문 목차를 써내려갔다. 목차는 말 그대로 전체적인 흐름을 잡는 소제목들이다. 구지 힘들게 이것저것 조사해보고 쓸 그런 일이 아니다. 상식선에서 나의 토픽을 향한 전반적 개괄을 잡는 것이니, 한 숨에 쓸 수 있다. 그렇게 스텝 1,2,3을 하면서 생각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그러고 나니 마음속에서 조금씩 ‘어쩌면 이일을 해낼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빛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음의 시작이 슬며시 찾아왔다.


✔엄두내기 Step 1: 목표한 일을 덩어리째 보지 말고 종이에 조각내어 할 일의 순서 정하기


✔엄두내기 Step 2: 한 번에 한 조각씩만 생각하기


✔엄두내기 Step 3: 시작이 반이니 시작부터 하기


❚박사학위 뭐에 쓸고?

친하게 지내던 그 대학교 한국인 교수님께서 갈팡질팡 마음을 못 잡는 나에게 어느 날 “교육계에 몸을 담그면서 앞으로도 살 것이니, 당연히 박사학위는 두고두고 쓰임이 될 것이에요”라고 말을 해주셨다. 많은 경험을 가진 그분의 말씀이 그날 나에게 아주 크게 들렸고, 나는 그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생각의 시작’과 ‘마음의 시작’을 하고 나서부터는 계속 긍정적인 이유에 초점을 두려고 노력했다. 머릿 속에 ‘박사 학위를 따서 뭐에 써?’하는 부정적 생각보다는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얻게 될 배움의 경험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 공부하러 왔으니 끝까지 다 해봐야지하는 마음이 들었다. 평생 마지막이 될 이 기회를 100% 활용해봐야지 싶었다. 그 박사학위가 나중에 어디에 쓰일지 알길이 없으나, 그건 일단 따고 나서 나중에 궁리해보자싶었다.


"If you are hesitating between doing and not doing, take the risk of doing."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사이에서 머뭇거린다면, 하는 쪽으로 리스크를 걸어라)

- Alejandro Jodorowsky (영화감독)-


논문의 목차와 세부 목차는 내용적인 순서를 말해주었다. 거기에 따라, 매일 실제 해야 할 것을 다이어리에 메모했다. 예를 들어 ‘언어 학습 동기에 관한 논문 3개 찾아서 주요 내용, 요약해서 정리하기’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120쪽에 달하는 논문 전체를 언제 다 써?’ 하는 생각은 그만 하고 그저 매일 해야 할 작은 덩어리의 일만 집중하고 그걸 해내갔다. 결국 매일의 일들이 엮어져서 마지막 피니쉬라인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의 시작’과 ‘생각의 시작’을 한 이후로 마음의 파도가 날 덮치지 않고 순풍을 탄 배처럼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브런치의 매거진 발행도 박사논문처럼

현재 저는 브런치에 [찐경험으로 터득한 영어 공부법]이라는 매거진을 발행하려 합니다. 일단 엄두를 낸 상태입니다. 즉 ‘마음의 시작’과 ‘생각의 시작’을 한 것이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두 가지 시작이 동시에 다 이루어 진 것은 아닙니다. 일단 저는 그 매거진의 여는 글과 목차를 먼저 발행했습니다. ‘생각의 시작’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앞으로 저는 한 항목씩 글을 써내려갈 예정입니다.


기대컨대, 아마 차츰 저의 ‘마음의 시작’도 시나브로 생기겠지요? 어쩌면 여러분의 공감 이모티콘(하트)이 그걸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줍짢은 저의 글이지만 혹시 공감이나 도움이 되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하트’를 부탁드릴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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