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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무 어메리칸 스타일?

: 뜬금없는 일

by Hey Soon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지 만 2년

지난 6월 26일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정확히 2년이 되는 날이었다. 5년의 세월 공백을 넘어 다시 살던 내 나라로 온 그 느낌은 참 야릇했다. 내가 살던 미국 남부는 산이 없이 그저 평지만 끝없이 이어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 적응이 된 나의 눈은 사방을 둘러싼 산들이 그저 신기할 뿐 이었다. 내가 살던 그 미국 동네는 고층 빌딩이 없는 평범한 중소 도시였다. 하지만 다시 찾은 내 나라, 내가 살던 동네는 그 5년 사이 눈이 휘둥그레 질 만큼 고층 아파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을 혼자 도둑맞은 기분이랄까?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세상이 완전히 변해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변한 나와 변한 세상 정면으로 마주치다

사실 지난 5년 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나 자신도 많이 변했음에 틀림이 없다. 5년의 학업도 학업이지만, 새로운 곳에서의 삶은 기어코 나를 변화시켰다. 그렇게 변한 나와 변한 세상, 그 둘을 서로 조율하기란 쉽지 않았다. 변한 내가 변한 세상을 딱 정면으로 마주보기를 한 지 2년이 흘렀다. 지난 2년은 또 다른 종류의 적응을 요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변한 이곳에서 내가 이제 무얼 하면 좋을까’ 하는 질문은 늘 나를 찾아왔다. 당장은 내가 이전에 하던 교사의 길로 다시 복직할 테지만, 그저 5년의 세월을 무의미하게 만들면서까지 이전의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해외 박사 출신인데 중학교 교사로 돌아가는 게 뭔가 부끄러운 일 같이 여겨졌다.


별로 없는 인맥이지만, 귀국하기 한두 달 전 학계에 있는 대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을 했었다. 귀국 후 현직 교수님들도 몇 분 만나 뵈었었다. 대학교에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 타진도 해보았다. 하지만 사범대학교나 인문대학교의 상황이 날로 악화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결국 내가 가야 할 길은 대학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열정 페이를 하며 대학가에서 경력을 쌓아올리기에는 이미 답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나의 두 아이의 한국 학교 적응도 쉽지 않기에 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의 발버둥은 그렇게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발길질이 되어버렸다.


❚예전의 그 자리에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서기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난 후, 교사로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했다. 다시 교사로 돌아와 일을 하다 보니 그간 잊고 지냈던 보람과 재미도 솔솔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국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는 절대 느끼지 못한 정이라는 감정을 우리나라 아이들과는 쉽게 키울 수 있었다.


나의 5년간 유학은 겉으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배움으로 취부 되지만, 그 유학의 경험 덕분에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보다는 좀 더 넓은 시야로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진 교사가 되었기에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세상이야기 거리가 더 많아졌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천만 다행

작년 우리 반에는 유독 진학과 진로에 고민이 많았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이 힘들 만큼 성적도 아주 하위권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돈을 벌고 싶고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을 키우고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아이었다. 중3 첫 학기에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지나친 거리감에 무기력함과 우울감을 심하게 느꼈다, 심지어 자해행위까지 하는 날도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꿈을 응원해주었고 절망하는 그 아이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와 퇴근 후 전화통화도 자주 한 기억이 난다. 결국, 그 아이는 인문계 진학을 하지 않고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 후 학교생활을 아주 즐겁게 하고 있다고 했다. 진로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고 매일 열심히 그 꿈을 위해 한 발 한 발 나가고 있다고 어머니께서 전해오셨다. 대부분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졸업과 동시에 모든 인연을 끊는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내가 너무 고마웠다며 다시 인사를 하러 오셨다. 내가 그 아이의 마음을 잘 잡아 준 덕분에 힘든 중3시절을 잘 보냈고 지금은 학교생활을 너무 잘 하고 있다고 하셨다.


❚오지랖 발동

또 몇 주 전에는 우리 반 한 학생과 옆 반 학생이 미국, 캐나다 같은 곳에 조기유학을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당당한 대한민국의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한 후 유학을 가는 것이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올바른 배움과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나는 나의 일인 양 그 아이들을 부여잡고 현지에서 학교생활이 어떤 지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니 만큼 아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국제 미아가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미국 유학에서 얻은 나의 배움을 어디에 쓸까?

사람의 배움과 경험은 뇌에서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오롯이 나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나누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 잘, 더 많이, 더 보람되는 방향으로 나눌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적어보았다. 결국, 나는 내가 가진 경험과 배움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를 남들에게 먼저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케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위 네트워킹 또는 인맥 넓히기는 해야겠다 싶었다.


❚미쿡에서는 이렇게 하는 게 답이었다.

미국에서는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담당자에게 제일 먼저 이메일을 보낸다. 필요하다면 그 담당자의 윗분을 참조에 넣고 이메일을 보낸다. 석사 첫 학기에 대학원 학과장에게 이메일을 써서 외국인 유학생에게도 성적 우수 장학금 같은 걸 달라고 요구할 때에도 내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이메일로 전했다. 여름 방학 중 등록금을 내고 인턴쉽을 해야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있었을 때에도 나는 여지없이 대학원 총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5,600불(인스테이트 학비) 내야 인턴을 할 수 있고 그 노동의 댓가로 겨우 3200불(인턴 월급)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 해서 1400불 손해보는 이 어이없는 사태를 이메일에 쓰고 등록금 면제를 요청했다. 다행히 나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등록금 면제를 받게 되었고 덕분에 여름 방학 기간 동안 한국어 캠프의 전임 강사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해결을 위해 나는 언제든 이메일을 잘 활용했다. 이메일로 해당 의사 결정권자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너무 어메리칸 스타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곳이 미쿡이 아닐지언정 같은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내가 도움이 주로 될 만한 학교는 국제고등학교나 외국어 고등학교와 같은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있는 도시의 국제고와 특목고 교장, 교감 선생님께 메신저로 서신을 보내드렸다. 나의 이력을 설명하고 보잘 것 없지만 위블리라는 사이트에서 만든 나의 이력이 있는 e-포트폴리오의 링크를 달고, 나의 브런치 링크도 달았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의 진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부분을 설명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난 하고 후회하는 편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나의 아이디어를 듣던 남편이 나에게 너무 괜찮은 생각이라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남편은 나의 메시지 글을 아주 꼼꼼히 검토해주었다. 너무 무례하게도 들리지 않게, 너무 애매모호하지도 않게, 그러나 자신감있는 어조로 글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늦은 밤까지 쇳불도 단김에 빼라고 우리 둘 부부는 그 뻘짓을 하느라 서로 의논에 의논을 했다. 참 재미있는 날이었다.


메시지를 준비하는 내내 마지막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내 마음은 정말 반반이었다. 이게 너무 뜬금 없는 짓인가? 뻘짓인가? 자꾸 회의감이 들었다. 이곳은 미쿡이 아니라 남을 의식해야하는 한국인데 이래도 되나? 자꾸만 자의식이 생겼다.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해도 후회할 일이 있겠지만, 왠지 이번 기회에 안하면 그것도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결국 그냥 해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분들은 어차피 내가 두 번 안 볼 사람일 수도 있고 혹여나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의 메시지 덕분에 나의 인맥이 넓어지는 좋은 기회 일테니 손해 볼 일이 조금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뜬금없이 한 일이 의미가 있을지

다음 날 나른해질 오후 드디어 몇몇 학교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그 준비한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 이내 그 중 몇 분이 바로 답장을 주셨다. 그리고 직접 전화까지 해주시는 분도 계셨고 또 몇 분은 하루 이틀 후에 답장을 주셨다. 출장으로 오래 학교를 비우셨다고 하시면서 나의 메시지를 읽고 고맙게도 답장을 보내오셨다. 물론 형식적인 답장일 수 있고 영혼 없는 멘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나라는 사람이 이제 들어갔을 테니, 언제고 나의 경험과 배움이 도움이 될 순간이 있으면 불러 주시리라 기대해본다. 그 뜬금없이 한 일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게 할 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To leave no stone unturned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봐라)”의 신조를 또 한 번 실천으로 옮긴 의미 있는 날이었다.


❚ 미쿡과 한국 중간 어디 메에 살고 있다.

미쿡에서 하던 짓을 나는 한국에서 또 저질러버렸다. 나는 인정한다. 나는 이렇게 미쿡과 한국 사이 그 중간 어디 메에 살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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