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좋은 상상만 한 가득 안고 간 미국, 쉽지 않은 현지적응에 지쳐가는 마음들
201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막 지낸 겨울의 한 중간 우리 네 식구는 먼 타국에 도착했다. 좋은 상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꿈은 이미 내 마음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첫 학기동안 내 두 아이도 남편도 나도 모두 새로운 곳에 적응하랴, 문화적 적응을 하랴, 무엇보다 정체성의 혼란을 수습하랴 마음은 늘 긴장 상태였다. 말이 통하는 나조차도 그 낯선 곳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물며 언어가 완전히 다른 낯선 곳에 던져진 우리 두 아이들이 감내해야 할 마음의 불안은 어른인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초등 1학년생이던 우리 아들은 필사적으로 영어책을 읽어나갔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지자, 둘째(아들)는새로운 언어를 빨리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미국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매일 몇 권씩 빌려다 읽고 다음 날 학교에 가서 AR (Accelerated Reader) 프로그램의 독서 퀴즈를 풀고 점수 따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아들의 심리적인 불안함은 그 아이의 눈에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미국 공립학교에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 한 멕시칸이나 흑인 아이들이 많아 상대적 빈곤감은 느끼지 못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3년간 다니던 미국 백인 교회 소속 학교는 우리 아이들 빼고는 모두 미국 남부 백인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아들은 늘 마음 속 상대적 빈곤감을 지니고 생활을 하는 듯해서 내 마음은 많이 아팠다.
❚초등 4학년생이던 우리 딸은 자신의 능력에 도달하기 힘든 학업이 매일 주어졌다.
첫째(딸)은 워낙 차분한 성격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매일의 학업이 힘이 부쳐 보였다. 학교에서 적어온 수업 시간에 한 필기는 알 수 없는 오타투성이 영어단어로 가득했다. 도저히 판독이 안 되는, 판독이 되도 말이 안 되는 필기였다. 미국은 한국처럼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 이런 것들이 거의 전무후무한 상황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의 유일한 리소스는 수업 시간 필기와 두툼한 교과서 뿐 인데, 필기는 일도 도움이 안 되고 교과서는 학교에서 공용으로 쓰는 것이라 상태가 좋지는 않다. 혼자로서 학업을 해 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딸을 두고 엄마로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명색이 한국에서 교사를 하다가 간 나였기에 우리 딸의 미국 학교 입학 이후로 한국으로 귀국할 때 까지 나는 우리 딸의 가정교사 역할을 해야 했었다.
❚40대 중반의 남편은 가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려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집의 가장이었으나 경제적 활동의 제약을 받는 환경에 놓인 이후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많이 겪는 듯 해 보였다. 한국에서 하던 집의 가장 역할을 거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저절로 자격지심과 자존심만 세져가는 것 같았다. 첫 학기 동안 남편의 심리 상태는 불안정해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매일을 살아내는 것이 힘든 상황이라 아빠에게 예전처럼 애착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리고 말 수가 적어지고 각자의 소일거리(아들은 책 읽기, 딸은 다이어리 꾸미기)를 하며 집은 늘 조용했었다. 가끔 언성이 높아질 때는 내가 딸의 가정교사로 일할 때였다. 그럴 때면 남편은 자신이 딸을 가르치겠다면서 자신에게도 할 일을 던져 달라고 늘 신호를 보내왔다. 남편은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단 한 번도 아이의 공부를 봐준 적이 없다. 한국에 있을 때 조차도 그랬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조금도 이해를 못 하는 아빠이다. 그랬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이의 가정교사로 나를 대신 한다고 하면 선뜻 그러라고 할 아내는 없을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생각에 아예 남편의 말을 귀전에도 듣지 않았다. 딸도 아빠한테 배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런 일상을 보내는 상황 이다 보니 남편은 집에서 소외감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애들 공부 대신 집안일을 하면서 집에 일조를 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내가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딸의 가정교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건 싫은 듯이 대구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가정적인 불화로 미국 교회 장로님 부부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받은 적도 있었다.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남편의 마음을 이해 해줘야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국 각자 자신의 역할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미국 생활 정착 초반, 나는 우리 가정 전체의 프레임이 흔들리는 날들을 그저 인내하고 ‘내일이면 더 좋아지겠지’ 하며 미련을 떨며 보냈다.
❚첫 학기 만에 겪은 나의 에너지 고갈
결국 내 몸이 먼저 나에게 적신호를 보내왔다. 미국대학원의 첫 학기가 끝나고 첫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나의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집안일과 한 시간 운전해 다니던 대학원 공부 그리고 두 아이의 가정교사 일, 그리고 낯선 나라의 일상 적응하기, 경제적 압박감, 그리고 영주권이 없는 학생 신분의 미국 살이는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기에는 무리가 있었던지 내 몸은 서서히 말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간지럽기 시작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나타는 증상들이 나타났다. 타국에서 원인모를 병을 앓기 시작하며 나는 두렵고 무서웠다. 한국을 떠나 올 때 나의 시나리오에 없던 일들이 연신 일어나면서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갔고 나의 상황이 참 서러웠다.
❚느리고 불편한 미국의 의료서비스
한국이면 집 앞 내과에 가서 전문의의 진료를 언제든지 받을 수 있었겠지만 미국은 일단 병원이 멀다. 그리고 제대로 된 병원에 가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아픈 당일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스케줄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보건소 수준의 의료 기관인 Urgent Care에 가서 급한 대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먹는 게 고작이다. Urgent Care라는 곳은 예약 없이 우리나라 동네 병원처럼 아플 때 바로 가면 진찰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전문 진찰도구가 없기 때문에 근본적 원인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대기 시간은 평균 한 시간이다. 로비에 손님이 두세 명 밖에 없어도 늘 대기시간은 기본이 한 시간이다. 한국의 의료 체계와 뭐가 그리 다른 지 이곳의 병원은 느리기가 끝이 없다.
그리고 간혹 접수창구의 간호사들은 외국인 차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는 진료 전에 진료비가 얼마가 나올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진료비는 진료가 다 끝나고 며칠 후에 집으로 우편배달이 된다. 병원이 의료보험사에 병원비를 청구하는데, 보험사가 커버해주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환자가 지불해야한다.
그 날도 진료를 하고 몇 주 후에 집으로 의료비 청구서가 배달되었다. 의료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대학교에 외국인 학생 담당 직원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니 의료비가 지나치게 많이 청구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료 받은 병원에 가서 다시 이야기 해보라는 거였다. 미국에서 의료비는 대체로 개인이 내야하는 비용(deductable) 만큼은 본인이 내고 그 나머지 금액을 보험사가 내어주는 식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날 나의 병원 진료비는 전액 내가 내도록 했던 모양이다. 일정 부분 보험사가 내도록 그 병원이 청구해야하나 그 병원이 나의 서류 미비를 이유로 보험사에 청구를 하지 않은 상황인 듯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디테일에 대한 이해를 못 한다. 워낙 의료비 청구 과정이 헷갈려서 외국인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국 현지인들 덕분에 찾아든 심리적 안정
아픈 상황에 상황파악도 되지 않는 그런 기막힌 곳에 내가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내 마음에 의지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도 나를, 아이들도 나를, 많이 의지하는 상황이라 나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도 생기고 무엇보다 미국 현지인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의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첫 학기가 끝날 무렵 미국 현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현지 생활에 많이 적응을 할 수 있었다. 미국 교회를 다니게 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써야 할 만큼 기록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그렇게 나는 첫 학기의 멘탈붕괴를 겨우 겨우 막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감사함을 느낀 하루
한국으로 귀국한 지 2년 만에 오늘 두 번째 건강검진을 받았다. 아침 일찍 집 근처 종합 병원에 예약도 없이 그냥 갔다. 종합병원이지만 예약 없이 당일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접수창구 직원이 세세한 사항까지 안내를 잘 해주어서 안심이 되었다. 오늘은 감히 비수면 내시경도 도전해볼 자신감까지 생겼다. 특이 체질이라 그런지 2년 전 수면 위내시경 당시 수면제가 효과가 전혀 없었다. 비수면상태의 수면위내시경은 참 괴로웠다. 오늘은 그래서 돈도 아낄 꼄 평생 처음으로 비수면 위내시경을 했다. 헛구역질에 눈물까지 핑 도는 힘든 검사였지만, 그래도 내 나라에서 받는 의료 서비스라 믿음이 갔다.
게다가 오늘 내가 지불한 경비는 복부 초음파 10만원, 비수면 위 내시경 8천원, 유방초음파 10만원, 자궁초음파 5만원이 전부였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저렴한 가격이다. 기초적인 검사와 위의 검사들을 다 진행하는 데 불과 2시간가량 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다녀 온 후 나는 예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나의 주변의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국민건강관리공단에서 2년마다 실시하는 건강검진서비스도 그런 것들 중에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