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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젠 그만 말할게요.

: 마음이 불편했다면 죄송합니다.

by Hey Soon

❚불쑥 던진 그의 말

그날도 여느 주말 저녁처럼 네 명의 꼬맹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저녁을 함께하려고 선호씨(가명)네가 왔다. 그 부부를 만난 것도 참 우연이었다. 남편이 잠시 일하던 사무실에 선호씨가 손님으로 왔다. 사람 초대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그 부부를 우리 집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이후로 거의 매주말마다 우리 가족과 선호씨 가족은 함께 주말 시간을 보냈다.


선호씨 내외는 우리보다 나이는 대여섯정도 어리지만 미국 생활을 우리 보다 6년 정도 더 일찍 한 젊은 부부였다. 타국에서 만났지만 가족처럼 지냈다. 선호씨는 딸 둘 아들 둘의 자식 부자이다. 특히 그 막내는 우리가 알고 지낸 다음 해 태어났다. 우리 아이들은 그 막내아들을 무척 귀여워했다.


선호씨는 미국 현지 교회에서 뮤직 디렉터를 맡고 있었다. 그 부부가 다니던 교회는 미국 남부의 장로교회였다. 미국 남부답게 순수 백인들만 다니던 교회였다. 선호씨네는 그 멤버들 중에 유일한 외국인 가족이면서 그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답게 그 부부는 아직 미국 생활이 낯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배려를 해주었다. 우리에겐 아주 고마운 분들이다.


그렇게 주말 저녁을 함께하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면 선호씨는 어김없이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한 번 놀러 오라고 초대를 했다. 거의 세 달 가량을 그렇게 매주 마다 초대를 했었다. 애초에 신앙을 가질 마음이 없었던 나로서는 미안하지만 매번 그의 초대를 거절했다. 그렇게 근 세 달을 초대하고 거절당하자 선호씨가 어느 날 우리한테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이젠 그만 말할게요. 그 동안 매번 우리 교회로 오시라고 초대한 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해요.”


❚미국에 온 이유 중 어쩌면 맨 마지막

신 같은 건 원래 있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신이 혹시 존재한다면 나는 신을 증오했을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과 부조리한 세상을 창조한 그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 누구를 경외하기는커녕 그와 맞짱을 뜨고 싶을 만큼 증오로 가득했었다.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나로선 도저히 신은 은혜로운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척박한 삶의 과정을 되돌아보면 더더욱 나에게 신이라는 존재는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미국으로 이사를 오면서 남편은 성경책을 챙겼다. 나는 못 마땅했었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 성경책을 왜 구지 무겁게 가져가? 그냥 버려.’ 라고 했다. 대학교 시절 영문학도였지만 성경책 한 페이지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회를 집단 이기주의의 온상지라고 배척했었다.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일부 극단적인 종교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모든 종교인들을 같은 부류로 취부하며 경멸했었다.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나는 신앙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은 일도 없었다. 가난으로 엄마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거라 생각한 나로서는 더욱 더 물질적인 풍요를 갈망했다. 미국으로 잠시 유학을 위해 휴직을 하고 떠났지만 나는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일굴 생각까지도 했다. 그런 비장한 각오로 떠난 나였기에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종교인들의 말들은 사실 비위에 거슬렸다. 신에게 의지하며 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삶의 겁쟁이처럼 보였다. 은근히 돈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성경책 따위나 읽는 남편이 못마땅하기 까지 했었다.


❚미국에서 우리 가족을 지탱해준 그곳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은 여전히 컸다. 하지만 착한 선호씨에게 매번 그렇게 거절을 하고 나니 인간적인 미안함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매번 거절하기도 그러니 한 번 만 미국 교회에 방문을 해보자고 했다. 새로운 곳에 그것도 미국사람들만 있는 그곳에 쉬는 일요일까지 가는 게 아이들은 엄청 싫은 모양이었다. 미국으로 온 첫 한 달 만에 한국인이 다니는 교회를 한 번 방문한 적은 있다. 우리에게 지나치다 싶을 만큼 코치 코치 캐묻는 사람들의 질문이 너무 불편해서 다시는 교회에 다니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우기다시피 해서 다음 날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 교회로 첫 방문을 했다.


❚우연이었을까?

한국인이 다니던 교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어느 정도 우리에게 무관심을 해주었다. 그리고 몇 명은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미국인 목사님의 말을 성경책을 일도 읽은 적이 없는 내가 그 아무리 영어 교사이었다 한들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반은 졸고 반은 듣고 하며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되는 예배를 우리 네 가족은 잘 참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요일에도 우리는 선호씨 가족과 일요일 점심을 같이 먹을 요량으로 또 교회에 예배를 보러갔다.


두 번째 일요일 저녁에는 특별히 여성 신도끼리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 이벤트가 있다고 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선호씨네 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있기로 하고 나와 선호씨 부인인 현아(가명)씨는 그 행사에 참석했다. 고즈넉한 미국 남부의 시골 길을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멋들어지게 장식이 된 미국의 어느 가정집이었다. 그 교회의 가족 중에 넓은 저택에 사시는 분인데, 거실이 참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간단한 저녁을 먹고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았다. 신앙 고백을 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왠지 신앙고백이라하면 그 단어자체가 주는 뉘앙스 때문에 사이비 종교가 연상이 된다. 그 당시 나도 그랬다.


50대 가량 되어 보이는 그 교회 장로님의 부인이었다. 그분의 아버지는 공군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10살 정도 아주 어렸을 무렵 훈련을 하러 가신 다고 집을 나선 그날 모습이 자신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하셨다. 비행 중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남겨진 가족들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감당했어야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홀로된 엄마와 동생들과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교회를 평생 처음 다녀 본 나로서는 참 쇼킹한 일이었다. 대단히 개인주의적인 미국 사람들이 자신의 슬프디 슬픈 과거를 그렇게 공개적으로 나누는 게 일단 충격적이었다. 힘든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덕분으로 삶을 굳건하게 살아낼 수 있었음을 고백한 것 또한 놀라웠다.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과 그 이전의 일련의 일들에 대해 나는 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나와는 정반대로 삶을 살아온 것이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던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지만, 그렇게 한 사람의 속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그냥 쌩하니 가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인 상실감은 인종도 국경도 초월한 인간 본연의 슬픔이다. 나는 그런 슬픔을 겪어본 사람으로 그저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그분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도 모르게 나는 생전 처음 본 그 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내 이야기도 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내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못 한 채 쓰라렸던 때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나는 무작정 그 분에게 다가가 나의 상처를 말했다. 그분은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으며 기도를 해주었다.


❚자꾸 눈물이 났다.

처음 본 사람의 손에 이끌러 처음 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내가 늘 그렇게 증오하고 미워하고 대적하고 싶었던 그 절대자를 향해서 항복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나를 감쌌다.

이성으로 설명이 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기도 내내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꽁꽁 얼어 버린 내 마음이 자꾸 자꾸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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