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여름 방학을 맞아 그간에 밀린 치과 진료를 다녀왔다. 우리 네 식구가 거의 20년째 진료를 보고 있는 치과의 원장 선생님은 웬만한 단골손님들의 가정사를 대부분 꿰차고 계신다. 입을 벌리고 치료를 받는 중이라 대화는 주거니 받거니 라기 보다 그저 원장 선생님의 일방적인 토크 이긴 하지만, 언제고 고마운 마음이 전해진다.
미국 유학 중에 잠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들러 밀린 치료를 받았다. 그때에도 우리 아이들에게 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니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오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어느 덧 완전 귀국한 지 2년이 다 되었지만 오늘도 원장선생님은 우리의 미국생활과 한국에서의 적응에 대한 말씀을 “일방적으로” 해주셨다.
원장 선생님: 더운 한국 날씨 때문에 저절로 미국이 그리워지시겠어요?
나 : ...... (제가 있던 곳은 여기보다 더 더웠어요)라고 말했으나, 원장 선생님은 알아듣지 못 하셨다.
원장 선생님: 근데, 요즘 미국 물가 상승하는 거랑 환율 오르는 거 보면 선생님 그때 미국 정말 잘 다녀 오셨어요. 원래 그런 경험은 마음먹었을 때 그냥 해버려야 하는 거예요. 이것 재고 저것 재고 하면 평생 못 해요.
나 : ......
원장 선생님: 10억을 줘도 경험은 못 사는 거 잖아요. 아이들에게 훗 날 큰 밑거름이 될 거예요.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보니까 확실히 외국 경험이 있는 친구들은 글로벌하게 일을 하더라구요. 몸값의 스케일이 다르더라구요. 당장 직업과 연결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친구들은 외국에 나가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요.
나 : ......
원장 선생님: (잠시 무슨 생각을 하시는 듯 멈추시더니 이내 웃으시면서) 멍 때려도 스케일이 다르게 때릴 수 있잖아요. 그 때 미국에서 이랬지 저랬지 하며 멍 때리는 것도 그때 한 여러 가지 경험들을 떠올릴 거잖아요. 멍 때리는 스케일이 한국에서만 자란 아이들과 다르잖아요.
나 : ......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다. 나도 늘 멍할 땐 미국 생활을 생각한다. 아마 나머지 우리 식구들도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참고로, 그 원장 선생님께서도 미국에 일년 간 안식년으로 머문 적이 있다고 하셨다. 나처럼 유학생 신분이 아니어서 그런 지 원장선생님께서 기억하는 미국과 내가 기억하는 미국은 영 다른 나라처럼 느낄 정도다. 그렇게 일방적인 원장 선생님의 토크는 오늘도 이어졌다. 하지만 웬일로 오늘은 원장선생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마치 훤히 들여다보며 말씀하시는 듯 했다.
이미 브런치에 다른 글에서 유학을 다녀온 나의 불편한 마음과 한국 적응기의 힘든 점을 쓴 바가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의 색다른 경험이 우리에게 각각 어떻게 활용될지 기대는 된다. 아직 한창 성장 중인 두 아이에게 그 경험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현재 눈에 띄는 건 그다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1억이 아니라 10억을 준대도 다른 사람의 뇌에서 우리의 뇌로 이식이 되지 못할 그런 경험을 우리 아이들의 뇌에는 각인이 되었다는 거다. 특히 타국에서 적응해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가족을 위해 애쓴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분명 무언가를 보고 느꼈을 것이다. 브런치를 시작한 것도 그런 소중한 경험이 훗날 우리 아이들의 기억에서 흐려질 때를 대비해서 지금 기억이 생생할 때 잘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남겨진 그 경험은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복사 붙이기가 절대 될 수 없는 거다. 기억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다. 참 당연한 사실이지만, 오늘 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새삼 깨달았다.
❚인생에서 한 번 크게 지른 경험이 우리들에게 준 것들
맞다. 경험은 원장 선생님 말씀처럼 1억을 줘도 못 사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경험은 10억을 진짜 준다고 해도 못 해 볼 경험이다. 실제로도 많은 비용을 들여서 한 경험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인생에서 한 번 크게 지른 경험이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우리들에게 준 게 뭐가 있을까? 그 경험은 우리들의 의식, 무의식에 속속들이 침투했다.
❚경제관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생활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바로 경제관념이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기 전 나는 월급을 받고 사치는 아니지만 내가 하고픈 소비를 하고 조금은 저축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구지 절약을 하며 살지는 않았다. 집 장만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미국 유학 중에 겪은 여러 경제적 압박을 견디면서 절약이 몸에 베였다.
외식은 자제
코로나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 가족은 외식을 거의 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아주 가끔씩 그것도 비싸지 않는 식당에서 하는 걸로 약속을 했다. 물론 매 끼니를 내 손으로 장만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집밥을 좋아하는 아들 덕분에 큰 무리 없이 현재까지 그 약속은 지키고 있다.
현금 흐름 파악
월급을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스스륵 사라져 버린다. 가상 머니라고 할 만큼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현금 흐름 파악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귀국해서부터 신용카드 발급은 하지 않고 체크카드만 쓴다. 매달 월급을 받는 날은 그 한 달간 나가게 될 고정 지출 비용을 책상 달력에다 기입한다. 그 두 가지만 해도 나의 현금 흐름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그리고 자유출입 통장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공과금 및 주별 생활비가 나가는 계좌로 하고 나머지 하나는 뭉칫돈을 넣어두는 계좌로 사용한다. 그래서 여윳돈이 얼마가 있는 지 늘 꿰고 있다.
사소한 수입이라도 챙기기
‘월세 세액 공제’라는 것을 작년 연말정산 시즌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집주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고 하는 건 결례라는 말도 있기에 작년 연말 정산 때 신청을 하지 못 했다. 예전의 나는 감히 주인에게 미안한 그런 말을 하지도 않고 그냥 내가 손해 보는 스타일 이었다. 하지만, 집주인의 상황으로 이 달 부로 우리가 이사를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긴 터라 이사 비용 마련을 위해서라도 하지 못한 월세 세액 공제를 해야겠다 싶었다. 귀찮은 일이었음에도 서류를 모두 챙겨 세무서에 갔다. 물론 신청 직후 집주인에게 바로 양해를 구해서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다. 한번 발품을 판 덕분에 한 달 월세에 해당하는 돈이 계좌로 입금이 되었다. 빠른 행정처리 대한민국답게 신청 후 3일 만에 일이 말끔히 처리 되었다.
최근에 가입한 지역화폐카드도 너무 유용하게 쓰고 있다. 충전한 금액의 10%나 얹어주는 지역화폐는 충전할 때마다 공돈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 마음에 든다. 기왕 써야할 식료품 장보기는 그 지역화폐로 소비하니 식료품비 내역도 알 수 있고 공돈도 얻게 되어 일석이조이다.
쓸모없어진 물건으로 현금 만들기
벼룩시장(Flea Market), 무빙 세일(Moving Sale), 야드 세일(Yard Sale)은 미국 사람들에겐익숙한 중고거래 장터이다. 필요 없으면 멀쩡한 물건도 쓰레기로 버리는 한국 사람들과 달리, 미국 사람들은 쓰레기 같은 물건도 야드 세일 진열대에 버젓이 내놓고 판다. 요즘은 한국도 전문화된 중고 거래 앱을 통해 손쉽게 쓸모없어진 물건을 현금으로 만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기꺼이 회원가입을 하고 쓸모없어진 물건을 쓰레기가 아닌 현금으로 바꾸는 생활 습관이 생겼다.
아이들의 경제관념
아들은 돈을 거의 안 쓴다. 생일 선물을 사준다고 해도 싫다 한다. 필요 없이 그냥 물건을 사는 걸 엄청 싫어한다. 지난 5월에 아들 생일이 있었다. 아들은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는 내 질문에 농구화라고 했다. 그래서 주말에 사로 가자고 하니 지금 말고 몇 개월 있다가 지금 농구화가 작아서 못 신게 되면 그때 사달라는 거였다. 그 약속을 지난 주가 되어서야 지켰다. 새로운 농구화를 뒤늦은 생일 선물로 사줬다. 엄마로서 괜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낭비벽이 있는 것보다 백배 좋은 일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꿈인 딸은 여전히 옷 사는 걸 좋아한다. 스트레스 풀이로 온라인 아이쇼핑을 한다. 필요하다고 다 사주지는 못 하는 상황이기에 스스로 매주 용돈을 모아서 나와 의논을 한 후 구매한다. 택배비와 반품비는 내가 지불하지만, 옷값은 오롯이 딸의 용돈에서 계산이 된다. 돈은 쓰기는 쉽지만 벌기는 어렵다는 걸 각인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온라인 쇼핑 결제는 반드시 나를 통해서만 하도록 해두었다.
시간이 귀한 재산
지난 주 유방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며칠간 마음이 조금 불편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시기는 나의 인생에서 늘 있는 게 아닐 수 있겠다. 건강한 시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이 건강한 시기가 얼마나 소중한가! 이 시간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귀한 재산인 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이 유지되고 있는 이 시간들을 아껴서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혼자 있는 시간 오롯이 ‘나’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부터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식구들은 늘 언니네, 여동생네와 어울리는 걸 즐겼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동네 큰 공원에 가서 가족 피크닉을 즐겼다. 일년내내 거르는 법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아이들이 어려서도 그랬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잘 쓸 줄 몰랐기에 나는 늘 그들의 초대에 응하거나 내가 초대하거나 했다.
그런데, 이제는 언니와 여동생의 이야기에 대한 내 마음의 공감이 줄어들고 있다. 나는 요즘들어 나와의 시간을 갖는 걸 더 즐기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 오롯이 ‘나’일 수 있는 그 시간이 난 좋다. 미국에서 거의 5년간 그런 삶을 살아온 덕분으로 이제는 반드시 누구와 꼭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혼자 오롯이 나를 들여다보고 나와 좀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갖고 싶어졌다. 혼자 브런치 글을 쓰고 나의 관심분야 책이나 영상을 보는 것이 이젠 언니, 동생들과 늘 하는 수다보다 더 재미가 있다. 나는 이제 좀 더 오롯이 ‘나’이고 싶어졌다.
아들도 불볕 날씨도 마다 않고 10분을 걸어 아무도 찾지 않는 학교 운동장에 혼자 간다. 운동장 한 귀퉁에 있는 농구대에 가서 함께 농구할려는 친구가 없는 날도 농구를 몇 시간씩 하고 땀에 흠뻑 젖어 온다. 누구와 함께할 수 없다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 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어린 아들이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혼자서라도 열심히 하는 것이 참 대견해보인다.
늘 나와 아이들이 가는 곳에 휴일이면 따라 붙던 남편도 이제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귀국한 이후로 “남자의 동굴(Man Cave: 남성들이 부인의 눈치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공간으로 미국 남성들은 주로 지하실이나 차고 등에 자신만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을 만드느라 바빴다. 집 근처 허름한 창고 건물 하나를 빌려서 안의 내부를 완전히 새로 단장했다. 텅 빈 공간에 벽을 치고 내벽 방음 공사를 하고 실내 공간을 꾸몄다. 한 쪽은 목공작업을 하는 공간이고 반대쪽은 드럼세트가 있는 음악연습실로 마련했다. 이 남자의 동굴은 남편의 버켓 리스트에 있던 항목이다. 처음에는 경제적 부담 되어 내키지 않았지만, 꼭 해보고 싶은 일이라 하니 무턱대고 반대 할 수 만 은 없었다. 웬만한 건 인부를 쓰지 않고 본인이 직접 하느라 완공 하는 데 거의 열 달이 걸렸다. 허름한 공장의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고 포도밭 한 가운데 있는 작업실이라 한번 씩 나도 들르고 싶어지는 공간으로 변신이 되었다. 그렇게 남편도 귀국 후 자신만의 영역을 가꾸느라 열심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그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온라인 예배가 가능해져서 귀국 후 지난 2년간은 여전히 미국에서 하던 것처럼 미국 교회의 예배를 우리들 끼리 집에서 봐오고 있다. 아주 최소한의 신앙생활만 겨우 하고 있지만,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인 거 같다.
❚인생에서 큰 자산이 되길
우리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상황을 변화시켜주었다. 그리고 나도 아이들도 많은 변화를 맞이했고 그로 인해 새로운 버전의 자신들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 치과 원장선생님의 말씀대로 우리 식구는 멍 때려도 스케일이 다르게 때린다. 우리의 색다른 경험이 먼 훗날 아이들의 삶에 큰 자신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