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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Jan 19. 2023

칸딘스키의 <몇 개의 원> 읽기

칸딘스키에게 원은 특별하다. 그가 ‘원’에 매료된 이유는 다섯 가지나 된다. 원은 첫째 가장 간결한 형태로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둘째 명료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무궁무진한 변화를 꾀할 수 있고, 셋째 안정과 불안정을 동시에 보유하고, 넷째 조용하면서 동시에 시끄럽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내면에 품고 있는 수많은 긴장을 단일한 긴장으로 한꺼번에 표출시키기 때문이다. 원에는 원심과 구심이라는 반대되는 긴장이 함께 거주하며 이들이 혼합함으로써 균형에 이른다. 그래서 원은 가장 큰 대립의 집합체이며 종합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몇 개의 원>을 감상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대개 기하학적인 도형들은 그 도도한 자태 때문인지 엄격하거나 경직되고 냉정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일쑤인데 여기에서는 그 효과를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오히려 <몇 개의 원>은 따뜻하고, 화려하고, 아기자기하다. 이런 특성이야말로 원의 고유성이라고 해야 할까? 


칸딘스키가 밝힌 그대로 대립의 집합체인 원의 긴장은 바로 그 대립 덕분에 평정상태를 유지한다. 대립은 또 다른 대립으로 인하여 균형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원의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구조가 불러온 효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원에게는 태생적인 곡선의 기질이 있다. 그것은 직선에서 태어난 삼각형이나 사각형이 갖지 않은 부드러움의 성향이다. 


몇 개의 원, 1926


<몇 개의 원>에는 여유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 방해 요소가 없는 건 물론이고, 세련된 색채가 합류하여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더해주니 이보다 더 안락할 수 없다. 묵직한 배경은 모두를 돋보이는 데 쓰인 듯 너나 할 것 없이 자태를 뽐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나서는 건 아니다. 그래서 평화롭다. 평화는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것, 온전히 관계의 몫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몇 개의 원>은 중심부위를 정하지 않는다. 누구든 중앙이 될 수 있고, 누구든 핵심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중심부는 이내 주변부가 되고, 다시 주변부는 중심부가 되는 순환구조는 이미 원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성질로 이곳에서는 쉽게 이루어진다. 가장 큰 파란원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 같지만 중앙의 검은 원이 배경의 어두움과 함께 파란원의 힘을 가라앉힌다. 게다가 파랑은 스스로 움츠러드는, 내면을 향한 색이 아닌가. 파랑이 중심자리를 벗어나는 건 파랑이 바라던 바이다. 파란원 주변에 하얀 후광이 버티고 나서지만 몇몇 개의 원이 침범하며 이조차 헤집어 놓고 간다. 


밝은 명도와 채도를 자랑하는 원들이 사방이 퍼져 있다. 이들이 알록달록한 빛깔을 유지하는 비결은 스스로 크기를 조절할 줄 아는 겸손에 있다. 덕분에 아기자기한 꾸밈도 가능하다. 셀로판지처럼 투명하게 겹쳐진 효과는 숨을 불어넣어 생동감은 물론이고 재잘대는 소소한 재미도 끌어낸다.  


이렇듯 <몇 개의 원>에는 평화와 풍요가 그득하다. 이는 약속된 순환이 어김이 집행되는 원의 힘 덕분이다. 순서를 기다린다는 건 차례가 돌아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단순한 질서가 평화와 풍요의 실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는 걸까? 그럴 리 없다. 안락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안정을 앞세워 배타적인 울타리를 치는 재주가 있고, 머리 좋은 사람들은 이 울타리를 이용하여 높은 담을 쌓을 줄 안다. 삶의 현장에서 질서 지키기는 평범하지 않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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