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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Jan 11. 2023

칸딘스키의 <파란 원 II> 읽기

<파란 원 II>, 뜨겁다 못해 식어버린 원의 위력은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그림자를 미처 거두어 가지 못했다. 뜨거운 감성과 냉철한 이성이 공존하는 이곳은 광활한 우주처럼 드넓다. 그런데 갑자기 편편한 가로형 직사각면이 굵직한 선으로 둔갑하며 한없이 확장될 수 없음을 통보한다. 여기부터 제한구역이라고. 




<파란 원 II>의 중심은 화면 위쪽의 원에 그치지 않는다. 중심은 때때로 아래쪽의 직사각형으로 옮겨와 원에게 휴식을 주기도 한다. 중심이 원에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는 떠받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떠 있는 존재가 가능하다는 상식을 잊은 탓이다. 중심자리를 서로에게 내어준 효과는 두 세계의 꿋꿋한 정립으로 나타난다. 직선과 곡선, 원과 사각형, 빨강과 검정, 대비 관계에 처한 <파란 원 II>에게는 공존의 기술이 있다. 


우리는 종종 균형을 잃는다. 그건 관심의 폭이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심을 벗어난 우리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중요한 건 잃은 균형감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에 있다. 중심의 가변성은 균형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걸 의미하니 놀랄 일이 아니다. 놀이터의 시소는 무게의 중심을 서로 나누어 균형을 유지하려는 움직임 자체이다. 즉 시소는 끊임없는 균형의 조절인 거다. 균형은 고정값을 추출해 내는 것이 아님을 소박한 놀이터에서 발견한다. 균형은 살아 숨 쉬는 감각이다. 


파란 원은 빨강을 강조한다. 빨강에 대한 칸딘스키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빨강은 무엇보다도 따뜻한 색의 보고로서 흥분과 동요, 격렬함 등 활기가 넘치는 색이다. 하지만 빨강의 활동은 노랑과 다르다는 게 칸딘스키의 지적이다. 노랑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스스로를 소모하는 산만한 성격을 지녔는데 이에 반해 빨강의 움직임에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파란 원 II>에서 빨강의 힘은 검은 테두리를 가진 파랑에 끌려 가라앉고 만다. 빨강의 에너지를 파랑의 냉철함이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파랑이 심화되면 안식의 요소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초록이 지상의 안식을 가리킨다면 파랑은 이를 초월한 안식인데 세속적인 모든 고뇌와 의문과 모순을 체험해야만 주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논리를 천천히 곱씹으면 이 그림에서 빨강의 종착지가 파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란 원은 세상 만물의 동요를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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