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숙경 Dec 07. 2023

미술이 美術이라는 오해

축구에 관심 없는 나는 갖가지 축구리그를 소가 닭 보듯 대한다. 제아무리 유명한 경기가 있고, 훌륭한 선수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해도 호기심조차 발동하지 않는 내 모습이 현대미술을 대하는 대다수의 태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현대미술은 수동적인 관객들 앞에서 전개되는 전문가들의 활동, 그들의 리그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이처럼 단순한 비교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국한되지만, 여기에서 재미있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을 방문하거나 뉴욕의 현대미술관을 방문하는 건 문화의 영역일까, 여행의 영역일까? 관광상품에서 빠질 수 없는 이 일정은 사람들의 취향을 대변하는 것일까? 여행 상품의 완성도를 위한 것일까? 오늘날의 대다수가 동시대의 미술에 시큰둥하고 전시장에 가지 않는 건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미술관은 유명세 덕분인지 꾸준히 관객을 끌어 모은다. 이것은 관객을 잃은 현대미술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반전이다. 게다가 유명 미술관의 관람객들은 미술품을 감상할 적극적인 태도와 호기심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한 시선을 지니고 전시장에 입장한다. 이때 사람들은 알고 있던 지식을 직접 확인하거나 체험해야 하고, 이만한 상식은 응당 갖추어야 한다는 묘한 의무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기대치와 흥미로움은 사람들의 눈을 더 반짝거리게 만든다. 교양을 갖춘 있는 시민으로서 자부심까지 챙길 수 있다면 특별히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이만하면 흡족한 일정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그러나 미술관의 그 거대한 문을 빠져나오면 사람들은 어수선한 거리와 사람들의 부대낌이 가득한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미술작품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는다. 박제된 채 보호구역에서 관리하는 고가품의 자리말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옥같은 명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는 것을 추억하게 된다.  


중세 미술은 성직자와 귀족이라는 관객이 있었으며, 그 후 18세기부터는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구성된 관객이 있었다. 19세기말에 이르자 이 관객은 더 이상 관객으로서 유지될 수 없었다. 사회계층이 변했기 때문이고, 사회구조가 다른 이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권력을 쟁취한 부르주아는 기술을 앞세워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기술은 급기야 문화 메커니즘까지 굴복시키고 말았다. 예술작품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건 합당치 못한 일이지만, 세상은 이를 가리지 않는다. 오늘날 몇몇 사람들만이 예술과 거래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러워할 뿐이다. 


아무도 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왜 제작되는지, 더욱이 이 작품들이 거래까지 된다는 건 의아한 일이 아니다. 이 흐름의 장치는 삶의 형식인 자본의 논리, 즉 투자와 이윤에서 비롯된다. 최고치의 이윤을 거두려는 의식은 벌써 본능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들이 예술 작품을 많이 구입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즉 미술품 구입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재정의 문제라는 말이다. 미술품 수집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며 꽤 문화적 소향을 갖춘 교양인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분명히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그런데  이 착각은 아직도 유효한지, 누군가는 스스로 아첨꾼이 되고 만다. 얼마 전 한 재벌의 죽음은 그의 미술작품 수집에 관심을 불러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언론은 일제히 그를 대단한 문화 애호가로 치장해 주었다. 그들은 포장의 달인이다. 아쉽게도 누구나 이 포장을 뜯어 알맹이를 볼 수 없다. 실제를 발견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닌 세상에서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다. 산업사회에서 기술은 우상이고, 인간성보다 앞선다. 뉴스는 이 사실을 매일 확인시키고,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 확인하며 산다. 함부로 태클걸 수 없는 구조가 우리들을 지배한다. 이쯤 되면 인간의 본질이 인식에 있다고 주장하는 게 거리에서 '믿음-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공허한 일이 아닌지 반박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내어 줄 수 없는 자리,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자리가 '인식'이라고 확신한다. 제아무리 AI시대라 할지라도 인간의 인식은 빈약해질지언정 소멸될 수 없다. 인간은 생각할 줄 알고, 실천할 줄 알고, 절제할 줄 아는 데에서 가치와 독자성을 드러내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예술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인간을 대변할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노래로, 춤으로, 글로,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고, 기꺼이 나눌 줄 안다. 


예술 영역의 하나인 미술은 생산하는 제품이 아니라 탐구하는 정신의 산물이다. 미술은 발견이고, 증언이고, 해석이며 풍부한 삶의 의미이다. 따라서 미술품 관람은 공감을 위한 노력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물이나 상황을 찾아보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몰랐던 '나'에 관하여 알아가는 시간이고, 생각의 창을 활짝 열어 갇혀있던 사고에 색다른 공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또 여기에서는 잠시 멈춤이 필수이어서 그동안 쓰지 않았던 생각의 근육을 일깨워 그동안 잊고 지냈던 스스로를 찾게 한다. 우리 모두는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고 아름답다. 나는 이것을 확인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대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추상화, 형상을 지우다> 책이 되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