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이 원근법의 모순을 마음 놓고 이야기하며 자유롭게 개인의 시선을 표현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평면의 부상이 자리한다.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평면성은 원근법에 대한 반론이며 동시에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이다.
원근법은 세상의 모습을 정확한 비율로 똑같이 그려낼 수 있는 장치 중의 하나이다. 이 방법이 고안된 르네상스시대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사실과 같은 환영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형태가 중요했던 시대에는 나무를 그렸는지, 사과를 그렸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목표이다. 하지만 지금은 15세기의 어느 날이 아니다. 이제 그림 속의 나무나 사과는 보이는 그것만 가리키지 않는다. 나무를 통한 무엇, 사과를 빙자한 무엇이 주체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힘이 없는 예술가들은 무엇도 증명하거나 표출할 수 없다. 현대미술의 어려움이 감상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이보다 앞서 예술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감상자들은 쉽게 이해 못 하는 자신을 먼저 탓한다. 시지각의 예술은 보는 행위 하나에 모든 걸 거는 예술이다. 말로 해설할 이유가 없다.
세잔은 시선의 상대성에 매료됐다. 그를 사로잡은 건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이 아니라 변동하는 감각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새로운 관계로 감정을 추스르게 한다. 세잔을 불러 세운 주체할 수 없는 자연의 왕성한 감정이 <생빅투아르산>에 담겼다. 그가 그린 것은 나무와 바위, 나뭇잎과 그늘, 하늘과 구름 등 여러 대상들의 관계이다. 세잔은 이 관계로부터 원기둥과 원뿔 그리고 구형을 읽어냈다. 이것이 바로 세잔의 위대한 유산, 이로부터 입체주의와 추상주의자들은 꽤 진지한 영감을 얻었다.
다시 원근법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것이 실사를 위해 동원되는 비법이라고 해도 그 형식의 본질은 추상이다. 왜냐하면 원근법의 시선이란 관찰자와 대상 사이에 유지해야 하는 절대적인 거리를 계산하며, 관찰된 단편들을 하나의 시점으로 모아들여 편집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우리의 눈이 사물을 대할 때 눈동자가 얼마나 바삐 움직이는지 떠올려보라. 풍경이든 대상이든 우리는 결코 한쪽만 보지 않는다. 이것은 단편적인 장면을 수집해서 종합하고 판단해야 하는 시지각의 순기능이 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무언가를 관찰할 때 고정된 시점으로 살피지 않는다. 그러므로 뚜렷한 하나의 시점으로 완성되는 원근법의 묘사는 실상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저장된 단면들을 종합적으로 편성한 경험과 인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잔은 우리에게 "보고 있는 것이 그것인가?"라고 묻는다. 윤곽선을 무시하면 훨씬 더 잘 보이는 게 있다. 그것은 편편함, 평면이다. 이처럼 한계선이 있다는 걸 의식하면 그것은 벌써 그 한계를 넘어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