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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ug 08. 2023

거스러미

주제 스킨십

딱딱하게 굳은 거스러미가 제법 많아졌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그것이지만, 한번 거슬리는 순간부턴 계속 거슬린다. 누가 지은건 새삼스레 감탄할 만큼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름이다. 마치 '부스러기'처럼 쓰잘데기 없는 그것은 어째서 생기는 걸까. 그나마 추정해 볼 이유로는 손톱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지만, 아무런 의미는 없다. 그저 당장이라도 손톱깎이로 잘라내버리고 싶은 감정만이 생길 뿐이다.


손톱은 바짝 잘라져서 괜찮았다. 손길이 등을 쓰다듬고 내려가는 중에 걸려진 것은 약지 손톱 옆에 남겨진 거스러미였다. 손가락으로 뜯어보려 하다 결국 제대로 뜯어내지 못한 잔여물. 뜯기다 만 그것은 평소보다 조금 더 벼려진 채로 남았다. 등이나 옆구리, 혹은 조금 더 여린 곳에 스치는 것이 상대를 따갑게 만들었다. 괜스레 미안함이 생기게끔 한다. 최대한 날 선 부분을 숨기고, 손가락을 눕혀 지문으로 비비듯이 누빈다. 어쩔 수 없이 힘조절 아쉽게 되었지만 나름대로 애를 써본다. 귓볼에서부터 시작된 탐험은 배꼽 언저리까지 내려오며 각 부위별로 달라지는 살의 밀도를 세세하게 파악한다. 최종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바로 그곳으로 향하진 않는다. 목적지에 다다르지만 내가 가려던 곳이 그곳이 아니었던 것처럼 관심없는 듯 지나쳐간다. 허벅지 앞과 뒤는 각각 손과 입술을 이용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간다. 예상보다 단단함이 느껴지지만 근육을 한올씩 섬세하게 풀어보듯이 주무른다. 의도치 않은 실수처럼 안쪽을 한 번씩 스치면 아랫배부터 움찔거리는 감각이 전달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감각이 몇 장씩 쌓여가면 간격은 점점 짧아지고 가장 안쪽으로 다가갈 준비가 된다. 마지막 입구를 목전에 두면 여지껏 쌓아온 탐험일지를 전부 지우고 다시 새로 시작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경로를 택하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곳들의 결을 파악한다. 살짝 더 빨라진 속도와, 조금 더 깊이 눌리는 압력으로 이어진다. 거스러미 때문에 손이 누비는 곳에 제약이 생긴다. 어쩔 수 없이 입술과 혀의 비중이 높아진다. 연약한 살결을 스치지 못하는 반작용으로 더 강하게 움켜쥐는 곳이 생겨난다. 결국 밸런스는 맞춰지는 걸까. 다시금 가장 깊숙하고 연한 부분에 다다르면 세상에 갓 태어난 새끼동물을 다루듯이 아주 소중한 움직임으로 맞부딪친다.



"남자들도 여기 오나요?"

처음 네일샵에 갔을 때 그렇게 물다. 집 근처 새로 생긴 곳이었는데 지나가며 볼 때마다 손님이 항상 앉아있었다. 사장님이 솜씨가 좋으신가 보다라고 생각만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도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겨울만 되면 거스러미가 생겨 손톱깎이로 잘라냈었는데, 전문가에게 관리를 받으면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네. 정기적으로 꾸준히 오시는 분들도 계세요."

여사장님 혼자서 운영하는 조그마한 가게였는데 근처에 있는 경쟁업소들보다 가격도 비싼 편이었고, 전부 예약제로만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손님은 항상 끊기지 않고 있었다.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신기한 기계들을 써가며 나의 손톱과 큐티클, 거스러미들을 갉아내고 다듬어줬다. 타인의 손에 위탁한 나의 손가락은 아주 정갈졌다. 꽤 기분이 좋은 행위였다. 한 번씩 생각나면 가볼 만한 취미가 생겼다.



방음이 덜 되는 곳이라 지나는 차들의 소리가 잘 들렸다. 다섯평 될까 싶은 작은 원룸방에선 섬유유연제의 향 위로 저녁에 먹은 음식 냄새가 남아있었다. 긴 머리카락에 눅눅하게 남은 샴푸향은 땀이 조금 섞여있었고, 뭔지 모를 냄새와 체액냄새가 뒤엉켰다. 엎드려 누워있는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문 사이로 솜털을 느낀다. 초점이 흐려진 시야에 부치는 것처럼 흐리멍텅한 부연 것들이 아른거린다. 흐트러진 서로의 숨소리만 공간에 던져져 얽힌다. 허리 언저리에서 올라오다 멈춰진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다. 어두움만 비춰지고 있는 꺼져있는 티브이를 바라보며 거스러미를 띄어내고 싶은 충동에 다시 사로잡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이미 적당히 취해있었고 기억의 공백이 드문드문 남았다. 집까지 가는 길은 너무 짧았다. 놓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놓아야한다. 마음속으로 '취했으니까' 라는 핑계를 대며 맞잡은 손을 조금 더 꽉 쥔다. 많은 것이 느껴졌고, 많은 것을 전했다. 하등 의미 없지만. 취해서 잡았으니 깨면 놓아질 것. 스스로 손이 못생겼다고 아쉬워했으나 어떠한 손보다 계속 잡고 싶었다. 미리 정리해둔 거스러미는 너에게 까스러운 감촉을 남기지 않기에 다행이다.



덩그러니 놓여진 휴지뭉치는 사막에 굴러다니는 회전초 같다. 그것은 말라죽은 채로 바람 타고 굴러다니며 씨를 뿌린단다. 그렇게 뿌려진 종자는 비가 오거나 물을 만나면 뿌리를 내린다. 황량한 사막에서 가장 어울리는 생존형태다. 씨를 품고 굴러다니는 것까진 얼추 비슷하지만 그곳은 사막이 아니었다. 어쩌면 더 메마른 곳일지도 모르겠다.

잠이 깨지 않게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거리를 걷는다. 금방 해가 뜰 것처럼 하늘이 파랗게 질렸다. 새벽의 길거리는 울림이 너무 퍼진다. 담뱃불을 붙이는 손가락의 거스러미가 보였다. 얼른 잘라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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