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모두 '현실'에만 있다. 정확히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겐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다.
문득 의문이 스친다. '지금 혹시 꿈인가?' 일단 볼을 꼬집어본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힘을 주지 않으면 정확한 확인을 할 수 없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맞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꿈이구나. 하지만 바로 안심할 수 없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찔러본다. 아무런 저항 없이 손바닥을 뚫고 지나간다. 확신한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머릿속에 안개가 들어찬 것처럼 생각이 뿌옇게 변한다. 명쾌하게 사고를 이어 나갈 수 없어진다. 살짝은 답답함을 품은 채로 생각을 이어간다. 이 꿈 속에 더 머물것인가, 아니면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어떠한 상태인지는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꿈이겠지만. 딱히 악몽을 꿀 때처럼 불쾌하지는 않다만 꿈에서 깨어나는 방향으로 정한다. 자각몽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내 나름의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그냥 꿈에서 깨자고 마음먹는 것. 그것만으로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대체로는 부족하다. 그러면 곧바로 두 번째 방법을 시도한다. 감정을 과하게 치닫게 만드는 것.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쯤에서 모든 꿈은 깨어진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멍한 상태가 아직 남아있다. 특히나 자각몽에서 깨어날 때는 더욱 그렇다. 현실과 비슷한 선상으로 인식되어버리는 꿈, 그곳에서 현실로 이동되어지면 기묘한 감각이 남아있어서 뇌가 바로 적응을 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룻밤에도 여러 개의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러나 뇌는 그 기억들을 저장시키지 않고 알 수 없는 곳들로 흩뿌려둔다. 꿈과 현실을 동일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처리과정인 것이다. 그 두 가지는 확실한 차이가 존재해야 한다. 아무리 기분 좋은 꿈이었어도 깨어나는 순간 꿈으로 사라져야 한다.
꿈은 휘발성이 강해 깬 뒤에는 그 기억이 오래가지 못하지만, 종종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그러한 꿈을 꾸고 나면 눈을 뜨자마자 내용을 적어뒀다. 나의 모든 무의식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그 스토리는 굉장히 흥미롭다. 자신에게 가장 인상적인 요소들만을 적용시켜 만들어졌을 테니 내겐 그보다 더 잘 맞는 스토리는 찾기 힘들 것이다. 내가 만들었지만 방법을 알 수 없는 최고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다 주인공의 감정을 실제로 느끼면서 보는 작품은 어디서도 겪어볼 수 없는, 4D를 넘어선 개념이다. 그런 것들은 몇 년이 지나도 여운이 남는다.
"누나, 예전에 우리 거기 간 적 있...?"
말을 하는 도중에 위화감을 느꼈다. 기억에 남아있는 그 풍경 속에 내가 들어있고 누나의 모습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확실치가 않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억을 계속 돌려본다. 불분명하다.
"어디?"
커다란 야자나무들이 쭉 뻗어진 도로를 호위하고 짙은 붉은색을 띤 노을이 그 사이로 깔려있다. 누나와 스쿠터를 타고 바닷가로 향하던 중이었다. 도로 가운데 커다란 간판이 있었다. 그리고 간판 옆으로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누나와 갔던 곳에선 폭포를 본 적이 없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주 보진 못하지만 알게 된 것은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인도에서 만나 한 달 정도 같이 여행을 다녔고, 4년 뒤 인도에서 또다시 만났다. 인도에서 다녔던 거의 모든 곳에 누나의 모습이 들어가 있고, 그러다 보니 인도꿈을 꾸면 누나도 패키지처럼 함께 등장했다. 생뚱맞은 풍경으로 펼쳐진 꿈들은 문제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내 기억을 이용한 풍경들은 가끔 위험하다. 꿈속에선 모든 것이 자연스럽기에 상관없지만, 현실에서도 그럴싸하게 인식된 기억들은 두 세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경우가 최대한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지만 쉽진 않다.
필사적으로 방문을 막았다. 이미 거실엔 칼에 찔려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못 봤지만 나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다. 괴한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쓰러진 사람 곁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다른 한 명은 나를 죽이기 위해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방문 틈 사이로 칼을 쥔 손이 들어와 나를 찌르기 위해 허공을 휘둘렀다.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들처럼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이대로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난도질하던 칼을 뺏어 들고 방문을 열자마자 괴한을 찔렀다. 자신의 복부에 깊숙이 박힌 칼을 보며 그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 기괴함은 설명할 수 없는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박힌 칼을 뽑는 그의 손이 슬로모션을 보듯 천천히 움직였다. 점점 느려지던 손은 칼 끝이 거의 다 뽑혀 나올 즈음 완전 멈춰졌고 나는 이대로 끝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꿈에서 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꿈이었다.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너가 보였다. 끙끙거리며 자던 내가 걱정스러웠나 보다. 나쁜 꿈을 꾼거냐며 묻는 너에게 괜찮다고 했다.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며 아침을 먹자고 한다.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는 동안 부엌에선 따듯한 냄새가 퍼져간다. 우리는 아침을 가볍게 먹는다. 오늘 메뉴는 연어샐러드와 버터에 구운 토스트, 스크램블에그가 전부인 단출한 식사다. 빵을 씹으며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해줬다. 넌 우유를 마시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는다.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꿈을 꾼 게 내가 아니라 너인 거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죽었어?"
"아니. 칼에 찔렸는데 그냥 웃으면서 다시 칼을 뽑더라고"
세상 놀라는 표정을 짓는 너의 입술에 묻은 우유를 닦아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그래서?"
얼른 다음 이야기를 내놓으라는 너를 바라보다 문득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너와 함께 잠에서 깨고, 아침을 먹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너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내가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 표정이 보여진다. 아, 깨달음과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꿈에서 깬다.
꿈은 현실의 내가 느낄 수 없는 감정의 폭을 만들어낸다. 아주 기쁘게, 아주 슬프게, 굉장히 두렵게, 너무나 설레이게. 도파민과 엔돌핀으로 가득 채운 욕조에 잠기게도 만들고 눈을 감고 느끼는 어둠조차 밝아 보일 짙은 곳으로 끌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다. 아무리 대단한 것들을 품은들, 그저 흩어지고 바스라진다. 현실이 아닌 꿈은,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