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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ul 18. 2023

우연

주제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또 비가 왔다. 건조함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텃밭에 심어진 작물은 다들 물방울 몇 덩어리를 이고 있다. 그런 날엔 흙 위로 토룡들이 전부 기어 나다. 흙을 먹고 싸며 땅을 이롭게 만들어주는 게 좋다. 그 옆엔 허공에 펼쳐진 은사가 물기를 머금고 더욱 반짝거린다. 엉덩이에서 뽑혀 나와 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미는 그렇게 자신의 다리갯수만큼 튼튼한 생활을 만들어간다. 같은 공간이지만 나와 다른 세상을 영위해 가는 존재들, 그들을 바라보다 나머지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라도 와야 볼 수 있는 친구가 하나 더 있다. 시선을 좀 더 작은 범위로 확대시켜 둘러본다. 역시나 있다. 얼핏 보면 멈춰있지만 절대 멈춘 적이 없는 녀석, 달팽이다. 더듬이를 접었다 폈다 반복하며 나름의 목적지로 끝없이 이동한다. 그런데 녀석을 발견한 곳이 보도블록 위인 것은 좀 의외였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튕겨 나온 걸까, 몰아친 바람을 피하기엔 붙어있던 잎사귀가 너무 빈약했을까. 적어도 달팽이의 목적지가 스카이다이빙을 체험할 수 있는 하수구 구멍은 아닐 텐데 말이다. 가만히 녀석의 껍질을 쥐고 초록잎 위로 얹어뒀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갑자기 누가 나를 집어 올려 한라산 능선에 내려놓는다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달팽이가 그만한 지능이 없는 생물이길 바랄 뿐이다. 그냥 비 오는 날 생겨난 우연한 일일 뿐으로 여기길.


비에 젖으면 기분이 찝찝해진다. 특히나 갑작스런 소나기에 무방비로 당한다면 꽤 오랜 시간을 불쾌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신발 앞코부터 조금씩 적셔져 엄지발가락부터 양말이 축축해져 가는 것은 떠올리기만 해도 싫어진다. 어깨 등 윗부분이 젖으면 쉽게 마르지도 않아서, 운전이라도 하게 되면 내내 편안하게 등을 기댈 수 없다. 피부에 수분을 양보할 생각은 없으니 제발 건조하게 만들어달라 사정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줄곧 비에 젖는 것은 찝찝하다고만 여겨왔다. 그러나 일기예보대로 약속을 지키며 내려주는 비를, 알고 맞는 것은 전혀 다른 기분이다. 양말을 생략하고 아쿠아슈즈를 신은 채로 일을 나섰다. 스스로에게 미리 통보된 젖음은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았다. 오히려 그냥 시원하다고만 여길 수 있게 해 줬다. 비는 나의 기분을 망친 것이 아니었다. 비를 가장하여 몰래 숨어있던 '우연'이 범인이었다.


'우연'이라는 것은 나의 근원적인 감정선의 영향을 준다. 기쁨이나 재미, 혹은 슬픔이나 두려움. 인과를 무시한 듯 보이는  그것은 원초적인 감정까지 파고들기가 용이하다. 개연성이 없어 보이기에 가장 안쪽까지 쉽게 떨어지는 것이다. 우연히 마주한 것들은 우연한 감정을 불러온다.


2014년에 적은 일기엔 당시 느낀 감정이 적혀있다. 높다란 담벼락으로 풍경이 막혀있던 커피숍.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며 마름모꼴 돌을 쌓아 올린 담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요즘처럼 흐린 날씨였고 애매한 오후 시간대라 사람은 거의 지나지 않았다. 원두 볶는 냄새가 주변을 메우고 있었고, 커피 맛도 마음에 들었다. 당연하게 그 시간은 즐겁기만 했다. 명동까지 가볍게 걸으며 관심 없는 사람들을 갔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표정을 들고선 스쳐간다. 몇몇 얼굴은 흥미롭게 담아봤지만 이내 흐려졌다. 명동을 지나치면 신세계백화점이 나오고, 펼쳐진 사거리엔 살짝 녹이 슨 청동 분수가 자연스럽게 서있다. 신호등을 건너 백화점과 남대문시장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 곳에 잠시 멈춰섰다. 그곳풍경은 벌써 20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질리지가 않는다. 거기까지 모두 괜찮았다. 정류장에서 주저앉은 순간까지도 문제가 없었지만, 연히 그 모습을 들키게 된 것은 곤란했다.



카페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퇴근길에 커피 한잔 마시러 들렀단다. 본 김에 잠깐 앉아서 마시고 간다던 너는 한 30분을 그렇게 앉아있었나 보다. 너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예상에 없었기에 나는 그저 책을 계속 보고 있었다. 간단한 안부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아무런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던 것 같다. 무표정. 오해를 하지 않길 바라는 기대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순 없겠다. 3분의 1쯤 커피가 남았을 때 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히 보니까 반갑죠?"

아무런 대답 없이 난 너의 얼굴 빤히 쳐다봤다. 조금 야윈 듯 보여 안타깝다. 다시 한번 대답을 갈구하며 묻는 질문을 그냥 흘다.

"가서 저녁 잘 챙겨 묵고"

맞은편 의자가 유달리 덩그러이 놓여져 있었다. 반가웠다. 그러나 원하던 순간은 아니었다. 우연으로만 성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의 침묵의 이유. 너에게 전할 필요는 없는 감정이기에 그냥 그렇게 말았다. 문득, 그때의 달팽이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말았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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