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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ug 29. 2023

mémoire de ramadan

주제 드라마

후웅... 후웅... 후웅...

천장에 붙은 팬 일정하게 돌아갔고, 박자에 맞춰 숨소리가 채워다. 코를 골기 직전 숨소리. 창 밖에서 들어온 약간의 빛은 굴곡진 선 위 다다라 푸르스름하게 부서지며 져나갔다. 쁘다 라는 감상이었다. 환기가 잘되는 방은 아닌지라 풀이 태워진 냄새가 약간은 남아있었다. 돌아가는 팬을 바라보고 있자니 최면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 나는 조용히 상황을 되돌려봤다. 어디까지 돌아가는 게 정답일진 알 수 없었지만, 대충은 정할 수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인도여행 중이었다. 서쪽 끝에 위치한 사막도시 자이살메르. 전에도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곳으로 두 번째도 여지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다시 찾은 사막은 변함없이 뜨거웠고 여전히 좋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그곳에서 듣게 된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내일부터 라마단이야"

내가 머물던 숙소 식당을 함께 운영 중이었는데, 나는 대부분의 끼니를 그곳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당시 그 식당의 주방장이었 친구는 무슬림이다. 힌두교 나라 인도에선, 이슬람교는 인구의 10프로 조금 넘는 정도이다. 물론 10분의 1 뿐이어도 그 수가 2억이 넘으니 적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2억의 무슬림 중 한 명이 나의 친구였고, 라마단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경로로 내 인생에 흔적을 남겼다. 라마단이 시작되면 친구는 해가 떠있는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알라신을 위한 간헐적 단식. 평소에 잘 챙겨 먹어도 견디기 사막동네에서 그 의식은 버거운 일이다. 굶주린 친구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나는 당분간 다른 동네 구경을 떠나기로 다.


두어 군데 도시를 이동해 가며 콧바람을 쐬었다. 건물색깔만 다를 뿐, 인도는 여전히 어딜 가도 대충 비슷했다. 10일 정도 돌아다니다 불현듯 델리나 가볼까 하고 목적지를 정했다. 경유하면서 잠깐들린 적은 있지만 제대로 지내본 적은 없었기에. 그래도 나름 수도인데 어떤 분위기인지 느껴나 보자 하리행 버스에 올랐다.


그녀는 버스에서 짐을 내리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었다. 150이 조금 넘을법한 작은 체구에 어찌 저런 거대한 배낭을 고 다닐까 궁금했만, 일단 그녀의 배낭 뒤에 박혀있던 내 짐을 빼기 위해 손 거들었다.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를 하는 그녀의 첫인상은 '예쁘다'였다. 강한 태양빛에 군데군데 빨갛게 익어버려 원래의 피부가 더욱 하얗게 느껴졌다. 금발과 회색 그 가운데 어딘가의 색상을 취한 머리칼은 바짝 땡겨묶어 야무져 보였고 눈동자는 은은하게 푸르렀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 중 이방인은 우리 둘 뿐이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명분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온 스테파니는 한 달 정도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4일 뒤 귀국한다고 했다. 시종일관 띄고 있는 밝은 미소가 좋아 보였다.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손목엔 꽃송이 몇 개가 그려져 있었는데, 조금 더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별 계획이 없었기에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난 그녀를 파니라고 줄여서 불렀다. 한국사람들은 대체로 이름이 두 글자라서 그렇게 부르는 게 더 친근한 느낌이라고 알려주니 녀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맥주를 좋아했고 풀을 태우는 것을 좋아했다. 기호가 비슷하여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로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부분마저 잘 맞았다.


"너는 프랑스에서 예쁜 편이야?"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건넨 것은 두 번째 날 저녁이었다. 이켜보니 무슨 수작질을 한 듯 느껴지지만, 그때의 나에겐 아무런 사심 없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되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궁금해서. 내가 보기엔 진짜 예쁜 거 같거든"

한참을 웃다가 자신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것인지 민망함에 그리 말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맥주를 조금 더 마신 저녁이었다.


입을 맞춘 것이 그날인지 다음날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서양인들의 진취적인 행동방식 감탄했지만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머물던 방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태워진 풀냄새는 느리게 돌아가는 팬에 의해 구석구석까지 퍼졌고 모기들이 우리를 방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만히 손목을 잡았다. 꽃송이들 상처 가려줬으나, 느껴지는 촉감은 적나라했다. 울긋불긋한 사이로 느껴진 울퉁불퉁함은 묘한 감상을 남겼다. 딱히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쓰다듬었다. 방은 어두웠지만 푸른 눈동자가 잘 보였다.


아직은 이른 새벽, 바깥 소음에 눈이 떠졌다. 창으로 스며 들어온 빛은 그녀의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코를 골기 직전까지 간 숨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풀냄새가 느껴졌다. 팬은 멈춤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즐거웠어. 남은 여행 잘하고"

그녀가 귀국하는 날,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여전히 배낭이 몸집에 비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조심히 가고, 잘 지내"

완전한 굿바이. 다음을 기약하거나 연락처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이후로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 짧았고 얕은 것이다. 마지막 악수를 나누며 보인 손목엔 여전히 꽃송이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아직 라마단이 끝나지 않았지만 슬슬 돌아가볼까 생각을 하며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른 것을 전해야 했다.

"파니야!"

나의 부름에 뒤돈 그녀의 얼굴은 햇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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