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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다반사 Oct 28. 2019

존버 하는 그들을 위한 위로

판소리 복서(My punch-drunk boxer, 2018)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판소리와 복싱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판소리는 우리 고유의 소리를 담은 것이지만 오늘날 겨우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는 존재이며, 복싱은 한 때 전통적인 격투기 종목으로서 인기를 구가하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이종격투기의 자리에 밀려가고 있습니다. 둘 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점차 잊혀 가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격투 스타일인 판소리 복싱으로 세계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병구(엄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 유망주로 기대를 받았지만, 무릎을 다치고, 도핑으로 인해 자격이 정지되고 복싱계에서 점차 잊히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병구 스스로도 잊혀가고 있었습니다. 펀치 드렁크로 인한 치매 증세 때문이죠. 그의 판소리 복싱을 응원해준 지연(이설)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잊을 정도로 시간이 갈수록 그 증세는 심해져만 갑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증세를 늦춰주는 약을 먹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병구는 하루하루를 '존버'하고 있습니다.


병구를 감싸는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필름 카메라, 오래된 TV와 세탁기, 유기견, 취준생, 체육관 관장. 디지털 시대에 필름 카메라는 점점 잊히는 존재가 되었고, 수명이 다 된 오래된 TV와 세탁기는 수리기사님 덕에 여전히 돌아가고, 유기견은 동네 아이들의 발길질에도 꿋꿋이 버텨냅니다.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자 취준생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으며, 한 때 잘 나갔던 체육관 관장은 현실 앞에서도 성경책을 읽으며 자리를 지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존버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지막 시간이 찾아옵니다. 병구(엄태구)와 함께했던 강아지 포먼은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고, 병구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던 박관장(김희원)은 병구의 판소리 복싱을 위해 체육관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병구는 천둥 같은 민지(혜리)의 장단에 맞춰 번개같이 주먹을 날리며 판소리 복싱을 끝내 완성해냅니다. 마지막까지 버텨주었던 그들을 향한 위로이자 경의로 느껴져서였을까요? 민지의 장단이, 병구의 주먹이 그렇게 구슬퍼 보일 수 없었습니다.



한 때 영광을 누렸던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수명을 다하였습니다. 아무리 존버 한다 한들 시간은 흐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불태운 마지막 불씨를 보며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시대가 끝났다고 우리가 끝난 게 아니라 말한 병구의 말처럼, 시대가 끝났다 해도 그들을 기억할 순 있을 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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