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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기다움 Sep 19. 2023

은희야, 너의 삶은 빛날 수 있어

스크린 속 성평등을 찾아서 - ②벡델 초이스 - 벌새



각본, 감독 : 김보라

주연 : 박지후, 김새벽

상영시간 : 139분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 2019.8.29



영화 <벌새>는 성수대교 붕괴, 김일성 사망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한 1994년을 배경으로 한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인 은희가 학교, 가정에서 겪는 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벌새는 작지만 날아다니는 힘이 강하여 벌처럼 공중에 정지하여 꿀을 빨아먹는다고 한다. 생활의 중심공간인 가정과 학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며 따뜻한 정도 누리지 못하는 은희가 좌절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벌새로 표현한 것이다.


김보라(41)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주인공 은희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촬영도 우수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2019년 제40호 청룡영화상 각본상, 2020년 제5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 같은 국내 대표영화제는 물론이고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 그랑프리상, 트라이베카영화제 국제경쟁부문 대상과 여우주연상, 촬영상 등 모두 59개의 상을 수상했다.


김보라 감독은 영화 성평등지수 벡델테스트 제안자인 앨리스 벡델과의 대화에서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가 개인의 잘못이 아닌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알게 되었다고 한다. 벡델은 벌새가 ‘넋을 잃을 만큼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칭찬하였다.


<벌새>는 은희가 겪게 되는 사건들을 깊이 있고 세밀하게 묘사하여 몰입하게 한다. 중학교 2학년 은희에게 세상은 온기와 사랑을 느끼기 어려운 곳이다. 아파트의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지만 응답이 없는 영화의 시작 장면부터 은희가 가정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을 짐작하게 한다.


학교에서는 교사와 급우들로부터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무시와 차별적 발언을 들어야 한다. 교사는 공부 못하는 것들이 줄도 똑바로 못선다고 하고, 급우들은 공부 못하면 대학 못가서 파출부나 하고 산다고 말한다. 가정에서는 가부장적인 아빠가 아들 선호사상을 갖고 은희 오빠를 외고와 서울대를 보내야 한다며 모든 가족이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시로 은희를 구타하는 오빠, 시장에서 떡집을 운영하고 있어 삶에 지친듯한 엄마, 자신의 남자친구에 집중하느라 여동생한테는 관심이 없는 언니, 가족들은 은희에게 아무런 온기를 내어주지 못한다. 귀 밑에 종기가 있는데 은희는 치료를 위하여 주로 혼자 병원에 다니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일상이 바쁜 부모는 은희의 병원치료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보라 감독은 이러한 은희의 상황을 “집이 있지만 집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이라고 표현했다.


은희는 친하게 지내던 여자친구 지숙과 남자친구 지완과의 관계에서도 사소한 일들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만다. 인간관계는 삶에서 중요한데 누구한테나 쉽지 않다.


가정과 학교에서 정서적으로 충족되지 않음을 경험하던 은희에게 한문학원의 영지샘은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존재였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은희의 말에 영지샘이 “나도 그래”라고 한다. 둘이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대화이다. 영지샘은 은희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며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인물이다.


오빠가 때리면 끝날 때까지 그냥 기다린다고 무기력하게 말하는 은희에게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있지 마.”라고 하는 영지샘의 조언으로 자신을 때리던 오빠에게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은희가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으세요?”라고 묻자, 영지는 자신도 그런 때가 많았다면서 “힘들고 우울할 때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 수 있다.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 영지샘과의 대화를 통하여 은희는 살아가는 힘, 자존감을 찾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은희의 인생 멘토인 영지샘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문학원을 그만둔 후 은희에게 보낸 선물은 스케치북이었다. 은희의 꿈이 웹툰작가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영지샘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선물이었다. 은희의 꿈을 기억하고 존중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문학원에서 볼 수 없게 된 영지샘을 만나고 싶어 주소를 구해 집을 찾아갔다가 성수대교 붕괴사건으로 희생된 것을 알게 된다.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비극적인 사고로 자신의 정신적 멘토 영지샘을 잃은 은희가 수학여행 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내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라고 영지샘한테 묻는 대사가 있다.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는 은희였지만 하나의 존재로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높은 소녀였음이 분명하다. 인생멘토였던 영지샘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23년 은희가 보는 세계는 어떨까?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는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차별과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들과 맞서 이겨서 자신을 사랑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은희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감독이 말한 것처럼 관객들은 <벌새>를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은희를 만나고 있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삶이 빛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삶의 공간에서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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