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 성평등을 찾아서 -벡델 초이스 -⑤찬실이는 복도 많지
감독 : 김초희 / 주연: 강말금
상영시간 : 96분
등급 : 전체 관람가
개봉일 : 2020년 3월 5일 개봉, 2020년 11월 26일 재개봉
오랜 세월, 감독 밑에서 영화 PD로 일하던 찬실. 갑작스러운 감독의 죽음으로 실직하게 된다. 한 우물만 팠던 탓일까? 업계에서도 PD로서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백수가 되어 달동네로 이사를 하는 찬실. 그곳에서 집주인 할머니와 미스터리 한 남자, 국영을 만난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배우 소피의 집에서 생계를 위해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소피의 불어 선생님인 김영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로맨스가 시작되나 했지만 김영은 담백한 남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기 쉬운 구태의연한 썸남 캐릭터가 아니다. 찬실과 영은 그저 ‘잘 지낸다.’
영화는 찬실의 인생에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과 함께 삶을 더욱 밀도 있게 조명한다.
찬실은 집주인 할머니에게서 '우리 할머니'를 봤던 걸까?
할머니는 까막눈이다. 찬실에게 온 편지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떠듬떠듬 읽는다. 주민센터의 한글교실을 다닌다. 할머니에겐 아픈 사연이 있다.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밥도 얻어먹으며 할머니의 한글 공부를 돕는다.
돌아가신 찬실의 할머니처럼 ‘글이라고는 이름 세 글자 밖에 모르지만 사는 게 뭔지 다 아는 것 같은’ 집주인 할머니에게서 찬실은 삶 앞에 유연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집주인 할머니의 시 쓰기 숙제를 돕던 찬실. 맞춤법이 틀린 시를 읽고 무슨 말 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울먹인다. “뭐라고 쓰신 거예요?”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20대가, 내 30대가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의 딸이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슬픔에 솔직하게, 남의 슬픔에 공감하며 울 수 있는 찬실은 용감하고 다정하다.
환영 vs 귀신, 국영
국영의 존재는 극에서 참 특이하다. 처음엔 장국영인가! 하고 등장했다가 흰 런닝 차림의 동네 백수 같은, 약간 모자란 아저씨로 표현된다. 그러나 국영은 계속된 옳은 질문들로 찬실이가 가야 할 방향을 갈 수 있는 속도로, 찬실 스스로 선택해 움직일 수 있게 도와준다. 유능한 코치처럼 혹은 페이스메이커처럼 찬실을 이끈다.
“찬실 씨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우주에서도 찬실을 응원하겠다던 국영은 귀신이었을까, 환영이었을까? 영화 마지막을 보면 그저 찬실의 눈에만 보이는 환상이었다고 이야기하기 아쉽다.
찬실이 어떤 복이 많지?
달동네로 찬실이 이사할 때에도 같이 일하던 스태프들이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줬다.
모두 기꺼이 따라왔었다. 영화 마지막 즈음에도 스태프들과 배우 소피, 그리고 새로운 친구 김영까지 모두 찬실이네로 찾아온다. 찬실이네는 전구가 나간 상태인데, 전구를 사러 혼자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서로 나서서 찬실과 가겠다고 한다. 결국 모두 함께 전구를 사러 달동네를 내려간다. 아주 추운 겨울이다.
“먼저 가라, 내가 비춰줄게.”
깜깜한 달동네를 내려가는 길. 손전등을 든 찬실이 조심히 내려가라고 모두를 앞 세운다. 자신은 가장 뒤에서 빛을 비춰준다. 찬실이 주변에 사람이 자꾸 모이는 이유는 이것 아닐까. 자신보다 남들을 먼저 밝게 비추어 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빛에 사람들이 끌려드는 것 아니었을까.
‘내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그런 것만 하며 살 수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버린 나이. 적당히 때 탄 마흔. 더는 어려서 실수했다고 봐주는 것 없는 나이. 그렇다고 늙어서 못 했다고 할 수도 없는 나이. 어중간한 나이 마흔. 인생이라는 길에서 낙오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실직이다. 잠깐 길 밖을 벗어난 덕에 찬실은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얻었다.
2020 백델초이스 픽
이 영화에서 남자역은 귀신(국영)이거나 찬실보다 인생에 서툰 5살 연하의 남성이다. 혹은 스태프로 역할이 미미하다. 도도하거나 튀는 얄미운 여배우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소박하고 언니를 진심으로 챙겨주고 싶어 하는 아는 동생 소피만 있다.
노인을 약자로만 비추지 않았다. 하루하루 하고 싶은 일을 애써서 하고 사는 집주인 할머니. 또 남보기에 일궈놓은 것 없는 마흔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세상 기준으로 나이 든 여자도 꿋꿋이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해주고 있다. 길을 잠시 벗어나도 괜찮다. 원하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어떤 복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가는 것이 “삶”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