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좋아하는 시 구절 적고 가
몇 년 전, 배우 S에 푹 빠져있었을 때의 일이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에게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작품 이후 첫 차기작이었다.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그렇듯이 그 영화도 무대인사를 진행했고, 덕분에 나는 인생 처음으로 무대인사를 가 봤다. 이제는 그 배우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무대인사를 가지 않은 지도 오래됐지만, 무대인사는 여전히 좋다. 그 까닭은 그 안에 ‘만남’이 있기 때문이리라. 영화라는 창을 매개로 가닿는 간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마주하는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무대인사는 영화의 바깥에서 돌아가는 레코드판이지만, 영화는 그곳에서도 계속된다. 영화가 상영되는 요즘의 온도, 촬영 중 겪었던 소소한 웃음거리들을 거쳐서 영화라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이 안에서는 현실과 영화가 서로 다른 셀로판지처럼 겹쳐지고, 이 지점은 나를 무대인사에 매료시켰다.
영화관을 떠나 시를 즐기게 된 요즘, 시집에도 무대인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공간은 바로 ‘시인의 말’이다. 제목을 제외한 시집의 활자 가운데 우리의 시선에 가장 먼저 닿는 것은 시인의 말이다. 말하자면 시인의 말은 잘 꾸며진 ‘어서오세요’ 발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시인의 말’ 자체는 시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런 것이 독자가 읽는 첫 글이 되기에 시집의 첫인상을 형성하게 되기도 하며, 그 자체가 시집의 고유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힘을 지닌다. 시가 아닌 것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아이러니에서 셀로판지가 겹쳐진다.
그리하여 본 글에 시인의 말의 일부 혹은 전문을 기재해본다. 모두 나의 책꽂이에서 출동한 것들이기에, 수집되지 않은 초입 역시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소중히 여겨, 공유하고 싶은 시인의 말이 있으시다면 댓글에서 자유롭게 공유해 주시길 바란다.
너에게 향기로운 헛것을 보여주고 싶다.
- 『샤워젤과 소다수』, 고선경 (2023, 문학동네)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혼자 빠져나와
이 세상에 없는 이름들을 가만히 되뇌곤 했다.
그 이름마저 사라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
숨을 곳도 없이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더는 생겨나지 않는 세상이
언젠가는 와야 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신철규 (2017, 문학동네)
어느 여름 저녁
파초 잎 아래에서 당신이 울고 있다면
어느 여름 저녁
내 얼굴이 못생겼다면
그건 슬픔이 얼굴을 깔고 앉았기 때문
-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박연준 (2024, 문학동네)
삶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고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차선과 차악 사이에서 더 오래 머뭇거리고 있지만,
이 분명한 없음과 분별하기 힘든 있음들 사이에서
그리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 있는 사람은
삼나무 숲에서 삼나무를 찾고 있는 사람과 같다.
삼나무 숲에 들어섰으니 삼나무는 찾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안심하겠지만
눈앞에 두고 찾지 못하는 맹목이 가장 어둡다.
- 『대답이고 부탁인 말』, 이현승 (2021, 문학동네)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당신이 먹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2023, 문학동네)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그곳에서 가장 아픈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2011, 문학동네)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허연 (2020, 문학과지성사)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2022, 문학과지성사)
오랜만에 詩集을 펴낸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
-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2010, 문학과지성사)
춤을 춰야겠다는 목적을 갖고 춤을 추는 사람과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
굳이 밝히자면 내 이 모든 병(病)은 후자에 속한다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2024, 문학과지성사)
詩여, 너는 내게 단 한 번 물었는데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구나
-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2011, 문학과지성사)
괜찮니? 그래, 오늘은 잠깐 너를 보러 온 거야……
달이 있고 여전히 이곳엔 지구인의 폐기된 기억이 떠다닐 테지만.
- 『후르츠 캔디 버스』, 박상수 (2006, 문학동네)
나를 바라보는 곤충의 눈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본다
그토록 크면서 그토록 작은 나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1996, 열림원)
editor. 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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