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하지 않은 물비늘을 더듬어

건반 위를 흐르는 곡들

by 인문잡지 영원

세상에 흐르는 것은 많다. 몇천 번을 거듭한 어제로부터 오늘로의 이행. 바람에 나부끼는 물살들의 산발. 무심코 엎지른 물.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아래로의 추락을 반복하는 모래. 가물가물한 눈으로 짓이겨지는 애상.

그리고 불협하는 음악의 선율.


Ravel – Jeux D’eau 물의 유희

클래식을 듣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애초에 피아노 연주곡을 잘 듣지 않았다. 멋들어지게 말하는 낭만주의니, 협주곡이니, 바로크 음악이라니, 퓨전이라니, 뭐라니…. 같은 용어는 당연히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이를 듣게 된 것은 단순히 ‘풍성한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곡의 볼륨감이 대단히 넉넉해져서 두꺼운 실타래처럼 청각에 펼쳐지는 그런 음악.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처럼 각각의 음색이 하나가 되어 일정한 음악의 끝이라는 종말로 질주해 나가는 그 감각을 사랑함에 있다. 라벨의 음악도 그중 하나이다. 으레 피아니스트들이 한 번씩은 라벨을 극찬하며 그의 곡을 자신이 연주한 뒤 발매하고, 나는 그것을 어딘가에서 주워듣고는 음원 사이트에 읽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를 한 글자씩 독수리 타자로 써내려 간다.


어릴 적 소풍을 가서 보았던 자그마한 분수대와 연못을 생각한다. 그리고 떠올린다. 작은 원통으로 이루어진 어린 몸에, 뒷일은 보호자들에게 넘기는 방법 따위밖에 알지 못하는 그런,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들. 하잘것없는 공원의 분수대도 이탈리아의 트레비분수처럼 느껴진다.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는 분수대, 그리고 의지를 가진 것처럼 방울져서 살갗을 두드리는 물방울 같은 것들. 소금쟁이들의 거대한 안식처. 그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통, 통, 소리. 지극히 가벼운 몸짓에도 바르르 떨리며 발걸음 하나하나를 재현해내는 물결의 파장. 그리고 번져나가는 수많은 발자국. 살금살금 내리는 빗방울에 불규칙적으로 수면에 새겨지는 흔적들,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리고 나서야 한낮의 별빛들처럼 산란하는 빛방울들.

라벨의 물의 유희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1901년에 작곡한 피아노 독주곡으로, 그는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물결이 살랑대는 소리나 샘, 폭포, 실개천 등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적 소리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라고 말한다. 수면에 새겨지는 물결의 파장처럼 악보에 새겨지는 선율들과, 산발하는 물방울같이 비산하는 건반의 글리산도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물결들을 떠올려보자. 참방댔던 작은 추억에 휩쓸려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정재형 – Summer Swim

너무 좋아서 들을 때마다 네 번은 멈춰야 하는 곡이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로,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좋다…. 격렬하게 터져 나오듯이 반발했다가도 가득히 응축된 에너지가 짙게 시간을 덧칠하는 감각으로 진행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다.

폭풍우 같다가도 서서히 잠겨가면서 질식하는 기포들이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푸, 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사람 같기도, 진득한 더께처럼 내려앉는 무겁고 축축한 초록빛의 습도 같기도 하다. 머리를 흔들며 튕겨 나오는 땀방울 같기도 하고 숨결들의 충돌 같기도 하다.

곡은 낮은음으로 나를 서서히 수렁으로 이끌어가고 나는 저항하지 않는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줄에 매인 것처럼 가만히 떠밀려간다. 망망대해 가운데에서 해일을 마주한 것 같은 심정이면서도 나에게 아가미가 돋아날 것 같은, 이유도 없는 사랑이 불쑥 튀어나온다.*강조. 내 몸에 비늘이 한 개씩 새겨진다. 인간의 몸에 비릿한 향이 풍기는 손톱 같은 비늘이 목에서부터 툭툭 튀어나온다. 낚시꾼이 무서워진다…. 내 귀는 지느러미가 되어 순간을 유영한다. 시간을 젓는 노가 되어 뭉근하게 손을 감싸오는 물살처럼 밀어낸다.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그 음악과 물결들을 구분하기란 우리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속절없이 볼이 달아오르고, 곧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계절이 점차 움트고 있다. 바람 한 점도 불지 않는 날이 오기 전에, 홀로 흘러가는 물살에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editor. 니이


인문잡지 「 영원 」 instagram: @0eterna1.m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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