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선 매일이 여성의 날

여성주의 독립서점 ‘인프로그레스‘

by 인문잡지 영원


자꾸만 범람하는 세계,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결의 흐름을 읽어야만 한다. 함께 흘러야만 비로소 헤매지 않고 나아갈 수 있으므로. 하지만 이토록 가파른 변화의 홍수 속에서도 저마다의 속도를 잃지 않으려는 물결들이 있다. 마음껏 흐르되, 주류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들. 나는 그런 흐름을 사랑한다. 어떠한 소음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선보이는 이들의 마음, 그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물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끝없이 변화하는 도시 서울, 그 어딘가에도 누군가의 잔잔하고 단단한 마음이 숨 쉰다. 페미니즘과 비건,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고 뜨개와 제철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 그런 한 사람이 투영된 오렌지빛 공간, 독립서점 ‘인프로그레스’이다. 인프로그레스는 김안젤라 작가가 운영 중인 여성주의 서점으로, 온갖 여성 서사를 수집한다. 온전히 서점지기의 취향이 스며들어 있는 독립서점을 살피는 행위는 단순한 공간을 넘어 한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과도 같다. 그러니 어떤 이의 흐름을 바라보려 그가 남긴 공간을 매만져본다. 오렌지빛 안에서 당신은 어땠는지.


여성 서사를 수집하는

세상 모든 여성들의 서사가 이토록 자그마한 공간에서 함께 박동한다. 서점지기는 문학은 물론 에세이, 잡지 등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여성의 이야기를 모아오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캐롤라인 냅과 같은 고전부터 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까지. 이곳에서만큼은 어떤 여성의 목소리도 저물지 않는다.

김안젤라 작가는 도서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해당 도서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섭식장애와 중독, 강박증을 다룬다. 같은 책장에는 식이장애와 비정상 체중, 여성들의 신체에 대해 다룬 도서가 비치되어 있으며, 그 건너에는 여성 의제를 다룬 또 다른 책들이 존재한다. 살아가면서도 미처 모르는 것들. 때로는 당연히 여겨져서 문득 두렵기도 한 것들에 대해 짚어준다.

어느 여성도 흐려지지 않고 선명한 공간, 인프로그레스는 여성과 얽힌 것이라면 무엇이든 수집한다. 서점 내부에는 작은 소품샵이 있다. 이는 모두 여성 수공예 작가들이 만든 작품으로, 여성 목수의 북홀더링이나 코스터, 도자기 등 여성의 손을 거친 결과물을 판매한다.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인프로그레스가 말하는 과정이란
결과에서 여정으로의 과정
양극단 사이의 경계로의 과정
손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당신은 어떤 과정에 있나요?

서점 내부의 한구석에는 ‘사유의 벽’이 존재한다. 사유의 벽에는 정기적으로 다른 주제의 종이가 부착되며, 빈칸을 채워 문장을 완성하고 물음에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례로 5월에는 ‘편지 쓰는 서점’이라는 활동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편지를 쓸 때를 떠올려보라. 어떤 말을 건네주어야 할지 하염없이 고민하고, 단어 하나에도 신중해진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 그런 무수한 순간들을 경유해 편지는 완성된다. 언어화되지 않은 과정들을 소중히 여기는 인프로그레스는 방문자들의 사유를 언제나 환영한다.


환경을 아끼는

뜨개를 향한 서점지기의 애정은 각별하다. 달마다 ‘선데이 니트 클럽’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서점의 한 편에는 뜨개실과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판매 중인 뜨개실은 폐플라스틱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패션을 전공한 김안젤라 작가는 패션의 양면성을 알게 된 후 뜨개와 수선, 업사이클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가치관을 반영해 서점 내에는 패스트패션과 낭비 사회에 대해 다루는 서적이 비치되어 있다. 또한 비건과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서점지기이므로 비건 비누나 옥수수로 만든 치실, 친환경 수세미 등의 제품도 판매 중이다.


안식처가 되어주는

서점에는 스티커가 부착된 샘플용 책과 그렇지 않은 판매용 책이 비치되어 있다. 샘플 책은 서점지기의 소장품으로, 음료를 주문하거나 판매용 책을 구매할 시 내부 테이블에서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하다. 샘플용 책에는 자유롭게 표식을 남길 수 있도록 펜이 마련되어 있다. 언제든지 나의 자취를 남길 수 있고, 타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입구에는 ‘타인의 서재’가 마련되어 있어 타인의 시선으로 풀어낸 큐레이팅을 만날 수 있다. 이름 모를 서로의 세계가 닿는 곳.


당신의 흐름 [서점지기 Interview]


Q. 인프로그레스를 운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A. 큰 포부는 없이 시작했다. 다른 큐레이션을 하는 서점지기분들은 사회적 역할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하시지만 그런 부분보다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어 하게 되었다. 원래 책을 좋아했고 직장도 출판사나 잡지사 등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다. 하지만 직업이란 생계 유지와 자아실현과 결부되는 일이므로, 그런 것에 회의를 느껴 퇴직 후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러던 중 마흔이 넘어가는 어떤 분께서 자신은 잃을 것을 다 잃었고,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그러한 역할에 대해 고민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때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 시기 sns에서 독일에 ’she said’라는 페미니즘 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점의 이미지와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한국에도 저런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계를 위해서라면 서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점은 물론, 종이를 매체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이제는 커다란 비전을 제시해 주는 업계가 아니게 되었다.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일을 했을 테지만, 이런 곳이 있으면 좋을 거라는 생각에 시작하게 되었다.


Q. 여성 서사를 수집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가장 애정하는 혹은 소개하고 싶은 여성 서사는 무엇인가?

A. 내가 감히.(웃음) 하지만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세 작가분이 있긴 하다. 버지니아 울프, 캐롤라인 냅, 보부아르이다. 이 셋은 여성들이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작가님이라 생각한다. 서점을 하며 알게 된 작가님들이 많기에 지금은 여러 분들이 떠오르지만, 태초에는 그 세 작가가 나의 중심에 있었다. 현재 서점 내에서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카페 메뉴 이름도 그들의 이름이다.


Q. 인프로그레스라는 공간을 보며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열심히 활동할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인가?

A. 카드 값이다.(웃음) 빚에 쫓기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한다. 다른 서점도 마찬가지이지만 서점 운영으로만 수익을 창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외주 작업이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구멍을 메꾸며 운영한다. 나 역시도 서점을 운영하며 개인적인 프리랜서로 외주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들을 이 공간에서 하고 있다.


Q. 서점을 운영하며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

A. 매주 서점에서 뜨개 모임을 하고 있다. 몇 달째 신청 폼을 올리면 한 달 치가 일주일 안에 마감이 되는데, 이런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이 서점이 지니는 강점도 있고, 꾸준히 와주시는 단골손님도 계신다.

하지만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이 잘되지 않아 속앓이를 하고 있다. 서점이라는 공간의 성격에 맞게 그런 활동들도 잘 됐으면 하는데, 아직 서점을 연지 1년 차라 그런지 잘은 안 되고 있다. 그래서 어떠한 방향으로 관심을 유도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Q. 향후 진행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는가?

A. 사실 이 서점의 시작에는 잡지가 있었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 작업실이 필요했는데, 작업은 어차피 혼자 하고 있을 테니 문을 열어두고 사람들이 오가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점을 운영한 것도 있는데, 그 잡지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또한 브랜드들과도 협업해 보고 싶다. 과거 잡지사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 업계에서는 콜라보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서점은 브랜드와 협업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많지는 않다. 서점도 이곳만의 공간과 콘텐츠를 활용해서 협업해 보면 좋겠다.


Q. 작업 중인 잡지에는 어떠한 내용이 수록될 예정인가?

A. 제목은 ‘What The Feminine(WTF)’으로, 여성성을 재정의하자는 큰 포부를 지니고 있다. 너무 큰 포부를 담으려다 보니 나의 그릇이 작은 탓에 만드는 도중 스스로의 미로 속에 갇혀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거의 절반 정도는 제작이 되었기에 쌓여 있는 콘텐츠를 디자인해서 내놓으면 되지만, 이게 맞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매거진B’라고 매호마다 한 가지 브랜드를 선정하여 이야기하는 한국 잡지가 있다.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다루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첫 주제는 여성의 신체, 그중에서도 ‘가슴’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잡지이다 보니 에세이, 칼럼, 화보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슴에 대해 이야기해 볼 예정이다.

edior. 유월


인문잡지 「 영원 」 instagram: @0eterna1.m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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