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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와 게이지 Apr 30. 2024

서른여덟 또는 마흔, 쓰기와 뜨기

동네 산성에 오르는 마음.

 오랜만에 에 올랐다. 귀촌하신 아버지가 오랜만에 딸들 사는 동네로 오셔서 아버지, 언니, 남편, 나 그리고 아이까지 모두 함께 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귀촌하기 전까지 함께 살던 동네이기도 하다. 이는 중간까지는 할아버지 손잡고 1등으로 갈거라며 열심히 올라가다가 그 후부터 아빠 등에 3번에 걸쳐 업혔다 내렸다하며 올랐다. 정상까지 가지는 않았고, 정상 근처 정자가 있는 곳까지 올랐다.


 산 초입부터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자벌레가 환영인사를 하더니, 날이 따뜻해져 그런지 날파리들이 그렇게 반겼다. 이는 벌레가 싫다며 무섭다는 말을 염불외듯 반복해서 말하며 산을 오르내렸다. 계속 힘들다고 아빠차에 가고 싶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챘다. 이의 6세 인생 첫 등산을 꽤 힘든 곳으로 택했나 싶기도 했지만, 우리는 중간에 돌아갈 수 없었다. 일년 전 어머니가 우리에게 마지막을 고한 그 날이었고, 우리는 그 날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주 오르던 동네 산성에 오르는 것에 암묵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를 생각해서 인지 아주 천천히 산을 올랐다. 한번씩 멈춰 생각에 빠진 듯 해 보이기도 했고, 그 중 몇 번은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둘이서 틈날 때 마다 산성에 오르던 그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아버지께 종종 이야기 하시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산딸기 잎을 다른 것과 착각해서 꺾기도 했다는데, 나물이름을 몰라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고 했음에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렇게 딸들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게 될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눈물이 나진 않았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뭔가 얹힌 듯한 그런 느낌.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와 함께 살고 계신 듯 많은 것을 기억하고 계시면서도 많이 잊었다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내가 참 무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이가 할아버지 손잡고 등산하는 모습이 좋아서, 우리 가족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산을 오르는게 좋아서 그냥 좋았다. 날씨도 좋았고, 투정부리는 아이마음도 이해가 되어 괜찮았다. 불평없이 아이에게 등을 내어주는 남편에게도 고마웠다. 사과를 깎아주는 언니덕에 오랜만에 맛있는 사과도 먹었다. 아이도 사과가 달았는지 몇개씩 집어먹다가 달달한 향에 꼬인 벌때문에 먹는 걸 멈추고 아빠에게 사과를 양보했다.


 아버지는 에서부터 타온 믹스커피를 정자주변에 휘휘 뿌렸다. 그 커피를 어머니가 참 좋아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이야기였다. 나는 어머니가 그 곳에 계실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말리지는 않았다. 남편은 해가 잘 드는 곳이라고 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추억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나는 너무 외롭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딘들 외롭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기일이 다가와서 그랬을까. 얼마전에는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수다가 떨고 싶어져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머니가 귀촌한 이후로, 그리고 암투병을 시작한 이후의 2년은 더욱, 자주 뵈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주로 자주 전화한 날들이었다. 매일 전화하던 때도 있었고, 하루건너 하루 할 때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 하던 때도 있었다. 1년은 불안하면서도 희망찼고, 1년을 잘 버텨주신 어머니덕에 일순 마음을 놓았다가, 바로 악화되어 힘들어하시는 어머니 모습에 조마조마해 하며 1년을 더 보냈다. 할말이 많을 때보다도 별로 없을 때가 더 많았지만, 밥은 잘 먹었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오늘은 어떤책을 읽었는지 산책은 했는지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주로 아이가 등원하고 난 후에, 또는 하원하러 가기 전에 전화해서 그런지 한 동안 그 쯤만 되면 너무 전화가 하고 싶어 속상했다. 어머니가 보고싶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너무나 그리운 날들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랑 통화를 일절 안해서 아버지랑 잘 통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랜세월을 어머니가 우리가족을 돌본다고 여기고 살았기에, 그 때만 해도 아버지가 어머니 없이 혼자서 어떻게 사실까에 대한 고민이 절로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아버지는 지금 훌륭하게 열심히 농사짓고 딸들 챙겨주시며 싫은 소리 없이 잘해주시고 계신다. 밥도 세끼 잘 챙겨드시고, 가끔은 라면을 드시지만, 혼자서 나물도 무쳐 드시니, 오히려 주부인 나보다 나은듯 하다. 전화통화도 그렇다. 무슨이야기를 할까 싶었는데, 내 예상과 다르게 일상적인 이야기도 잘 해주시고,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신다. 가끔 다른 볼일때문에 급하게 끊을 때는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통화하는게 어렵다거나 어색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의 참매력에 대해 깨닫게 되는 새삼 놀라운 날들이다.


 이것도 어머니의 배려이셨을까. 결혼하며 오랜기간 떨어져 산 덕일까. 어머니가 그리워 우는 날들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그리고 문득 겁이 난다. 아버지가 너무 좋아져서. 어머니를 향하던 애정마저 아버지에게 모두 가버린 듯 아버지가 너무 좋아져서 겁이 난다. 먼 곳에서 꿋꿋이 혼자 잘 생활하시는 아버지를 보면 뿌듯하다가도, 이제 아버지는 옆에서 챙겨줄 사람 없이 혼자인데 어쩌지 하는 마음. 한창 사과농사로 바쁜 철이라 오전에 등산하고 오후에 다시 돌아가시려던 걸 붙잡아서 우리집에서 한밤을 더 같이 보냈다. 그렇게 붙잡아서 보냈건만, 끼니를 제대로 챙겨드리지도 못하고, 잠자리를 제대로 살펴봐 드리지도 못했다. 서부터미널까지 남편만 운전해서 모셔드리고 나와 언니는 집에 남았다. 딸들이 정말 무정하다.


 그래도 어머니덕분에 남편이 한번씩 평일에 쉬면 같이 동네 산성에 오르기도 하고, 오징어 땅콩도 사먹고, 하산하고 국밥도 한그릇씩 하며 데이트를 즐긴다. 아버지와도 영상통화하며 자주 얼굴을 본다. 귀찮은 듯 얼른 끊어라고 호통치듯 말하실 때도 있지만, 이제는 뭐 아버지 성격에 그러려니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어머니께 떳떳하려면 어머니의 평생의 사랑인 아버지께 잘해드려야 할 텐데 같은 생각도 한다. 그래서 아버지께 더 잘해드리고 싶지만, 뭘 사드려도, 뭘 해드려도 맛나다는 이야기를 안하시니 음식으로 잘해드리긴 글렀고, 농사일 바쁜시기가 지나면 같이 놀러갈 곳이나 찾아봐야겠다. 잘 모르겠다. 정말로 참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나이들수록 더 많아진다. 아버지를 통해서 어머니를 만난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어머니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는 않았으면 하다가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올려줘서 고마운마음도 든다. 아버지가 더 자주 오셨으면 좋겠다. 또 한귀로 흘려버릴지 몰라도 아이와 사위와 딸들에게 어머니가 좋아하던 산행이야기를 산을 오르며 더 많이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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