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달 전에 6년동안 다니던 정든(?) 동물병원을 떠나서 새로운 동물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6년동안 동물병원은 나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수의 간호사로 시작해서 수의사가 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병원이다. 그 과정을 진행하는 동안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임상수의사의 첫 발을 트레이닝 시켜주었다. 내가 필요한 트레이닝을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한국까지 날아가서 발표를 할 수 있게 도와줬다. 적고 나니 더 고마운 이 동물병원을 나는 박차고 나왔다. 받은 것이 많은 만큼 은혜갚은 까치 마냥 열심히 일해서 갚겠다는 마음은 홀랑 버리고 옮긴 것이다. 고맙고도 민망하다. 적고 보니 내가 더 나쁜 사람같다.
이직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결코 이직을 하기위해 이력서를 보내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이직의 기본인 이력서(레쥬메)와 커버레터를 전혀 쓰지 않고 다른 동물병원으로 옮기는 희안한 일이 생긴 것이다. 북미에 살아본 사람은 안다. 직업을 구하는 기본이 레쥬메와 커버레터라는 것을. 레쥬메는 기본이고, 커버테러는 공식적인 형식이지만 기본적인 직업들은 잘 안쓰기도 한다.
직업을 구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이러하다. 구인사이트에서 난 광고를 보고 레쥬메와 이력서를 보낸다. 인사 담당자가 이력서가 마음에 들면, 이메일이나 전화로 연락을 보내서 인터뷰 일정을 잡는다. 인터뷰에서 마음에 들면, 레퍼런스(추천인)을 요구한다. 레퍼런스는 추천인에게 편지를 받아서 제출하거나 아니면 인사 담당자가 추천인과 직접 연략해서 이력서를 넣은 사람이 어떤지 물어본다.
요 과정중에 내가 추천인이 된 것이다. 우리 병원을 떠났던 수의 가호사가 있는데, 떠나면서 나에게 나를 추천인으로 넣어도 되냐고 물었었다. 나는 당연이 된다고 했다. 그녀가 직업을 옮길 때마다 전화를 받았었다.
그녀를 위한 두번째 전화가 내가 직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인사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내가 추천한 그녀의 얘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점점 발전되어 내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나도 나중에는 개업을 하고 싶다는 얘기까지 우연히 나왔다. 인사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즐겁게 통화하던 중이었다. 그러자 대뜸 우리 병원에서 (병원이 기업형 회사라 여러 병원을 관리하고 있었다) 원장들을 고용한다며, 너도 병원장이 될 수 있다며 꼬시기(?) 시작했다.
전혀 이직의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냥 흘려 듣는데, 자꾸 자기들 benefit이 좋으니 한번 보라며 이메일까지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오타와에 수의사를 구하는 곳이 두 군데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 중 한군데는 집에서 차로 10분 밖에 안 걸리는 내가 아는 병원이었다. 그녀가 보내준 benefit은 내가 지금 다니는 병원과 거의 비슷해서 그닥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차로 10분! 이것이 매력적이었다. 당시에 다니던 병원은 좋긴 하지만 거리가 멀었다. 60km 떨어진 곳이었고 차로 45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가끔 사람들과 얘기하면 첫번째로 듣는 얘기가 그 먼거리로 어찌 통근하냐는 말이었다. 인터뷰 볼때 나를 받아줘서 시작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고속도로로만 가면 되니 운전이 힘들지 않아서 다닐만 하다며 자기 위안겸 말하곤 했다.
그런데 코비드 시국이 지나고 나니 언제나 교통체증과는 반대였던 나의 출근길에도 정체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통근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한 곳에서 자꾸 머무르고 안주하려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직=연봉협상이니 잘하면 연봉도 올라가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 주가 지나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인사 담당자와 화상 인터뷰, 병원 매니저와 1:1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이제나저제나 언제 이력서를 달라고 할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는 데 (사실 직업을 많이 옯기지 않다보니 새로 써야해서 약간 귀찮은 모드였다) 이래저래 말로 주고 받다가, 계약서에 싸인하고 고용이 되었다.
인터뷰로 나의 수의사 경력을 다 확인하니 따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용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이메일을 보내준 곳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너의 능력을 완전히 믿고 고용하니 잘 하리라 믿는다는 내용이었는데, 나가 말한대로 못하면 그건 니책임이니 알아서 잘해라는 협박(?) 또는 중압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내가 한 말에 거짓이 없으니 그 또한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웃기게도 내가 추천인으로 해준 그 수의 간호사는 offer를 받았음에서 이 병원으로 오지 않았다. 엉뚱하게 reference때문에 전화를 하던 내가 직장을 옮기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것은 역시 네트워킹이라는 것이다. 서로 알음 알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인맥이라는 것이 대놓고 통하는 곳이 내가 겪은 캐나다이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을 때고 집을 수리할 때도, 집을 렌트할 때도 reference를 요구하는 곳이 많다. 그 사람을 모르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보기 위함이고, reference조차 제대로 못 주는 사람은 벌써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만큼 형편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튼 나는 이러한 사유로 이력서 한 장없이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이전에 다른 일로 근처를 지나면서 "와! 여기서 일하면 집이랑 가깝고 진짜 좋겠다."라고 무심히 말했던 동물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진실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