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카톡알림이 왔다. 예약한 도서가 준비되었으니 기한 내에 대출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렇게 김연수 작가의 신간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읽었다. 보통의 단편소설의 분량보다 더 짧은 소설들은 기존의 그의 작품과는 달랐다. 작가 자신을 더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작가의 말에서 김연수 작가는 그 변화에 대해 언급한다. ‘이 세상 속에서 소설을 쓰는 일의 의미를 알게 됐다.’는 말. 그는 관찰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 세상을 바라본다. 소설의 형태를 했지만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들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빠르다. 십 년이 지나는 것도 이렇게 금방이라니.
나는 쉽게 영향받는 사람이다. 나름 주관이 뚜렷하다고 생각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소리 들어봤지만, 그 모든 생각들이 다 내가 진공 속에서 스스로 깨우친 진리 같은 것일 리는 없잖은가. 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문장과 아이디어들을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뱉어내고 있다. 그중에 김연수 작가의 시선, 태도가 큰 지분을 차지한 걸 새삼 깨닫는다. 세뇌당했거나 아니면 머릿속을 해킹당했거나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들이 비슷했다.
오랜만에 김연수 작가의 <지지 않는다는 말>을 펼쳤다. 과장 없이 10번 이상 읽은 책이고, 정확한 횟수는 모르지만 아마 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은 책이다. 나는 책에 내 소유임을 밝히려고 이름을 적지는 않는데 이 책에는 내 이름이 있다. 제일 앞장을 펼치면 보안통제, 통제확인이라는 단어와 함께 빨간 도장이 찍혀있다. 나는 군대까지 이 책을 들고 가서 계속 읽어댔던 것이다.
밑줄 그어놓은 수많은 문장들. 여전히 좋다. 신간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의 문장이나 생각들이 왜 그렇게 이미 익숙했는지 알게 됐다.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의 문장과 생각들이 그대로 에세이에서 소설로 형태만 바뀐 책처럼 느껴진다.
김연수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유사한 점이 많다. 문학 전공자가 아니니 문체나 뭐 그런 작품적인 부분은 모른다. 유사하다고 느낀 건 소설가라는 본인 직업에 대한 인식과 작업활동을 대하는 태도, 음악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취향,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마라토너라는 것.
<지지 않는다는 말>은 여러 소재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들은 역시 달리기에 관한 것들이다.
-일부러 고통을 찾으려는 마음이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내가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 6시 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때뿐인데, 햇살이 뜨겁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p.19
-가을 대회를 위해 여름에 연습할 때, 가장 흥분되는 순간은 비가 내릴 때다. 비에 젖을까 봐 겁내는 러너를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땀으로 젖어 있을 테니까. 여름의 러너, 그 역시 비에 젖지 않는다. p.271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마음산책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병적으로 날씨를 체크하고 있다. 여름이 다가오니 더 자주 그랬다. 기온, 습도, 미세먼지, 강수확률.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확인한다고 해서 무더운 날씨가 갑자기 쾌적해지거나 내려야 할 비구름이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더운 햇빛 아래서, 혹은 빗속에서 달리는 날들이 많았다.
위에 인용한 김연수 작가의 문장들을 몰랐다면 나는 날씨를 핑계로 달리기를 자주 쉬었을 테다. 몇 번 하다가 흐지부지되는 많은 일들처럼, 그렇게 달리기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달리기를 하지 못할 이유는 너무 많다. 핑계는 수백 가지지만, 달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면 충분하다. ‘왜 달리는가?' 에 대한 지금의 대답은 "뛰다 보니까, 더 잘 뛰고 싶어서. 잘 달리고 싶어서 달린다." (-너무 허세 부리는 거 아니야? -저는 진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