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존재해서 물어본다며 원하는 것이 있다. 아버지께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해 드리고 하룻밤이라도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면 감사한 마음과 추억만 새록새록 떠오른다. 한 번도 큰소리 내지 않았고 불편한 소리 하지 않으셨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많이 따라 다닌 기억이 있다. 대구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내 키가 아버지 허리춤 정도가 되었던 때 즈음이다. 경찰 아저씨가 아버지께 경례를 붙이자 아버지 옆에 있던 내가 따라 하는 바람에 모인 분들이 다함께 웃었던 것이 기억난다.
학교에서 받아 온 통지표를 꺼내놓고 대청마루에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읽어주셨던 때도 있었고, 겨울이면 아버지 오토바이 뒤에 동생들과 함께 태워서 암산 스케이트장으로 다니기도 했다. 스케이트장에서 코너를 돌 때 아버지는 속력을 더 잘 내며 사람들을 따라잡아 멋져 보이기도 했다. 검은색 오버코트를 입고 스피드스케이트를 타며 돌아다니면 남동생은 나와 여동생을 따라다니며 물개라고 놀려 대기도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흐뭇해진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기도 하다. 교사가 되어 김천에서 처음으로 나 홀로 자취하고 있었던 어느 날 아버지가 혼자 다녀가신 적이 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였지 않을까 싶다. 내 생각이 짧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드리지 못했고, 따뜻한 말씀도 못 드렸다.
가장 마음 아픈 건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다. 코로나시기에 갑자기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된 것도 불효였다. 전화로 아무리 설명하고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병원에 오질 않고 전화만 하고 어쩌다 면회를 가도 문밖에서 창문너머로 면회하기도 했다. 도저히 코로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 서운함 때문인지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연로해도 우리 곁에 조금 더 계시리라 믿고 있었다. 서운함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셨을 것 같은 마음이었는지 장례식 당일의 날씨는 너무 차갑고 싸늘한 날씨로 느껴졌다. 49제를 지낸 후의 날씨가 좋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기도 했지만 그 죄스러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마음 표현으로나마 편히 떠나보내 드릴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남은 숙제이다.
친정에서 하룻밤 자게 된 날, TV아래 서랍이 보여 열어보았다. 엄마의 보물 상자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이력을 볼 수 있는 정말 오래된 몇 가지가 있었다. 여권,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청소년지도위원증, 경상북도 정화추진협의회, 경북 BBS청소년선도위원, 안동경찰서 치안협력위원, 보리혼식장려요원, 위민봉사증…. 퇴직하신 후 사회 봉사 활동으로 하셨던 일들 중 일부가 아버지 삶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노트가 몇 권 있었다. 낯익은 아버지의 글씨다. 아버지는 붓글씨도 잘 쓰시고 글씨체도 멋졌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중 몇 페이지를 사진으로 막 찍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자세히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모임의 기록물인듯한 회계장부도 있고, 하루하루의 아버지 일과 중 중요한 몇 가지 일정을 기록해 놓은 내용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TV방송 본 것이 생각났다. 100세와 90세가 넘은 노부부 두 분이 오순도순 지내는데 밤이 되면 할아버지는 그 연세에도 하루의 일과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방송을 타게 되신 듯했다. 우리 아버지도 아직 살아계신다면 이 기록들을 꾸준히 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자꾸 꺼내서 뒤적거리며 들여다보자 엄마가 걱정스러운 듯 이야기했다.
“그건 그냥 그대로 내비 둬.”
언젠가 엄마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집 정리를 한 적이 있다. 불필요할 것으로 생각해서 버린 것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것이 없어졌다고 계속 찾았다고 했다. 또 내가 버릴까 봐 걱정되신 모양이다. 엄마께 그것은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물건들로 보인다.
엄마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끝까지 잠을 주무시지 않았다. 밤조차도 눕지 않고 아버지 곁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놀랐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결코 다정한 부부가 아니었다. 티격태격 하도 많이 해서 내가 중간자 역할을 많이도 했었다. 아니, 약자 아버지 편을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아버지를 추억하려고 애쓰고 계시는 것으로 보인다.
“엄마, 나도 이건 안 버려요.”
아버지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노력의 하나로 일단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만의 밴드를 만들어 담아 놓았다. 아버지 기록의 한 페이지를 조금씩 써 내려가 보련다.
“그런데 아부지, 하룻밤 내려오신다면 누구와 보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