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권
가은이가 삐쳤다. 큰 손녀 순서가 되었으니 세 살 동생이 타고 있는 유모차 뒤편에 올라타라고 해도 타지 않고 곧장 직진해서 가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이번엔 가은이 순서이니 가은이가 타자.”
내가 불러도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만 간다.
“…”
“가은아, 가은아!”
“…”
단단히 토라졌다. 두 손녀가 다섯 살이다. 6월생 다섯 살 가은이가 큰아들의 딸인 큰 손녀이다. 8월생 다섯 살 시아는 작은애 딸인 작은 손녀이다. 오늘은 내 생일이라 온 가족이 모처럼 온천여행을 했다. 숙소 근처 활옥동굴을 들어가 관람도 하고 동굴 안에 있는 작은 호수에서 탈 수 있는 보트도 타면서 하루를 보내려고 동굴 안을 걸어가는 중이다.
큰아들네는 둘째가 어리니 유모차를 가지고 왔다. 요즘 유모차는 형제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있었다. 유모차의 아기가 앉는 자리 외에 부모가 유모차를 밀어주는 손잡이를 큰 아이가 함께 잡고 뒤편발판에 올라서서 같이 운전하는 듯이 서 있을 수 있도록 발판이 하나 더 조립되어 있었다. 그 자리는 두 명이 올라설 수는 없고 한 명만 올라설 수가 있다. 그 자리는 당연히 가은이 자리다. 아직 동생이 없는 시아는 그런 유모차는 필요도 없었지만, 오늘 처음 보았다. 가은이가 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자기도 그 자리에서 타고 싶어 한다. 타고 싶다고 칭얼대고 있더니 기회를 봐서 뺏어서 탈 기세다.
실랑이가 벌어질 즈음 내가 교통정리를 하기 위해 나섰다. 어느 구간까지 가은이가 타고 다음은 시아가 타기로 하자고 말했다. 설명을 천천히 해 주었다. 아이들이 다섯 살이지만 말을 잘 알아듣고 이해를 잘하는 편이라 쉽게 설득이 될 줄 알았다. 지난번에, 겨우 설득해서 조정했던 경험도 있고, 그게 바로 공정한 것이고 공평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교직 생활 42년 만에 정년퇴직하였으며 나름으로는 학급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에게도 모두 공정하게 대해 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니 다섯 살 두 손녀 이해시키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던가! 잘 이해하고 따라 주리라 생각했다.
일 전에 손녀들을 좀 봐 달라고 하여 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아이들이 타는 쌩쌩이 보드를 둘째네 손녀, 시아만 갖고 왔었다. 시아는 자기 것이라고 자기만 타려고 했다. 그래서 둘이 같이 타야 한다며 규칙을 내가 정해서 설명했다. 일정 구간을 시아가 먼저 타고 내가 정해 준 지점이 되면 가은이가 타는 것이다. 내가 지휘했다. 큰 소리로 구령을 부르듯 소리를 치면서 중지하고 나의 지휘에 따라 서로서로 교대로 탔다. 시아가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다가 내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니 어쩔 수 없이 교대로 타게 된 것이다. 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유모차 뒤편에 타는 것도 잘 이야기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정 구간을 정하고 교대로 타도록 지휘했으나 교대를 안 해 주려 하는 것이다. 끈질기게 이야기했더니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는 했는데 내려오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정해 준 일정 구간까지 시아가 좀 타고나서, 다시 가은이 차례라고 했지만 안 타겠다는 것이다. 정말 단단히 삐친 것이다. 난감했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 화려한 불빛과 함께 동굴 안 호수가 나타나고 신기한 보트를 타야 할 때가 되자 가은이도 삐진 기분을 잊고 다시 신나게 보트를 타게 되었다. 동갑 사촌동생 시아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는 가은이는 시아와 둘이 함께 보트에 타도록 해 주겠다고 하니 좋아했다. 가은이의 기분이 풀어져서 다행이었다.
이젠 동굴에서의 나들이를 마치고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밖으로 나가는 동안 또 가은이와 시아의 유모차 뒷자리 차지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이번엔 작은아들이 유모차를 밀어주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알았어. 이 유모차는 가은이네 거야, 유모차 자리 양보는 가은이가 결정할 거야, 그렇지?”
“네.” 가은이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결정권은 가은이에게 있어. 가은이가 양보해 주고 싶을 때 양보해 주는 거야.”
결정권이 가은이에게 있다는 작은 아들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가은이가 말했다.
“내가 쉬고 싶을 때 시아가 타.”
시아는 결정권 이야기에 두 말을 못 하고 유모차 뒤쪽 서서 가는 자리가 아니라 유모차 앉는 자리로 올라가서 사촌 동생 채은이 뒤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가은이는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다는 말에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뒤쪽 발판에 서서 즐겁게 나들이를 마칠 수 있었다.
자기 결정권, 매우 중요한 권한이다. 시아의 것인 생생히 보드를 타는 권한, 가은이의 유모차 뒷자리 차지에 대한 중요한 권한을 할머니가 강제로 결정했던 것이다. 소유주의 권한을 무시하는 결정을 남이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억울해도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당했던 가은이, 시아의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손녀들에게 억울한 일을 만들어 준 것이다.
나는 아들의 차를 자주 빌려 탄다는 일이 생각났다. 그때 어떤 방식으로 빌려 탈 수 있었나? 내가 엄마이지만 나는 빌려 탈 때마다 아들의 허락을 받아서 탄다. 그리고 당연히 아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빌려 탈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시아의 쌩쌩이가 시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은이의 유모차도 소유자가 가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조건 둘이 공평하게 타라고만 했다. 사용에 관한 것만 똑같이 시간을 정해서 공정하게 하라고 했던 것이다. 둘 다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토라지다가 삐지다가 어찌할 수 없어했다. 가은이는 작은 아빠가 소유권을 인정해 주면서 결정권이 가은이에게 있다고 하니 억울했던 마음이 사라졌을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결정권을 강제로 내가 아닌 남이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결정권은 가은이에게 있어.”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작은 아들의 말이 내 머리에 맴돈다.
2023년 에세이스트 107호 수록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