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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익은 Mar 28. 2024

기억과 존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너무나도 자명한 이 문구처럼 우리는 좋든 싫든,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와는 부대끼며 이 사회를 살아 나가게 된다. 혈기 왕성한 학창 시절에는 학교나 학원에서 동네 친구들을 알아가고,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 혹은 거래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노년에 들어서는 모임을 통해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새로 알게 된 사람의 수가 차곡차곡 쌓여가니, 친한 사람의 수도 그에 정비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친한 사람의 수가 늘어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인생의 특정 부분에서 자신과 교집합을 이루는 주변 사람은 늘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며, 또 상황에 따라 그 주변 사람이 지속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인 듯하다. 이렇듯 주변의 환경이 잘 뒤받쳐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는, 특정 시점에서 특정인들과 특정한 추억만을 함께 공유하게 된다. 즉, 늘 누군가와 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더라도, 동일한 인물과 내 인생의 모든 시점을 공유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처한 상황에 따라 주변 환경이 자주 바뀌는 요즘이기에, 팽이치기를 하던 친구와 인생의 황혼까지 쭉 같이 보내며 지난 한 평생을 추억하는 경우는 축복받은 인생이라 할 만큼 극소수로 제한되곤 한다. 보통은 내가 속한 집단에 따라 그 추억을 공유하는 대상도 바뀌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서로가 같은 집단을 공유하기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에 나오니 내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는 저 먼 곳으로 떠나가 버렸고, 그들과 접점이 없어지자 나는 자연스레 다시 새로운 사람들과 교집합을 이루며 인생의 새로운 부분을 계속 채워가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직장까지. 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끈끈하게 보냈던 이들도 환경이 변하자 점차 소원해지게 되었고, 우리는 이렇게 각기 함께한 시절의 추억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나니, 이제는 친했던 이와 멀어지게 되는 것에 그리고 다시 낯선 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이별이 수반된다는 격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나는 최근에 소소했던 동창 모임을 계기로 인해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보통의 경우,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다 만난 오랜 친구들과는 서로의 추억을 안주 삼아 한껏 떠들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갔다가 서로의 조각난 기억을 끼워 맞추어 보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날은 무엇 때문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러한 의문이 들었다.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면 내 과거는 없어지는 것일까? 새로 만난 사람에게 백날 떠들어봐야 그때 그 감정을 알아줄 리 만무할 텐데…”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촉각, 미각, 시각 등의 감각과 슬픔, 기쁨, 희망 등의 감정 그리고 흥분과 절망을 겪었던 어느 경험을 언어로 상대방과 공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억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무엇을 경험했는지, 여행을 다니면서 어떤 것을 보았는지, 한평생 잊지 못할 짜릿함을 어느 상황에서 느끼게 되었는지 등을 애써 말로 풀어 설명한다 하더라도, 열심히 설명하는 우리조차도 사실은 상대방이 나의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표면적인 공감만 갈구하고 있으니 매우 공허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한 개인이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기란 매우 버거운 일이기에 나타나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을 통해 그 순간의 감각과 감정 그리고 경험을 떠올리며 서로의 의식을 명확히 하고 또 이를 확장할 수도 있다. 이는 언어로 도달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계이다. 설령 묘사에 능한 언어 전문가인 화자와 이해와 공감이 뛰어난 청자가 존재하여 화자의 기억을 사실상 동일하게 구현해 내고 또 공감했다고 가정해 보더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청자가 화자의 기억 속 어느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화자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화자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상대방이 기적적으로 화자가 의도한 바를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할지라도, 청자가 그 기억 속에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화자는 곧 김이 빠지게 된다. 서로의 의식을 명확히 할 수도, 확장시키기도 힘들기 때문에 화자는 청자에 이질감을 느끼고 곧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둘째, 화자가 말한 기억의 사실 유무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으로, 청자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우리의 뇌는 일상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며 인생에서 큰 자극이나 충격을 안겨주었던 몇 가지의 굵직한 사건들만 간직하게 된다. 이렇게 뇌에 각인된 내용들 중 대부분은 특별한 경험이거나 인생에서 두 번은 경험하기 힘든 순간들일 텐데, 청자가 과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밀어줄 수 있냐는 것이 문제이다. 표면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겠지만, 본인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다 보니 어느 정도의 의심은 남아있기 마련인데, 이것이 그 다음 단계로의 확장을 방해하게 된다.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로 자신의 기억을 타인과 제대로 공유할 수가 없으므로, 과거는 언제 꺼질 줄 모르는 촛불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타인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를 온전히 공유하거나 증명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신의 과거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막혀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통로가 막혀버린 이상 과거는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게 되며, ‘과거의 나’ 더 나아가서는 ‘과거에 존재했던 나’조차도 서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의 존재는 대체 불가능하며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기억을 공유하는 것을 뛰어넘어 상대방의 과거(에 존재했음을)까지도 증명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중함에도, 만남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수반하는 것이 운명이다.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꺼내어보고 공감하고, 더 나아가서는 서로가 존재했음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이들과 그 운명의 끈이 쉬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염원할 뿐이다.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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