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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은 Mar 30. 2024

찬양하라! '이상'을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자! 이것은 현대 사회의 사회 구성원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내용이다. 개성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특징이자 성격이므로, 본디 사람이 존재하는 수만큼 각기 다른 개성이 존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무언가를 구분 짓고 분류하며 단순화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류의 메커니즘 덕에 우리는 늘 어떠한 기준을 세워 끊임없이 인간을 나누곤 한다. 인간을 분류하는 기준은 정말 다양하지만, 개중 흔히 언급되는 것이 감성적인 사람이냐 이성적인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갖가지 성격테스트에 이성적이냐 감성적이냐는 늘 빠지지 않는 카테고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상대방과 나와의 ‘궁합’을 맞추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이 나와 비슷한 성향임을 알면 같이 일하기도 편하고 대화가 잘 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겨,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 수 있다. 반대의 경우에도 나름의 장점이 존재한다. 상대방과 일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고회로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기에, 사전에 협업을 피할 수도 있고 불가피할 경우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여 마찰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실례(實例)를 보면, 확실히 평온한 일상생활 속에서는 같이 일하기 편하거나 대화가 잘 통할 것인가와 같은 성격의 디테일을 구별하는 것은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일상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을지라도, 한층 더 높은 층위의 기준으로 사람을 먼저 파악하며 그에 대한 가치를 더 높게 사고 있다. 그 높은 층위의 기준은 바로 상대방이 현실적인 사람이냐 이상적인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상을 좇는 사람을 굉장히 존경하며 이런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고 싶어 한다.


우선 왜 현실과 이상의 기준이 감성과 이성보다 더 높은 층위라고 생각하는지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으로 왜 이상을 좇는 사람과 더 많이 교류하고 싶어 하는지를 설명하는 게 순서에 맞는 듯하다.

전쟁이 발발했다고 가정해 보자. 일단 전쟁이 발발(현실의 조건)하면 개인이 감성적인 사람인지 이성적인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눈 앞의 현실을 헤쳐 나가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으로 인해 얼굴에 난 솜털이 떨리고 있는 앳된 소년을 먼저 죽여야 하며, 이 전쟁이 단순한 사회 지도층들의 권력 다툼으로 빚어진 참극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내 총구는 사회 지도층들이 아닌 자신과 똑같은 이유로 전쟁에 내던져진 ‘또 다른 나’를 향해야 한다.

전쟁이 너무 극단적인 예라 느낄 수 있으니, 조금은 ‘현실적인’ 가난을 살펴보자. 파산, 사기, 도박 등 어떠한 이유로 본인이 갑자기 빚더미를 떠안게 되었다.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TV에 나오는 아프리카 난민 어린이에게 매달 정기후원을 할 수 있겠는가? 고금리 대출을 받으면 가난의 늪에서 한평생을 허우적댄다는 걸 알지만, 당장의 숙식이 문제인데 어찌 금융 서비스 업체의 번호를 누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현실은 당신이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높은 층위에서는 그 하위의 속성들은 무의미한 것이다.


다음으로 한층 더 높은 층위의 현실과 이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들이 현실적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어떨까? ‘낭만이 없다’ 정도의 아쉬운 피드백은 받을 수 있겠지만 딱히 부정적인 느낌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요즘은 현실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철이 들었다고 치켜세워주는 상황이 많으니 굳이 따지자면 조금은 더 긍정적인 느낌이다.

이에 반해 이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극과 극으로 나누어진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해냈지?’라고 감탄하며 경외심이 절로 들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이 없고 현실 감각이 떨어져 정말 속 터지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이 둘을 비교하니 명확해진다.

현실적인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경우가 많고, 이상적인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각도로 해석해 보면, 현실적인 사람은 주어진 상황의 틀 속에 갇혀 벗어날 수 없지만, 이상적인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극복’(어쩌면 이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 갇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하여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사람이다. 이상적인 사람의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사회는 혼란 그 자체에 빠지기 때문에, 안정을 원하는 사회는 우리를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장치를 마련해 놓았고, 그렇게 우리들은 사회의 영향을 받아 점차 현실적인 사람으로 맞추어지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인 사람들만 있으면, 사회는 점점 경직되어 가고 경직된 사회에 변화는 없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중에는 최초에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있어 개선 및 보완으로는 해결이 힘든 부분들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주의자들의 ‘땜빵식’ 문제해결이 아니라 근간을 뒤바꿀 수 있는 이상주의자들의 ‘발칙한’ 생각이 필요하다. 

사회가 경직되지 않고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상 DNA’를 조금씩이라도 주입해 주는 이상주의자들을 그래서 나는 좋아한다.


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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