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후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이 하나둘씩 자본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련의 붕괴, 등소평의 개혁개방,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까지… 자본주의는 이처럼 이념 경쟁을 통해 20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막을 내렸다.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유주의 또한 자본주의가 대두함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를 택한 국가들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현재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 방식의 깊숙한 곳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자본주의의 한계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의 핵심가치도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란,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인권에 기반하여, 그 존엄성을 인정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정치적 사상이다. 본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서로 상호 보완하며 양립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의 사회에서는 자유주의가 자본주의에 잠식당해 버린 듯하다.
이른바, ‘돈으로 자유를 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다소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나, 미사여구를 제외하고 다소 직설적으로 표현했을 뿐 절대 과장은 아니다.
너무 많이 차용되어 식상한 비유이긴 하지만 논하고자 하는 바를 끌어내는데 적절한 예시로 생각되니, 어린 나이에 가장의 짐을 짊어지게 된 A와 재벌가 손자 B의 대비되는 인생 이야기를 빠르게 훑어보자.
A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몸이 편찮으신 부모님을 돌보느라 일찍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유시간도 갖지 못하며 그렇게 방학도 밤낮도 없이 계속 일만 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신문을 돌리고 오후까지 커피숍에서 커피를 내리다가 저녁에는 고깃집에서 불판을 닦는다. 그렇게 고된 하루를 보내고 눕자마자 곯아떨어지지만,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눈을 떠야 한다. 이렇게 생계를 위한 단순 노동만 하였으니 전문직을 갖거나 대기업에 취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비슷한 삶의 패턴은 쭉 이어진다. 힘들게 일해서 받은 월급은 월세와 이자 그리고 병원비로 빠져나간다. 적금은 언감생심, 생활비 때문에 되려 대출만 늘어난다. 감당이 안될 만큼의 대출을 안고 있으니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고 그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사치가 되어 버린다. 그저 반복되는 삶에 자신의 건강을 갉아 넣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과로사하게 된다.
B는 전문 요리사에게 식단관리를 받으며 기사님의 차에 몸을 싣고 등교한다. 고급 승용차 안에서는 최신형 핸드폰으로 과외 일정을 확인한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최고급의 교육을 받으며 취미로 악기를 다룬다. 아무래도 수학에 취약하다 보니 악기라는 취미를 활용하여 수시전형을 노린다. 명문대 졸업 후,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싶다며 사업을 여러 개 벌이지만 어쩐지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좌절은 없다. 꼬박꼬박 받는 임대료와 거침없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 덕에 사업 실패는 B의 인생에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여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행복한 삶을 시작한다. 몇 번의 실패 덕에 쌓인 노하우 때문일까? 결혼 후 생각해 낸 사업 아이템이 대박을 치면서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 때문에 자금흐름이 막혀버려 회사는 결국 도산을 하게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구나’라고 한탄을 하며 가슴에 얹힌 짐을 덜어내고는 가족과 함께 여생을 뜻깊게 보내기로 한다.
우리는 이 대비되는 인생을 통해 돈이 개인의 자유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질 알 수 있다.
먼저, 시간의 자유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물리적인 시간이 동일하다는 것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단지 타인을 위해 보내는 시간과 자기 자신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상대적인 시간이 달라지는 것이다. A와 B의 인생 전체를 보면 상대적인 시간은 가혹하리만큼 큰 차이를 보인다.
다음은, 기회의 자유이다. 돈은 많은 실수를 용납해 주며, 부유한 이들에게 더 많은 그리고 양질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가난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 이들에게는 실수에 대한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의 자유이다. 불량한 식습관과 열악한 근무환경 그리고 항상 인내하고 견뎌냄으로 쌓여가는 스트레스까지… 본래 건강함의 정도는 삶의 질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준다. 건강을 잃으면 시간과 기회는 물론이요 결국 인생까지 잃게 된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벌써 세 가지의 자유가 등장한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려서 다양하고 복잡한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부자들은 생각보다 더 많은 ‘자유’들을 돈으로 사고 있고, 가난한 이들의 자유는 돈에 의해 팔려 나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고 돈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사실상 없어졌다. 명백히 법으로 제한되거나 과학기술의 한계에 부딪힌 영역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돈으로 거래가 가능하다. 이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비물질적인 ‘여러 종류의 자유’가 다양한 모습을 통해 돈으로 거래되고 있음에도 우리들은 이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삶이 팍팍해도 우리는 배금주의, 즉 돈을 숭배하는 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 한다. 돈으로 거래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고 잘 지켜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자본주의란 괴물에 개개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잡아먹히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니 말이다.
2024/04/02